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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4. 2021

부모님과 형제들이 차례로 모두 죽고 조국이 없어져도

나를 쏜 암살범을 안으며 사랑한다 말했던 유일한 교황으로 기억되다.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는 1920년, 폴란드 남부의 마을 바도비체에서 3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비역 육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1929년, 그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인 1932년 의사였던 그의 형이 성홍열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형 등 가족 모두를 잃는 처절한 슬픔을 차례로 경험하게 된다.

 

청년 시절의 그는 운동을 무척 좋아하였으며, 특히 축구 경기 때에는 골키퍼로 뛰었다. 어려서는 애칭 ‘롤렉(Lolek)’이라고 불렸다. 1938년 고등학교 학업을 마치고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운동선수, 배우, 각본가로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재주꾼이었다. 유명한 폴란드 여배우가 주최한 스피치 페스티벌에서 시 낭송으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었으며, 학교 연극반에서는 주연 배우나 공동 제작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만큼 학업에도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고, 신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과 전례에서 문어(文語)와 구어(口語)로 사용한 언어인 라틴어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어,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등 10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이기도 하였다. 러시아어는 유창하게 하진 못했지만,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알고 있었으니 11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해야 하는데 굳이 겸양스럽게 뺀 것을 보면 앞의 10개 국어 운용능력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한 뒤 야기엘로 대학교는 문을 닫았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보이티와는 독일의 강제 이송을 피하려고 솔베이 화학공장의 노무자와 석회암 채석장의 수공 노동자,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194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보이티와는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 가며 유대인들을 피신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 지하 연극 단체를 만들어 비밀리에 연극 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끊임없이 문학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때로는 직접 희곡을 쓰기도 하였다.

 

1944년 8월 6일 ‘검은 일요일’에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후, 게슈타포에서 그와 유사한 나치에 저항하는 투쟁을 미연에 막아버리겠다고 크라쿠프의 청년들을 대거 강제 검거하기 시작했다. 보이티와는 가택 수색을 당하자 대주교의 저택으로 도망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은신하였다. 1945년 1월 17일 밤에 독일군이 도시에서 물러가자 보이티와를 비롯한 학생들이 파괴된 학교를 재건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8년 사제 시절의 카롤 보이티와

제2차 세계 대전을 몸소 겪으면서, 사람이 이념과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고 1942년 크라쿠프 교구장인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대주교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카롤 보이티와는 사피에하 추기경에 의해 1946년 11월 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신학을 공부하고자 로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에 들어간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서 드러난 신앙》(Doctrina de fide apud S. Ioannem a Cruc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 전문직 학위를 받는다. 같은 해 12월에 크라쿠프의 야기엘로 대학교에서 신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기억하는 이름, 기독교 역사상 교황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5년 만의 비(非)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 동시에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최연소로 즉위한 제264대 교황이었던 로마 가톨릭의 성인,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Ioannes Paul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I)의 이야기이다.

 

앞서 그대로 사용했던 것처럼,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폴란드어: Karol Józef Wojtyła)이다. 27년 가까이 교황으로 재임한 그는 34년 동안 재임한 베드로와 31년 동안 재임한 교황 비오 9세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오래 재임한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선진국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교세가 점차 기울어간 반면 제3세계에서는 확장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치세 전반에 걸쳐 여행을 가장 많이 한 교황으로 전임자들보다 100개 이상의 나라를 더 방문하였다. 그는 역사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유럽의 반공주의 운동을 지원하였고, 세계 평화와 반전을 호소하였으며, 생명윤리 등의 분야에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도덕관을 제시하는 등 종교의 범위를 넘어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종교 간의 문제에는 시종일관 온건한 태도로 일관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11년 5월 1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 되었으며, 2014년 4월 27일에는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공동 시성(諡聖;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지정해주는 것)되었다.

1948년 여름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크라쿠프로부터 15Km 떨어진 외딴 시골마을의 가톨릭 사제로 파견되었다가 1949년 3월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누스 교구로 전임하였다. 그는 야기엘로 대학에 이어서 루블린 가톨릭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보이티와 사제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다루는 크라쿠프의 가톨릭 계열 신문인 《Tygodnik Powszechny》에 일련의 논설을 게재하였으며 그의 저술 덕분에 성직자로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67년 6월 초, 크라쿠프 대교구장 시절의 카롤 보이티와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를 보좌하는 옴비의 명의(名義) 주교로 임명된 그는 1958년 9월 29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38살이었던 그는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였다. 이때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는 뜻의 ‘Totus Tuus’를 사목 표어로 삼았다.

