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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2. 2021

천재라면서 과거시험에 4수씩이나 하고서도,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대문장가로 인정받다.

1168년, 당시 황려현(黃驪縣)으로 부르던 오늘의 경기도 여주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이윤수(李允綏)와 김 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해가 의종 2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2년 뒤에 무신란이 터진다. 집안이 그다지 번성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태어나자마자 만난 이런 시국의 비상사태는 그에게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한미(寒微)하기는 하나 그 또한 문인 집안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9세 때부터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文)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일종의 모의고사)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이규보는 문한직(文翰職)에서 벼슬해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거시험을 위한 문장(科擧之文)을 멸시하게 되었고, 국자시(國子試)에 3번이나 연속 낙방하게 된다.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인데,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사랑하였다는 의미에서 ‘10대’에 스스로 지은 호(號)였다. 맞다. 특히, 술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10대 소년시대 때부터였다. 술 자체를 좋아했는지,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는지 모르겠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에 과거 시험 같은 딱딱한 글은 성에 차지 않아 천재 소리를 일찍부터 듣고서도 연속 3회나 과거시험에 떨어지는 시련을 일찍부터 겪는다.

 

그렇게 16세부터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 칠현(江左七賢: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의 모임으로 죽림칠현·죽림고회·해좌칠현이라 불림)과 서로 뜻이 맞아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그 7명 속에 넣지 않는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들의 모임 이름이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은 본래 중국 진(晉)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시주(詩酒)를 벗 삼던 죽림칠현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규보에게 함께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정작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본래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면서도 자기가 먹을 것 챙기려는 욕심이 그런 행동을 보인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계와 이중성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야유이자 우회적인 디스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문인, 시대를 대표하는 명문장가로,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고,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하기도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의 이야기이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자는 춘경(春卿)이요 본래의 이름은 인저(仁低)였다. 15세, 18세, 20세 때 과거를 치렀고 보기 좋게 떨어진다.

 

22세 때 4번째로 과거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전날 꿈에서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奎星)의 화신(化神)이 나타나서 “합격이요!”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결국 1189년(명종 19) 5월,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국자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렇게 규성의 꿈에서 말했던 대로 수석 합격했다고 하여, 이후 ‘규성이 결과를 알려준 은혜를 보답한다.’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규보(奎報)’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진사 시험에 합격하기는 했는데 합격자들 사이의 석차가 꼴찌였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합격을 스스로 취소하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혼날 것 같기도 하고, 전례도 없었기 때문에 취소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합격을 축하하는 연회가 벌였는데 이규보가 그 자리에서 “내가 지금은 꼴찌지만 나중에 혹시 문생들 양성할 사람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주사를 부려 손님들이 비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듬해 5월 지공거(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지명(李知命), 동지공거(同知貢擧) 좌승선(左承宣) 임유(任濡)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정작 관직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24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이때 스스로 지은 호가 바로 후대에 그의 명성을 대표하는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이다. 26세 때인 1193년(명종 23)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몹시 빈궁하여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후대에 그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불리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집필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동명왕편>

이때 그는 제대로 된 관직은 고사하고 빈궁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그런 그가 이러한 저술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모습을 보이며 변모하기 시작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지극한 자긍심과 함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결과였다.

 

한 바탕 풍운의 시기가 지나고 난 후,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하였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이미 방향을 잡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으며,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런 그를 최충헌이 알아보고 등용한 것은 이규보의 32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부자를 죽이고 정치개혁에 나섰다가 갑자기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여 철권을 휘두른 자가 이의민(李義旼). 최충헌이 이의민 일파를 몰살시키고 새로운 군사독재자가 된 것이 이규보가 29세 되던 해인 명종 26년(1196)이었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글에서 그는,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라도 취관 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야 겨우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 액수가 적었고, 행정잡무가 번거로웠다. 상관과 부하는 태만하였으며, 주변 동료들이 중상모략(中傷謀略)

