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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3. 2021

두 번의 이혼과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과학계를 빛낸 STAR가 되다.

1934년,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 이민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으며 둘 다 유대계였다. 어려서부터 명석했던 이 소년은 과학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 번은 근처의 공립도서관에 가서 ‘별’(star)에 대한 책을 달라고 했더니, 꼬마 독자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 본 사서가 연예계 ‘스타’(star)에 관한 책을 꺼내 준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화성을 무대로 한 E.R.버로스의 SF 시리즈를 읽으며 외계 생명체에 대한 상상에 빠졌던 소년은, 아서 C. 클라크의 예언적인 저서 <성간 비행>을 읽고 로켓을 이용한 우주여행의 가능성에 눈떴다.

1951년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간 그는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에는 금성 탐사선 매리너 호 계획에 관여하게 되면서 NASA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63년에 세이건은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 강사로 초빙되지만, 이듬해에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게 된다.

첫번째 결혼

1957년에 세이건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던 린 알렉산더는 남편의 그늘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기로 작정했다. 이혼 후 결정학자인 토머스 마굴리스와 결혼한 그녀는 린 마굴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생물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아들 도리언 세이건과 함께 여러 권의 과학 교양서를 펴냈다.

미국의 천문학자 겸 과학저술가로,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천문학자로 손꼽히는 천체 물리학과 천문학의 대가인 칼 에드워드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이야기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도 인정받는데, 책을 출간한 것 30권이 넘으며, 《코스모스》는 가장 대중적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코넬 대학교 천문학 및 우주과학과의 데이비드 던컨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며, NASA에서 마리너, 파이오니어, 보이저, 바이킹, 갈릴레오, 패스파인더 화성 탐사선 등등 온갖 우주 탐사선 계획에 참여했다. 20대 때인 1950년대부터 NASA의 기술고문으로 재직한 NASA에서 근무했던 과학자로서는 지존급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한국에서는 유시민 작가가 《코스모스》를 강력 추천한 것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유명해졌는데, 사실 후술 하겠지만, 《코스모스》는 라떼의 아재들에게는 1980년 TV시리즈로 방영되어 유명세를 탄 책이다. 유시민 작가는 호들갑을 떨며 “딱 한 권 들고 가서 무인도에서 내가 죽은 날까지 살아야 한다면 이 책(코스모스)을 가져가고 싶다.”로 이 책을 찬양한 바 있다.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교 과학철학 석좌교수로 있는 장하석은, 중학교 때 이 책을 번역서로 12번 영어 원서로는 11번 완독 하면서 지금의 전공 쪽으로 빠졌다고 고백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책인 것에는 이견이 없다.


원서 보급판이 324페이지이고, 한국어 번역본 특별판이 800페이지가 조금 안되니 그리 무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안 읽은 사람이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요즘도 서평께나 쓴다고 하는 이들이 정독을 한 달만에 끝냈다고 자랑(?)하는 글이 보이는 것을 보면 독자에 따라 만만한 책도 아닌 것이 사실이다.

1968년에 세이건은 화가인 린다 살츠만과 재혼했고, 코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정교수가 된다. 1969년의 아폴로 11호 발사에도 물론 관여했지만 7월 21일,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에 그는 정작 위 수술을 받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소행성대 및 목성을 탐사하고 인류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1972년)와 11호(1973년) 계획에 관여한 그는 이른바 외계에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를 담은 알루미늄 판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판에는 인간 남녀의 모습과 태양계에서 지구의 위치 등을 가리키는 그림(두 번째 아내 린다 세이건이 그린)이 들어 있었다. 세이건은 사상 최초로 화성의 지표면 모습을 전송한 NASA의 화성 탐사선 바이킹 계획(1976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당대 NASA의 모든 우주계획 프로젝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주 탐사선 파이어니어 호에 실린 금속판. 인간 남녀의 모습과 지구의 위치 등의 정보를 그림으로 담았다

 

1976년, 칼 세이건은 공영방송 PBS와 13부작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합의한다. 1980년 9월 28일 첫 방영된 <코스모스>는 전 세계 60개국에서 6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봄으로써, 세계 방송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은 과학 다큐멘터리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방송 타이틀

사실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당시 미국의 TV시리즈 방송작가들이 일제히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하는 바람에, 모든 인기 드라마들이 결방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잘 만들어진 이 시리즈를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당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방송에 직접 해설자로 등장한 칼 세이건은 보이저 호의 목성 사진 같은 최신 자료와 다양한 세트를 이용하여 우주와 인간, 과학의 역사, 지구의 미래 등에 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칼 세이건의 이름과 얼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렇게 방송의 힘을 곧이어 나온 단행본 《코스모스》도 불과 두어 달 만에 40만 부가 판매되고 70주 이상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며,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세이건은 과학 저술가로도 호평을 받으며 저술활동에 정력을 쏟기 시작한다. 그의 저서이자, 전공분야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인간의 뇌를 다룬 《에덴의 용》(1978)은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당신이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로만 보았을, 그의 유일한 소설 《콘택트》(1985)는 여러 출판사 간의 경쟁 끝에 당시로선 사상 최대인 200만 달러의 선인세를 받아 더욱 유명해졌다.

