사람이 우물에 빠지면 仁者는 어떻게 하는가?

仁者는 당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by 발검무적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재아(宰我)가 물었다. “仁者는 비록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고 말해 주더라도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자 하여) 따라 우물에 들어가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는 (우물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그럴듯한 말로) 속일 수는 있으나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장은, 인(仁)을 강조하는 공자(孔子)에 생각에 대한 문제적 제자, 재아(宰我)의 도발적 질문이다. 재아(宰我)는 앞서 몇 번 언급되었던 재여(宰予)이다. 자(字)가 자아(子我)라서 재아(宰我)라 명칭한 것이다.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에서 공자와의 나이 차이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제자이고, 공자의 禮와 仁에 대한 생각과 충돌하는 부분이 많은 제자이기도 하다. <논어>에서는 재여(宰予)의 상징처럼 된 대화가 바로 참최(斬縗) 3년상의 상례(喪禮)에 대한 스승과의 논쟁 아닌 논쟁이다. 3년 동안 상을 행하면 禮가 무너지고, 樂이 무너지며, 묵은 곡식은 상하고, 새 곡식은 싹이 나버릴 정도로 폐해가 크니, 부싯돌 나무를 바꾸는 1년이 적당하다고 도발하자, 공자는 살짝 날카로워져 ‘너는 그게 편한가?’ 라며 묻고서, 재여를 不仁한 자로 치부하는 내용이 뒤에 배울 ‘양화(陽貨) 편’ 21장에 나오는데, 그 유명한 이야기 전부터 재여(宰予)의 도발적인 생각과 태도를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 같은 내용이다. 이 장은 공자의 인(仁)에 대한 평소의 생각에 대해 재여(宰予)가 자신의 생각을 공자에게 훅 들이미는 장면이다.


좋게 말하면 재여(宰予)는 늘 공자와는 많이 다르지만, 상당히 날카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의견을 품은 질문을 과감히 던져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단목사(端沐賜, 자공)와 함께, 사과십철(四科十哲)에 포함되어 ‘언어(言語)’ 분야에 뛰어난 것으로 분류된 제자이기도 하다.


원문에서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심오한 장고(長考)가 필요한 딜레마적 질문을 던지는 제자나, 그것에 대해 조금의 거침도 없이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노타임으로 내미는 공자의 수준은, ‘아! 이래서 성인이라 칭하고 재여(宰予)도 스승으로 모셨구나!’하고 탄식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장에 대한 주석은 주자가 아닌, 독특하게 유빙군(劉聘君)이라는 사람의 주석으로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빙군(聘君)’은 호나 이름이 아니라, ‘군주의 초빙을 받고도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 말인데, 제대로 고문 공부를 하지 않은 이들이 버젓이 사람 이름으로 해석하는 이젠 너무도 흔한 실수를 출판까지 한다.


유빙군(劉聘君)은, 주자의 장인으로 어려서 주자가 장인에게 글을 배웠기에 장인을 이렇게 불렀다. 이름은 勉之이고, 字는 致中, 號는 草堂이었던 인물이다.(사실 이 사람의 자나 호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고문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고유명사를 그저 해석하거나, 이름이 아닌데 이름으로 새기는 초보적인 실수가 워낙 많아 환기하고자 설명하고 넘어간다.)