 


1962년 10월 보이티와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해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에 대한 결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리는 등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12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7년 6월 26일 바오로 6세는 보이티와 대주교를 산 케사레오 인 파라티오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

1978년 8월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보이티와는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하였다. 다음 교황으로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출되었으나 즉위한 지 34일을 넘기지 못하고 선종하자 다시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다. 10월 22일 일요일, 여덟 번째 투표에서 마침내 보이티와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58세로 130년 만에 처음으로 60세 이전에 선출된 교황이었다.


또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출신 교황이기도 하였다. 선출된 날에 그는 눈물의 방으로 안내되어 교황의 옷인 하얀색 비단 수단을 입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작품 《쿠오 바디스》에 관한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쿠오 바디스》는 박해당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로마 제국을 누르고 승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보이티와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전임자가 택한 이중의 이름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생전에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바오로 6세의 의지를 이어받고 싶어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1세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대관 미사보다 훨씬 간소한 즉위 미사를 통해 정식으로 등극하였다.

 

그를 상징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반공이었다. 사실 추기경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와 폴란드 공산정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교황으로 선출될 때에도 폴란드 신자들이 인질로 잡혀 교황이 휘둘리지나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우려가 있었고, 특히 영국은 무례에 가까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신문에서는 ‘콘클라베가 아니라 초등학교 반장 선거 같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


과거 소련의 스탈린이 프랑스와의 국교 수립을 위해 협상하던 중, 프랑스 측의 피에르 라발에게 “도대체 교황이 거느린 사단이 몇 개나 되느냐?”라며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교황이 뭐가 두려울 것이 있냐고 대놓고 무시했던 것을 떠올리면,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과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소련의 2인자이자 4년 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체제에 대한 위협을 직감하고는, 즉각 폴란드에 있는 KGB 책임자에게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방임했냐며 따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그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교황으로 인해 소련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 뒤 KGB에 “폴란드 출신 인물이 교황에 선출된 이유를 분석하라.”라고 지시를 내린다. 당시 KGB는 다음과 같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고 한다.


“폴란드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후에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주도하고, 미국과 서독이 합작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 음모는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해체를 의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KGB의 분석은 현실이 되었다.


브레진스키는 1977년 1월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악관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6년 폴란드의 보이티와 추기경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연설한 적이 있는데, 당시 브레진스키는 보이티와 추기경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보이티와 추기경을 티 파티에 초대했다. (브레진스키도 폴란드 출신이다.) 두 사람은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친분 관계는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물론, 그의 영향력으로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콘클라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 카터 행정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히려 공산국가였던 폴란드 출신의 교황은 자신의 최측근이던, ‘성직자 옷을 입은 키신저’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바티칸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사이에 구축된 이른바 ‘바티칸 핫라인’을 통해 독실한 침례회 신자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중요한 정책토론이나 의견 교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의 폭넓은 영향력을 키우는 데 있어 도움을 주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교황이 1979년 6월, 폭군 볼레스와프 2세의 학정을 꾸짖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 순교 900주년을 기념해 조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것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서곡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방문을 ‘순례’라고 표현하며 공산독재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당신들은 인간이다. 존엄성을 갖고 있다. 땅에 배를 깔고 기어 다니지 말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낭독했다.

 

교황의 폴란드 방문을 우려하던 당시의 공산정권은, 하필이면 왕에게 저항하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기념일에 맞춰 교황이 방문하는 것부터 의도적인 행보라고 판단하였지만, 차마 교황의 방문을 거절할 수는 없어 교황이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 35주년, 나치 독일 침공 40주년을 기념해서 방문하는 것으로 방문 목적을 조작하면서 전국의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음해성 경고 메시지까지 보냈다.

 

“교황은 우리의 적이다. 그는 모두에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입맞춤하고 사람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는 등, 군중에 친숙한 행동을 한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을 보고 하는 짓이다. 우리는 청소년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를 방문한 9일 동안 바르샤바, 크라코프 등 대도시를 돌며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가는 곳마다 “신념을 잃지 말라, 패배하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다. 폴란드는 물론 소련 공산당조차도 교황의 영향력에 불안에 떨며,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 모두가 극도의 우려를 표명했다.