두번째 결혼, 화가 린다 잘츠만과 함께

1981년, 세이건은 두 번째 부인 린다와 이혼하고 <코스모스> 제작 과정에서 친해진 작가 앤 드루얀과 결혼한다. 핼리혜성이 돌아온 해에 맞춰 간행된 《혜성》(1985)은 세이건과 드루얀의 첫 번째 공저였고,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92)는 두 번째였다. 드루얀의 영향으로 세이건은 이후 환경 및 정치 문제에도 관여해 진보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사회참여적인 발언과 활동도 보여주게 된다.

 

특히 냉전 말기인 1980년대, 세이건은 미국과 소련 양측에 ‘핵겨울’의 위험을 경고하고, 특히 레이건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추진하던 ‘스타워즈 계획’의 맹점을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낙태와 종교 같은 보다 논쟁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과학자이며 합리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데에 앞장섰다.

1994년, 세이건은 백혈병의 한 종류인 ‘골수이형성 증후군(Myelodysplastic syndrome (myelodysplasia))’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기독교에서는 물론이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성직자들도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며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불가지론자였던 세이건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 화성 탐사선 계획인 마스 패스파인더 프로젝트에 관여하던 중, 2년간 투병해온 골수이형성 증후군의 합병증인 폐렴으로 1996년 12월, 칼 세이건은 6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듬해 나온 유작 《에필로그》에서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나의 일부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강렬한 만큼 나는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 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예쁘게 포장된 사후 세계의 이야기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서 죽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칼 세이건은 알려진 것처럼 대중적 과학저술과 방송으로 얻은 명성 못지않게 전공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과학자다. 40년 넘는 활동 기간 동안 단독 및 공동으로 500여 편의 논문과 저술 등을 발표했는데, 대략 한 달에 한 편 꼴인 압도적인 양이다. 특히 금성의 온실효과, 화성의 계절 변화 등에 관한 연구 등은 세이건의 가장 훌륭한 업적들로 손꼽힌다. 그는 개인 연구보다 NASA 등에서 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능력을 발휘했다. 관측보다는 이론을 좋아하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놓고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작업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생산성이 높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칼 세이건은 냉전 말기에 이른바 ‘핵겨울’의 위험을 경고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다수의 핵무기가 폭발하게 될 경우에 발생하는 연기와 먼지로 인해 햇빛이 차단되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생물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아가 그는 냉전 당시에 미국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추진하던 ‘스타워즈 계획’의 허구성도 폭로했다.


만약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가령 1만 기에 달하는 소련 핵무기의 90%를 막아낸다 하더라도, 나머지 1천 기는 미국 전체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양이라는 지적이었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은 양국의 핵무기 감축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그가 그러한 비판을 꺼낸 주요 명분이었다.

 

학자로서의 근면한 연구와 끊임없는 연구성과 발표, 과학자로서의 현실참여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기여하고자 한 것들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업적이라고 평가되는 가장 큰 역할은 뭐니 뭐니 해도 ‘과학의 대중화’였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 앤 드루얀

TV 시리즈 <코스모스>와 여러 권의 과학 교양서, 그리고 대중 강연을 통해 그는 일반 대중이 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 주었다. 나아가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UFO, 심령술, 사이비 과학 같은 ‘현대의 미신’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헷갈릴 수 있는데, 칼 세이건은 외계 지성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SETI(외계 지성체 탐색)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이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에리히 폰 데니켄의 ‘외계인 고대 문명 건설론’이라든지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의 ‘격변론’을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하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현대의 미신’에 대해 그가 어떤 식의 설명으로 그 허상을 지적하고 있는지 그의 방식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UFO의 경우, 1960년대에 미국 공군의 의뢰로 세이건 본인이 UFO 관련 기록들을 전부 직접 검토, 분석한 결과 상당수가 목격자의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밝혀냈으며, 그 모든 착각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라는 설명을 한 바 있다. 또, 버뮤다 삼각지대(이곳에 관한 전설은 1960년대에 미국의 <펄프>지에 실린 기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의 경우, 그곳의 평균 비행기 및 선박 통행량을 고려해 볼 때 그곳의 사고율은 다른 지역에서 생기는 실종이나 사고들의 수준보다 결코 높지 않은 평균 수준이라는 통계학적 근거를 내민다.