여담이긴 하지만, 주자가 자신의 장인을 그렇게 부르면서 조선시대 학자들이 글을 잘못 새겨, 장인을 그리 부르는 것이라고 오해하여 장인을 ‘빙부(聘父)’라고 잘못 부른 것이 지금까지 잘못 전성된 채 자리 잡아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주자가 내민, 그의 장인이 이 장에 대해 붙인 주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有仁의 仁은 마땅히 ‘人’字이 되어야 한다.”하였으니, 지금 그것을 따른다. 從은 우물에 따라 들어가 구제함을 말한다. 宰我는 도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여, 仁을 행하다가 해로움에 빠질까 근심했으므로 이런 의문이 있었던 것이다. 逝는 가서 구제함을 말하고, 陷은 우물에 빠짐을 말한다. 欺는 이치가 있는 것으로 속임을 말하고, 罔은 이치가 없는 것으로 속임을 말한다. 몸이 우물 가에 있어야 우물 안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함께 우물로 따라 들어간다면 다시는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치는 매우 명백하여 사람이 알기 쉬운 것이다. 仁者는 비록 사람을 구제함에 간절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나, 응당 이와 같이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고 누군가 소리를 치면, 仁者가 그 말을 듣고서 우물에 뛰어들어갈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자 공자가 피식 웃고 대답한다. 仁者는 그렇게 사람이 빠졌다는 거짓말만 듣고서 무작정 우물에 뛰어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건져줘야 할 사람이 우물에 빠져버리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빠져 죽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당연히 우물 밖에서 안에 있다는 사람을 구할 방도를 생각할 것이라는 대답이다.


이 장의 방점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仁者가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되나가나 몸부터 던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이야기로 당연히 우물로 무작정 뛰어들 리가 없지 않은가, 라며 너무 1차원적으로 나눈 대화가 아닌가?라고 의심해볼 수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볼 필요가 있다. 위 주석의 맨 처음에 원문에서 사람 ‘人’으로 써야 할 것을 어질 ‘仁’으로 잘못 썼다고 하며 사람이 빠진 것으로 해설하였다. 맞다. 원문에는 어질 ‘仁’이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만약 잘못 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더더욱 도발적인 날 선 대화의 상정이 가능해진다.

스승인 공자가 인(仁)을 하도 강조하고 지향해야 할 바라고 가르치니 재여(宰予)가 스승의 지향점이나 방식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반발을 잔뜩 묻혀서 폭약에 불을 붙여 던진다.


“(그렇게 스승님이 좋다고 하는)仁이 우물 안에 있다 하면, 그것을 찾아 우물 안으로 들어가 우물에 빠져 죽습니까?”


스승 공자의 仁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지향이 우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방식의 극단적인 비유로 도발하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그러자 공자는 재여(宰予)의 질문 의도를 바로 파악하고는 여유 있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仁이 있다고 하니 그 우물가까지 가기야 하겠다만, 그 우물 안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군자에게 仁이 우물에 있다고 군자를 속일 수야 있을지언정, 군자가 그 거짓말을 검증조차 하지 않고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서 무작정 뛰어들지 않을 게다. 그런 허황된 거짓말로 仁者를 착오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

법률을 전공한 이들은 워낙 법전에서 많이 보았을 사기행위의 조건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기망(欺網)’이라는 법률용어가 있다.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남을 속여서 상대방을 착오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이익이나 제삼자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기망할 경우, 사기행위는 형사적으로 완벽하게 성립한다. 그런데 그 ‘기망(欺網)’의 어원이 여기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어 설명된다.


현대어에서 귀신(鬼神)이 한 단어이지만 본래 귀(鬼)와 신(神)이 구별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고문을 공부한 이들에게는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欺(기)와 罔(망)도 위의 주석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분되어 설명한다. 欺(기)란 이치에 맞는 그럴싸한 말로 속이는 행위이고, 망(罔)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그럴싸한 말로 속일 수는 있어도 터무니없는 말로 속여 넘길 수는 없다는 문장으로 못을 받는다.


즉, 두 가지 의미, 仁者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제대로 된 배움을 통해 是非(옳고 그름)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단계를 이른다는 설명과 동시에 지금 네가 한 질문 자체가 얼마나 얼토당토 한 수준 이하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인지 창피하지도 않느냐는 보이지 않는 핵펀치에 다름 아니다. 이래서 깜냥이 안 되는 이는 함부로 고수에게 대들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주석에 따른 해석과, 원문의 仁이 人의 오기가 아닐 경우, 두 가지 모두 해석해보았는데, 내가 가만히 살펴보자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仁者이지만, 그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하는 수준의 사람이 仁者인 것이지, 되나 가나 사람이 빠졌다고 몸을 던지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여름에 물가에서 사람이 빠졌다고 했을 때, 마음만 앞서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빠진 사람을 구하겠다고 뛰어들었다가 함께 변고를 당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조금 비약이라고 느낄 수 있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그래서 평상시에 공부하고 수양하는 것이라는 진리는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수영은 고사하고 물에서 뜨지도 못하는데, 내 아이나 부모님이 물에 빠지면 논리적인 이성은 작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만에 뛰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결국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지 위급한 감정을 행위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갑자기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 쓰러진다면 CPR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 긴급상황에 아무 짓이나 해댈 수 있을까? 모르니, 빨리 119에 신고하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그러면 일반인들은 생각한다. 내가 의사였다면, 의학적 전문 지식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 내가 수영을 배워두고 인명구조 자격증도 있는 사람이라면 급한 상황에서 냉철한 이성으로 바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후회할 것이다.