을 하는 등 관직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겨우 시작한 벼슬자리에서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상관이 재물을 탐하는 것에 대해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가 높으신 분들 눈 밖에 나린 결과였다. 처음에는 자조(自嘲)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견제받는 것은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달관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30대를 보내고 나니, 이규보 본인이 문집에서 밝힌 바로는 30대에 이미 귀밑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벼슬을 얻지 못하자, 1202년(신종 5) 동경(東京)과 청도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지역에서 김사미 · 효심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아직 임관되지 못한 사람 중에서 종군 문관을 뽑으려고 했는데 스스로 농민폭동 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 제문(齋醮祭文)과 격문(檄文),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賞)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다 논공행상으로 벼슬이나 포상을 받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규보만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함께 일했던 관리들이 추천하여 1207년(희종 3) 이인로·이공로(李公老)·이윤보(李允甫)·김양경(金良鏡)·김군수(金君綬)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茅亭記)>라는 작품이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直翰林)에 임명되었다. 그나마 얻은 관직이었으나 이것도 임시직이 불과했다.

실무는 모르면서 글만 좋은 백면서생도 아니고 나름대로 간언도 하고 일선에서 고생해가며 공을 세웠는데도 여주 출신 한미한 가문 소생이라는 이유로 바닥을 전전하며 젊은 시절이 다 가버렸다. 이때 이규보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며 다시 절망하면서도 그나마 자신의 문필을 통해 얻은 관직이라 여겨 문필로서 양명과 관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기대도 버리지는 않기로 다시 다짐한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 생활을 만끽하였다.

1217년(고종 4) 2월 우사간(右司諫)이 되었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를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 같은 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 규범으로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규보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 버리자 또다시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대한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된다.

 

1219년(고종 6) 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다음 해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와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를 맺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 기예의 소유자로서 최 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은 최 씨 정권의 흥륭기(興隆期)이기도 하거니와 이규보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1230년(고종 17)에는 또 어떤 사건에 휘말려 위도(猬島)에 유배되었다. 이규보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절망하게 된다. 보신을 잘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한다.


8개월 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해 9월부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國書) 작성을 전담하였다. 국서는 최 씨의 정권 보전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규보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었다.

 

1232년(고종 19) 4월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6월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12월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가 되었고, 1234년 5월 지문하성사로서, 1236년 5월 참지정사로서 지공거(知貢擧; 시험출제관이자 총감독관)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236년 10월 퇴임을 청하였으며, 1237년(고종 24)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서 치사(致仕)하였으며, 1241년(고종 28) 9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이규보의 사당

백운 이규보의 묘소는 숱한 전란의 참화 속에서 잊혀졌다가 1900년대 초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목비 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간 백운곡에서 비석이 발견되고 후손에게 알려져 1967년에 묘역이 정화되고,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백운재가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는 후학들에 의해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과 풍류 정신을 기리는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가 그의 묘소 앞쪽에 세워졌다.

그가 출세하기 위해 보였던 행위들과 처신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규보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한림에 제수되고, (중략) 그의 시는 기발하고 간절한 지취가 전혀 없고, 추솔하고 산만하여 명실에 꼭 맞지 않았다.”

1970~80년대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던 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이 이규보를 평가한 바 있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 플라지 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 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한마디로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평가이다. 비난의 정도가 심한 평론가들은 미당 서정주에 이규보를 비하며 폄하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을 달리한다.

오늘 이규보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까닭이기도 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에게는 50이 다 되도록 현실 속에서 역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불운한 시기를 온몸으로 이겨냈다. 그가 그 시절 내내 견제받고 관직의 중심에서 떨려났던 이유가 그의 올바르고자 했던 행동 때문이었음을 오늘, 부러 자세히 소개한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렇다면 그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고 뜻을 굽힌 것인가에 대한 판단 여부이다. 그에게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그를 위한 것이 아닌, 그가 시대적으로 해야 할 사명에 부응했다는 의미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그의 일생은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일생 전체에 걸쳐 있다. 그는 상당한 문재(文才)를 갖춘 천재였음에도 제대로 발탁되지 못했다.


그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쪽에 특화되어서가 아니었다. 워낙 능력 있는 문인들을 무인들이 모두 쳐 버리고 나니 정작 반드시 필요한 외교상 보내야 할 문서를 쓸 문인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4수 끝에 겨우 벼슬을 하고서도 관직도 못 받고, 그렇게 어렵게 자식의 입신양명을 바라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산에 들어가 스스로 칩거하며 처참한 현실과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지내다가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 정작 먹고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눈물을 삼키며 붓을 들고 그렇게 얻은 현실인식과 자신이 갈고닦은 유불선을 관통하는 기재로 작성한 것이 <동명왕편>이었다.