만약 지상에서 그와 유사한 사고율을 보이는 지역이 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바다에서는 사고 기체나 선체가 가라앉아버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연한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발동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인해, 칼 세이건은 아마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을 제외하면 20세기의 그 누구보다 더 유명한 과학자일지도 모른다.


특히, 방송을 통해 부각된 그의 깔끔한 외모와 말투 그리고 특유의 쇼맨십은 그의 명성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워낙 야심이 크고, 과시욕이 있으며, 남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칭찬 못지않게 비판도 많았다. 그래도 <코스모스>의 방영 이후 그는 전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고, 특유의 터틀넥 스웨터와 코르덴 재킷 차림이며, 그가 별들을 묘사하며 쓴 “수십억의 수십억 개”(billions and billions)라는 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사실 세이건은 “수십억의 수십억 개”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가 당시 출연했던 <투나잇 쇼>의 자니 카슨이 훗날 그를 흉내 낸 것이 마치 그가 한 말처럼 오인되어 오히려 유명해진 것이다.)

세이건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과학계의 질시 역시 커져만 갔다. 1992년에 칼 세이건은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될 기회를 잡았지만, 기존 회원들의 이례적인 결사반대 분위로 결국 탈락의 고배를 맛보게 된다. (이혼 후 세이건과 줄곧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린 마굴리스조차도 회원들의 옹졸함에 격분하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이후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의 한 세미나에서, 과학자 겸 저술가로 유명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일부 과학자들이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칭찬 대신 비난을 받는 현실을 꼬집었다.


당시 그 세미나에서 동석하여 발언권을 얻은 세이건은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당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큰 손해를 입진 않았다며 쎈 척을 해 보이며 애써 웃으며 털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말한 것 자체가 유독 자부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던 세이건의 당시 과학계의 냉대에 대한 뒤끝 작렬의 표시였다는 것을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알았다.

 

칼 세이건처럼, 또는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현대의 미신’과 싸우기에 앞장서는 과학자들은 종종 만사를 ‘과학만능주의’로 재단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곤 한다. 세이건이나 도킨스도 마음의 위안 같은 종교의 순기능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과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만큼, 종교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 이들의 합리적인(?) 주장이다.

다시 말해, 종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미묘한 차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세이건은 결코 종교의 신비를 옹호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라는 또 다른 신비를 제시하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의 왜소함을 보여줌으로써 종교가 아닌 대우주의 논리로 보다 겸손할 것을 권하는 것뿐이다.

 

1950년에 미국에서는 이른바 ‘격변론’을 주장한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의 저서 《충돌하는 세계》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달이 일찍이 목성의 일부분이었으며, 성서에 나온 기적들이 천문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등, 과학적으로 수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어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미국 과학계의 일부 인사들이 그런 사이비 과학 책을 펴내는 맥밀런 출판사와는 거래할 수 없다며, 앞으로 해당 출판사의 교과서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압력을 행사했다. 당시 교과서 판매 비중이 높았던 맥밀런 측은 고심 끝에 벨리코프스키의 책을 절판시키고 다른 출판사로 판권을 넘겨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칼 세이건은 한때 벨리코프스키와의 토론회에 참석해서 그 주장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했던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그 책의 절판 소식에 누구보다도 반가워할 법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 소식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이비 과학을 깨트리는 데에도 최대한 토론과 논리를 이용하여 객관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그로선 그 사건이 결국 과학계가 마피아와 같은 압력을 행사하여 억누른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후 《코스모스》에서 세이건은 벨리코프스키 이론이 갖는 맹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한 말미에, 그 책을 둘러싼 스캔들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는 단언으로 과학계의 횡포 아닌 횡포에 일침을 가했다.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말이었음에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과학자로서의 논리 혁파 방식에 대한 공정성을 그 한 마디에 모두 농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다. 그의 언급을 직접 당신이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벨리코프스키 사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이런 자세의 과학이라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누가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

 

과학자라고, 혹은 교수라고 1년에 1편조차 제대로 된 논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 밥값을 축내며 참람되이 자신을 학자라고 칭하는 인간들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득시글거린다. 그가 그저 자신의 입담을 가지고 방송이나 저술만으로 유명세를 얻어낸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봐 다시 확인시켜 준다.

 

앞서 설명했지만, 그는 평생 한 달에 한 편꼴의 논문을 발표했던 학자였다. 특히 행성 과학과 우주생물학의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한 것과, 이를 바탕으로 NASA의 화성 탐사 계획인 바이킹 계획의 총책임을 맡았던 인물이다. NASA에서는 연구실적이 허술한 학자를 고액의 연봉을 주면서 기술고문으로 초빙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가 주도했던 바이킹 계획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화성의 실태의 상당 부분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그가 학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특히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현대 우주생물학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이것만으로도 인류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고 할만한 인물이다.


