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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1. 2021

공매도 거래 끝에 파산하고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어도,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투자자로 칭송받다.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액튼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 단돈 5달러를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빈농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보스턴으로 간 소년은 14살 때부터 주식 중개회사 페인웨버에서 주식 호가판을 관리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호가판을 관리하는 틈틈이 그는 주가 변동 패턴을 찾기 위한 일기를 쓰며 모의 투자도 수차례 하며 실전 감각을 키웠다. 15살 때 첫 거래로 3.12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이 그의 트레이더 인생의 출발이었다.

 

1892년 한 해 동안 그는 사설 거래소를 전전하며 주식과 상품 거래를 통해 1천 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2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는 곧 사설 거래소 업계에서 ‘몰빵 꼬마’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요주의 대상이 되었고 거래소 출입을 금지당하기까지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트레이더로 나선 그는 1897년 20살 무렵까지 무려 당시 돈으로 1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미국의 투자자로, ‘월가 큰 곰’, ‘추세매매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주식투자계의 레전드이자 이른바 추세매매의 창시자 제시 로리스턴 리버모어(Jesse Lauriston Livermore)의 이야기이다. 그는 심지어 파산을 당해도 다시 더 큰 부자가 되기도 했던 진짜 트레이더다. 가격이 오르면 사고, 내리면 공매도를 하는 것을 그 시대에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21살 때 뉴욕 증권거래소를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거의 모든 자산을 잃었다. 리버모어는 기회가 왔을 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에서 자신의 실패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시 500달러를 빌려 세인트루이스의 사설 거래소로 간 리버모어는 이틀 만에 2천5백 달러를 만들어 뉴욕으로 돌아왔다. 빌린 돈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사설 거래소에서 다시 주식거래에 전념하는 전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전설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1년 5월 3일, 노던 퍼시픽 철도(NPR) 주식을 매집해 오던 유니언 퍼시픽 철도 대표 에드워드 해리만이 공개적으로 NPR 주식 4만 주를 매수했다. 해리만의 사실상의 상대는 금융 황제 피어폰트 모건(당신이 어디선가 들어봤던 그 모건 맞다.)이었다. 모건은 15만 주를 매수키로 했다. 4월 말까지 100달러 정도였던 주가는 5월 6일에 주당 150달러까지 올랐고, 5월 9일에는 급기야 주당 1천 달러를 돌파해 거래되는 초유의 급등 사태가 벌어졌다. 5월 9일 아침 리버모어는 ‘광란의 장세’가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측했다.

“1901년 5월 9일 오전 내 증권계좌에는 5만 달러 가까이 있었고, 주식은 하나도 없었다.……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했다. 무시무시한 폭락에 이어 투매가 있을 것이었다.……나는 대량의 공매도 주문을 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주문이 체결된 것은 20포인트가 더 떨어진 뒤였다. 주가 테이프는 시장보다 훨씬 늦었고 엄청난 주문량 때문에 내역서가 늦게 나오고 있었다. 주가 테이프에서 주가가 100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매도 주문한 주식은 80달러에 체결됐다. 그것은 전일 종가에서 3-40포인트 하락한 가격이었다. 매수를 하려던 가격에 매도를 한 격이었다. 시장은 계속 하락할 것 같지 않았으므로 나는 즉시 공매도를 처분하기로 했지만, 그 매수 주문은 또다시 내가 생각한 가격이 아니라 내 주문을 받은 시각에 증권거래소에서 형성된 가격에 체결됐다.”

 

리버모어의 공매도 주문은 주문가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에 체결되었고, 급락 가격에서 공매도 포지션 청산을 위해 낸 매수주문은 주문가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에 체결되었다. 대량 주문이 급작스럽게 몰리며 일어난 체결 지연 사태 탓이었다. 리버모어는 이날 두 번의 거래를 통해 5만 달러를 모두 잃고 파산하게 된다.

 

모든 예상을 하고서도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졸지에 거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나 파산을 하고 전재산을 날리고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년 동안 그는 시스템의 실수까지 감안하며 자신이 어떻게 시장의 흐름을 주도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대비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치고 1년 만에 시장에 복귀한다.


1902년 리버모어는 사설 거래소에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여 다시 뉴욕 증권거래소로 돌아왔다. 1906년 4월에는 유니온퍼시픽 주식을 공매도하여 25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급격한 하락장세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7년 10월 24일 정오, 대폭락이 주식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리버모어는 지속적인 공매도로 약세 포지션을 쌓아놓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1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당시를 ‘내 인생 최고의 날’로 회고했다.


리버모어는 다음 날 아침 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하여 투매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상 시장을 붕괴시키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리버모어는 공매도 포지션을 청산하여 상승을 유도했다. 그는 여러 종목을 대량으로 매수했다가 다른 매수자들에게 넘기며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리버모어는 면화와 밀 상품 거래에서 다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상품 전문가 퍼시 토머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 화근이었다. 정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혹독한 대가였다. 리버모어는 2만 5천 달러의 자금을 융통해 사설 거래소에서 석 달 만에 11만 2천 달러의 수익을 올려 트레이더로서 재기했지만, 부채 총액이 1백만 달러를 넘어선 파산 상태였다.