수영이나 의술 같은 일개 기술도 그러할진대, 제대로 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못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는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그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그러지 말라고 말릴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정보를 취합하여 그중에서 선별되고 정선된 지식과 정보를 학습하고 인지한 후에 끊임없는 수양과 단련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바로 그 仁이라는 것이 이 장의 최종 레벨에서 이해하라고 버젓이 내놓았는데, 제대로 그 숨겨진 행간을 읽고 행하는 이들이 지극히 적거나 없을 뿐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나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죽는 것은 심각한 눈에 보이는 현상이고, 사람으로서의 제대로 된 도리를 하지 않고 양심이 썩어가고 영혼이 문드러져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법대로 아닌, 비전공자이면서 더 높은 곳을 올라가겠다고 변호사를 하다가 주변 지인이 정치판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정치판에 들어선 겁이라고는 없는 여성 정치인이 있었다.


자신이 검찰이나 판사 출신도 아니었음에도 바로 법비들이 몰려드는 정치판에 직행한 그녀였기에, 그 욕망을 키우기 위해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을 하며 바득바득 그 위를 올라가 부와 명예를 누리려고 했다. 그래서 청문회에 생활비가 한 달에 5천이네 뭐네 그런 뒷말을 들으면서도 장관 자리까지 오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그런데 한국의 메인 법비들이 모여 산다는 로펌에 있던 변호사 남편이 그녀의 변호를 하겠다며, 구속된 아이 엄마 때문에 집안에 풍비박산이 났네 어쩌네 하면서 선처를 요구하며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묻고 싶었다. 왜 그리 잘 나갈 땐, 일하는 아줌마한테, 과외선생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그렇게까지 부정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집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지금 와서 왜 그런 생쇼를 하고 퍼포먼스를 하느냐고.


진정 선처를 요구할 것이었다면, 가장인 당신이, 처의 승승장구를 함께 누리며 대한민국 대표 로펌에서 더러운 돈을 세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작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며 살자고 멈추게 하고 당신도 멈췄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법비들이 하듯이 법대로 악어의 눈물을 뿌리며 감옥에서 기를 쓰고 빠져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사람이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다.

강남의 가장 높고 가장 큰 주상복합에 사는 것도 좋고, 강남의 빌딩을 사서 그 임대료로 외제차를 타고, 권력에 선이 직접 닿는 변호사라며 법비들과 손잡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에게 비싼 거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그리 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당신의 부모님이 쓰레기 유튜브를 통해 얻은, 미용실에서 얻어들은, 매일 산책하는 길에 만나는 이들을 통해 들은 카더라로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무작정 정부를 욕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한다면, '괜스레 정치 이야기를 꺼내 부모 자식 간에 의만 상하지.'라고 피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차근히 알려드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팩트체크부터 판단에 이르기까지 사분히사분히 일러드리도록 하는 것도 효의 한 방법이란 말이다.


당신이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저 어리니까 지가 직접 험한 꼴을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하면서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이 잘못된 정보나 잘못된 부추김으로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을 그냥 보고 계셨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지금 당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정치나 종교는 부모 자식 간에도 민감한 부분이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는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방기하냔 말이다.


그러지 말자. 최소한 자식으로서,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하고 살자.

그렇게 하지 않고 백주대낮에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기에 부끄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