내가 오늘 그를 이 시리즈에서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이혼을 두 번이나 하고 결혼을 세 번이나 하면서 각 부인마다 아이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세 명의 남자와 결혼해서 모두와 이혼하고 각기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는 여류 소설가와 한 라인에 언급하여 상상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청교도적인 분위기 때문에 불륜이나 이혼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사회이다. 그가 하버드에 강사로 초빙받았음에도 첫 이혼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실질적으로 대미지를 주었다. 첫 번째 아내였던 생물학자 린 마걸리스는 세이건 못지않은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본좌급 학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전공자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미토콘드리아의 내공생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세기의 학자들 간의 이혼이 학계에서 입소문과 무성한 뒷이야기를 남기지 않을 리 없다. 특히나 굉장히 안 좋게 이혼한 케이스여서 린은 세이건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안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가였던 두 번째 아내, 린다 잘츠만과의 이혼은 세 번째 아내와의 만남과 겹쳐져서 불륜의 소문이 끊이질 않았었다. 물론 죽기 직전까지 마지막 아내였던 앤 드루얀과 백년해로하며 《코스모스》까지 그녀에게 헌정하는 사랑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방송 직후 스타가 된 1981년 결혼 당시

한 번의 이혼도 단 둘만이 아닌 아이까지 걸려 있으면 보통 힘겹기 그지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첫 번째 이혼으로 하버드로의 진출이 좌절되었고, 두 번째 이혼을 하며 과학계와 주변에서 불륜이 아니냐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흔들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버티고 또 버텼다.

 

요즘 이혼하는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가족의 와해가 가속되어간다는 뉴스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혼은 직접 경험하는 당사자들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있는 경우, 아이들이 받는 충격은 물론이고 그 아이들과 관련하여 부부 당사자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여 사람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생활의 패턴을 유지하고 한 달에 한 편씩 논문을 쓰고 자신의 업무에 전혀 악영향을 받지 않으며, 아이들이 상처 받지 않는 이혼은 없단 말이다.

그가 겪었을 일들은 결코 순탄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말년의 인터뷰 당시

전술했던 바와 같이 그는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실제로 그 시간을 기다리며 2년간 투병했고, 합병증인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개 종교가 없는 사람이거나 불가지론자도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면 흔들리고 신에게 매달리게 된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사람은 신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보이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고 그의 신념을 꺾지 않았고, 의연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맞았다. 62세, 지금으로 보면 정년도 되지 않을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말이다.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당신의 멘털을 뒤흔드는 생활기반이, 사랑했던 사람과의 전쟁이 그리고 그것을 보는 아이의 눈빛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겨우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영향을 받아 사회에 목소리까지 내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키워나가고 있는데, 한참 일을 벌이려고 하던 차에 시한부 인생이라니.

그런데 그는 유작 《에필로그》를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보이저 1호에 담겼던 황금 레코드

그가 그럴 수 있는 많은 요인이 있었지만, 그는 이미 앞서 두 번의 이혼을 극복하며 자신이 겪는 좌절과 시련에 대해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을 잡아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배가 흔들릴 것을 안다고 하여 멀미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수년간 매일 한결같은 패턴으로 공부하고 수양했던 그 바탕이 그의 마지막 의연한 모습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그렇게 만들어주었던 수양과 단련당연히 그의 전공에서 나왔다. 그의 전공은 하늘의 별을 보고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그 대우주를 보고 연구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한갓 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미미한 인간으로서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는 대우주의 가르침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당신이 겪었을 이혼의 아픔이, 그리고 이별의 아픔이, 그리고 당신이 예견하지 못했을 아이들의 공허와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울지 나는 미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


당신이 그것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것과 당신이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비단 당신의 아이나 당신을 보며 측은해하는 늙은 당신의 부모님일 수도 있겠으나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상처 받고 더 많이 지쳐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싶어 졌을 당신을 위해서이다.


당신의 삶이 다 끝나버린 것, 아니다.

당신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이며, 그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 당신 자신에게 존중받아야만 할 당당한 이유가 있는 삶이다.


살아라. 당당하게 당신의 오늘을 살아라.

내일? 내년? 생각할 필요 없다. 

이 하루를 온전하게 살아내기만 하면 된다.


홀로서기라도, 아니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것이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까지의 힘겨움을 이겨온 당신이라면,

당신을 변화시켜줄 새로운 사랑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아껴야 하며

어떻게 흔들리지 않게 삶의 중심을 잡으며

본연의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뿐이다.

당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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