그와 아내, 화려한 파티 중에

큰 수업료를 치르고 난 이후 리버모어의 트레이딩 성적은 양호했다. 강세장에서 약세장으로 전환하는 타이밍을 포착하여 대규모 공매도 거래로 큰 수익을 올려 나갔다. 1917년에는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고,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보장 연금과 신탁자산을 확보해 두었다. 1924년과 이듬해까지는 밀 상품시장에서 1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1929년 금융공황 당시 월스트리트로 몰려든 인파

1929년 초여름 강세장 속에서 리버모어는 추세 전환을 예감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온 그는 이번에는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규모의 공매도 포지션을 시험적으로 취해보고 수익이 나기 시작한다는 것 확인하자 비로소 자신의 예감이 정확함을 확신하고, 과매수권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한 종목들을 점검해 모든 매수 포지션을 청산하고, 공매도 포지션으로 전환하여 본격적인 매도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연이은 강세장 속에서 공매도하는 리버모어의 이상한 투자방식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1929년 가을 대폭락 장세에서 리버모어는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주식시장에서 단기간에 올린 수익 규모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리버모어가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통해 폭락을 촉진시켰다고 비난했다.

리버모어는 추세 발생 시점을 기다렸다가 자금의 일부를 일단 투입하고, 추세가 강화되면 자금을 추가로 속속 투입하는 이른바 추세매매기법의 창안자로 주식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추세가 좀처럼 강화되지 않거나 역추세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자금의 일부만 투입했다가 추세 역행 움직임이 나타나면 바로 손절매하는 기법을 실천했던 인물이다.


단기간 고수익을 추구하는 공격적이고 위험 수준이 높은 거래를 하면서도 실패했을 때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재기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해두는 그 만의 필승전략인 셈이다. 확실한 추세라고 판단하면 신고가에서도 이른바 추격 매수를 과감하게 했지만, 별다른 추세를 감지하기 힘들 때는 거래를 완전히 쉬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들이 말하거나 떠도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그가 지키고자 한 원칙이었고, 기분과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오로지 시세의 흐름에만 주목하는 것도 그의 원칙이었다. 거래 종목 선정에서는 시장을 주도하는 업종과 그 업종 안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종목을 선택했다.


비교적 한정된 소수의 우량주로 범위를 좁혀 거래했던 것이다. 투자원금 대비 수익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일정 비율의 수익을 인출하여 완전하게 수익을 실현하는 것도 그가 스스로 정해놓고 지키고자 한 원칙이다.


앞서 그의 투자 인생을 찬찬히 분석해보면 그가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그의 분석이 틀려서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정한 원칙을 스스로 어겼을 때였다.

1929년의 ‘대박’ 사건 이후 그의 삶은 트레이더로서나 개인적으로나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아내 도로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1932년 결혼생활 14년 만에 이혼하고서 Harriet Metz와 바로 재혼하지만, 자신의 자녀들과 자주 만나지도 못했으며 리버모어 자신은 낭비와 사치 속에 쇼걸이나 배우들과 어울리며 방탕하기 그지없는 세월을 보냈다.


오랜 정부였던 여배우에게 혼인빙자 간음 혐의로 고소당하기까지 했다. 친구들과의 교류도 중단됐고,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트레이딩에서도 집중력, 원칙, 열정을 상실하고 낙담과 우울 증세에 시달렸다. 급기야 1934년 5월, 그는 연방법원에 스스로 파산신청을 했다.

 

1940년 11월, 리버모어는 사무실을 나서 셰리-네덜란드 호텔로 갔다. 호텔 휴대품 보관소 의자에 앉아 32 구경 콜트 자동권총을 자신의 오른쪽 귀 뒷부분에 겨냥하고 발사했다. 경찰은 리버모어의 주머니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유서를 발견했다.


니나에게.

이젠 어쩔 수가 없구려. 모든 게 최악이라오. 난 지쳤소. 더 이상 버틸 수 없소. 이것만이 나의 탈출구가 될 듯하오. 당신의 사랑은 내 분수에 넘친다오. 난 실패자요. 정말 미안하오만, 이것만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라오.


그의 자살은 투자 실패나 돈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시달린 우울증이 그의 만년에 더욱 악화된 것이 자살의 사실상의 원인이었다.

 

거듭된 파산과 재기, 단기간에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고 또 단기간에 엄청난 손실을 보는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은 트레이더로서의 극적이던 그의 인생은, 리버모어를 전설이자 신화로 만들었다.

그가 쓴 주식 관련 서적은 100여 년인 지난 지금까지도 바이블급으로 주린이들의 교과서로 인기를 끌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주식 트레이딩과 거기에서 올린 수익을 낭비하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시장 추세가 불분명할 때 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지만, ‘쉬는 것도 투자’라는 주식 격언에 따른다면 휴가 여행도 그에게는 일종의 트레이딩 행위의 일환이었다.