 

이 때는 1193년, 명종 23년이었다. 이 해는 곧 무인정권이 시작한 지 23년째임을 의미한다. 무인정권의 두 번째 실권자 이의민이 10년째 그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의민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장사꾼이요, 어머니는 절에서 일하던 노비였다. 오직 힘만으로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의 풍운아였다. 살벌한 세월, 왕은 있으나 허울뿐이고, 같은 무인끼리도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죽이는 사이,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고려인이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던 송나라는 북쪽 오랑캐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간 지 오래되었다.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이규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옛 영웅을 떠올린다. 앞선 시기의 김부식이 버렸던 자료 무더기 속에서 그는 운명적으로 동명성왕 주몽을 만난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

 

환상이 아니며 성스러움이고, 귀신이 아니라 신었다는 언표는 고구려가 다른 아닌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과,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야말로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웅변한 일대 사건이었다. 김부식의 시대였다면 있을 수 없는 민족사의 자랑이다.

 

이규보의 문학론은 기의(氣意)와 신의(新意)에 이르러 이규보 만의 문학으로 우뚝한 봉우리를 이룬다. 기의란, 기골(氣骨)과 의격(意格), 신의(新意)란,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말한다.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 바람직한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의는 <동명왕편> 같은 작품으로 현실화했다.

그때까지 용사(用事)로 가득한 기존의 시를 비판한 개념이 바로 신의(新意)이다. 용사(用事)는 과거의 사적이나 시구에서 따와 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지나쳐 인순과 답습에 지나지 않는 문학으로 도배되는 현실이었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그의 잘못일 수 없다. 다른 민족에게 부와 명예를 구걸하며 아양을 떨었던 미당 서정주 같은 자와 같이 언급되어 평가되어선 안 되는 이유이다.


이규보는 무신란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중세 전기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방향을 제시한 인물에 다름 아니었다.

 

문인이라곤 시골의 서당 선생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내몰아 버린 무인정권으로서는 정신 차리고 보니 중국에 보낼 공문 하나 만들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문인, 자신들에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 문인, 과거 문인에 뒤지지 않을 실력이 갖춰진 문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거기서 이규보가 나타났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무인정권이 갈망하던 인재였다.

 

고려와 조선을 아울러 한문 문학을 두루 공부한 이들이라면 이규보를, '유불선을 통합하여 문장에 일가를 이룬 천재'라고 칭하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의 작품을 독해하며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특별히 그의 삶을 관조하며,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나 세계인식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가를 그의 시 한 편으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닫게 되리라.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영정중월(詠井中月)>, ‘샘 속의 달을 노래한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시이다. 초심자가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글자만 활용하고서도 운을 정확하게 맞추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한 작품이다.

 

달빛을 사랑하는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수양을 통해 충분히 실천한 분이거니와, 그조차 욕심이라 말하고, 병 속의 가득 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져 버리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을 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절묘하다 아니할 수 없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이니, 그의 마음가짐과 수양의 정도가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서고 있음을 몇 자의 시만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경지이다.


당신이 제법 재주를 갖추고 있고, 부단히 노력을 했음에불구하고, 인생이 꼬이기만 하는 듯하고 잘 안 풀릴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당신이 공부하고 정진하여 올곧은 삶을 추구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지금같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당신을 공격하고 당신을 끌어내리며 중상모략하려는 이들이 이규보의 시대처럼 득실득실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 당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을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너무 쉽게 당신의 뜻을 굽히지 마라.


힘들 거다. 어려울 거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가족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에 서글퍼 눈물 섞인 밥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때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마라.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것, 결코 아니다.

당신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가는 곳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들의 공격을 받는다고 하여 당신의 본질이 정말로 격하되는 것이 아님을 내가 보장하마.


당신의 그 빛나는 재능과 올곧음을 알아봐 줄 이가 조만간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당신의 억울함과 그간의 막혔던 어둠을 뚫고 진한 빛이 당신의 온 몸을 휘감아 흘러내려올 때가 곧 온다.

감히 당신의 올곧게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을 폄하했던 그것들을 밟고 우뚝 설 때가 반드시 도래할지니, 조금만 더 참고 스스로를 믿어라.


내가 그날 당신의 곁에서 함께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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