 

년 전부터 한국의 주식시장은 이미 가정주부, 대학생들에게까지 일반화된, 이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 행위의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다. 이른바 ‘동학 개미 운동’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주식 전문가들이 너무도 친숙하게 예능에도 얼굴을 알릴 정도로 주식투자는 우리 생활에서 일반화되어 버렸다.


내가 주식을 가르치며 제자들에게 늘 시작하며 언급하는 일화가 바로 리버모어의 이야기이다.


리버모어는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시장의 생리를 몸으로 익혔고, 그렇게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롤러코스터 같은 투자 인생을 걸어왔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그가 실패하고 파산했을 때는 단 한 경우밖에 없었다. 바로 그가 자기가 정한 원칙을 스스로 어겼을 때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I have said many times and cannot say it too often that the experience of years as a stock operator has convinced me that no man can consistently and continuously beat the stock market though he may make money in individual stocks on certain occasions. No matter how experienced a trader is the possibility of his making losing plays is always present because speculation cannot be made 100 per cent safe.

 

내가 여러 번 말했으며 아무리 자주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으로, 주식 투자자로서의 다년간의 경험으로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개별 주식에서 특정한 기회에 돈을 벌 수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일관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식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숙련된 트레이더라도 지는 게임을 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데, 투기란 100퍼센트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확실하게 시장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늘 신중했고, 전폭적인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원칙을 만들어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실험하고 난 뒤, 확신이 들었을 때 타이밍 지켜가며 투자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에도 지금의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저분한 작전 세력에 의한 주식 장난질이라던지 내부 정보를 이용한 거래방식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개인투자자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전설이 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주식을 하거나 자신의 주변 가족들이 주식거래를 하고 있을 것으로 안다. 이제 너무 일반화되었으니 쉬쉬할 일도 아니다, 도박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오늘 몇 번이나 파산을 하고 나서 결국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개인투자자들의 전설을 소개하는 이유를 잘 새겨듣길 바란다.


그는 시장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경험을 터득하고서도 인간으로서의 욕심 때문에 내부정보다 다른 사람의 혹하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하는 대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대 실패를 경험하고 알거지가 되고 나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정한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말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초대박을 치고 성공했을 때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만들고 정한 원칙을 지켰을 때였다.

 

그의 실패가 이 시리즈에서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허망한 죽음에 있다.

그는 투자의 궁극적 성공을 위해서는 자신이 피나는 공부와 노력을 통해 얻어낸 원칙을 지키는 것만이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고 나서 그는 다시 그 간단하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철칙을 또 어겼다.


심지어 그의 원칙에 의하면 시장이 상승장이 아닐 때에는 거래를 아예 접고 여행을 떠나는 과감한 자기 관리를 통해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대성공을 겪고 나서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고, 자신을 조절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당신이 수많은 유사 투자를 빙자한 각종 카톡과 메시지에 혹해서 무료 리딩이니 유료 리딩이니 정보에 기웃거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인데, 주식을 하는 이유가 결국은 돈을 벌기 위함인데 왜 안 그렇겠나 생각하면 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방법을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다른 사람의 정보에 의탁해서 검증도 없이 돈을 투자하는 것은 돈뭉치를 들고 야바위꾼에게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다. 가만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다른 당신의 주변 인물들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한다면 당신조차도 말릴 일이란 말이다. 그런 일을 당신이 지금 기웃거리고 하고 있단 말이다.

내부정보? 세력에 들어가 나도 조금 콩고물을 먹을 수 있다고? 몇 번 무료 리딩을 보니까 그들이 리딩 해주는 세력주마다 다음날 상한가를 기록하는데, 내가 어디 가서 저렇게 돈을 벌어보나? 혹할 수 있다. 장이 끝나고 시간 외 상한가를 통해 리딩이랍시고 사기를 치는 저급한 사기꾼들에게까지 농락당하고 유료 리딩에 돈을 꿇어 박는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것은 다 그러한 이유이다.

 

리버모어가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력과 친한 것도 아니었고, 내부 정보를 주는 콘체른에 속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뛰어 얻은 정보를 통해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고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과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적절히 단련하고 또 단련하여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어냈고 자신만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고 평정심을 지켜 원칙을 고수했을 때만이 그는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맞다. 먼저 당신은 공부를 해야 한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서 시장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고 난 뒤에, 주식이 되었든 코인이 되었든 투자자든 트레이더로서든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운전면허가 없이, 운전 연습도 하지 않고 차키를 가지고 고속도로를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잘 모르면 공부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선생님을 찾고, 그 간단한 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주식으로 돈 벌었다는 소리만 들리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흔들리는가? 그것은 당신이 지금 머릿속에 든 게 없어 가벼워서 그러는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이 가득 채워지고 나면 그렇게 가벼이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미 내가 이런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당신만의 원칙이라는 것이 생겨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평정심을 잃지 말고 수양하며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당신의 원칙을 지키며 투자를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함부로 부화뇌동(附和雷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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