 

폴란드의 국민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인의 신앙심을 감동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애국심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을 움트게 하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의 성직자들은 노동자나 지식인의 공산정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갔다. 결국 다음 해인 1980년 8월 폴란드는 동구권에서는 최초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인 ‘자유노조(Solidarity)’를 쟁취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는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미 폴란드 가톨릭은 1956년 오하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무우카를 선출시킬 정도로 사회주의권 종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1970년에도 고무우카 정권을 무너뜨려서 기에레크 정권에 이르면 공산당이 가톨릭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다.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입증되었고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까지 덩달아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독교 신자 수가 격감한 반면, 폴란드에선 신자들이 오히려 더 증가하는 기염을 토하며, 1980년대 후반에는 미사의 정기적 참례율이 70%를 찍고, 정권의 설문조사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5%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교세를 자랑하게 된다.

 

그러던 1981년 5월 13일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의 흉탄에 맞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이때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던 중이었다. 서둘러 그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게멜리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총알이 교황의 심장을 1mm 차이로 비켜간 덕분에 6시간의 대수술 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관중에게 붙잡혀 있던 아자는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중태에 빠졌던 교황은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그 후 1983년 12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암살미수범이 있는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가 20분 동안 둘이서 비밀 대화를 가졌다. 교도소에서 나온 교황은 “그와 나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로 남을 것이다.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하자.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하였다.”고 말하며 그에 대한 사면을 요청하였다. 결국 아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감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당시 교황은 파티마의 성모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믿고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총알을 파티마의 성모상에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탈리아 의회 조사위원회에서는 교황 저격 사건의 배후에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가 계획하고 인솔하였으며 불가리아나 동독 등이 협력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의혹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소련 측은 자신들의 연루 의혹을 부인했다. 저격범 아자는 배후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저서 《기억과 정체성》에서 “아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격을 계획했다.”고 적었다.

암살점 아자와의 만남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차례에 걸친 필리핀 방문 동안 알 카에다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테러범들은 1995년 교황이 필리핀 방문 도중 연설하기로 되어 있던 공원에 폭탄을 장치해 교황이 공원에 도착하면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었으나 이 폭탄이 마닐라의 한 아파트에서 미리 터지는 바람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999년의 두 번째 교황 암살 계획은 교황의 필리핀 방문 계획 전격 취소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교황 전용차에 탑승한 말년의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이미 뛰어난 운동실력으로, ‘하느님의 육상선수’, ‘행동하는 교황’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건강에 자부하였지만,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합병증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을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을 앓으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하여 보행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되었으며 결장, 담석 제거 수술, 악성결장 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치료를 받는 등 나이를 먹음에 따라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갔다. 말년에는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의 약화가 겹쳤다. 그리고 독감이 인후염으로 나빠졌고 호흡 곤란 증세도 찾아와 호흡을 돕기 위한 기관절개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목에 삽입된 인공호흡기 튜브를 통해 호흡하였으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여야 하였다. 더불어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해 체중이 19kg이나 급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2005년 3월 31일부터 요로감염을 비롯하여 온갖 만성질환으로 말미암은 심한 고열에 시달리다가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위중한 병세에도 그는 입원을 거부하고 대신 노자성체와 병자성사를 받고 사도 궁전에 계속 머물기로 하였다. 교황 선종 임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만 명의 인파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교황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축원하였다.

일반에 공개된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신

그러나 교황은 2005년 4월 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1시 59분 사도 궁전에서 선종(善終)하였다. 향년 84세였다. 공식 사인은 패혈성 쇼크와 치유 불가능한 심부전증세이다. 선종 직전 그는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며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창문 쪽을 응시하며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팔을 들어 올려 “아멘.”이라고 강복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졌다.


교황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들은 군중은 교황의 공적을 기리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는 고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이탈리아식 추모 방식이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에서는 전국 각지의 성당에서 종이 울리고 관청의 확성기를 통해 사이렌이 울렸다. 폴란드 정부는 즉각 조기를 내걸고 4월 6일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역에 안치된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그래서 특별히 전 세계의 힘없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며 살았던, 당신의 세대에 진정한 교황이라고 기억하는 이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것을 시작으로 두 명의 형제와 아버지까지 모든 가족을 잃고, 공산권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해 보고 그는 조국마저 잃어야만 했다.


그가 더 이상 잃을 것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 모든 것을 얻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황으로 평생을 바쳤다. 그가 유명한 것만 알지, 오늘 당신에게 알려준 것처럼 그가 결국 동부권 공산주의와 소련의 붕괴까지 이끌어냈다는 것은 당시 세계사를 공부하지 않은 이들은 잘 모른다.


새삼 공부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당신에게 갑자기 세계사 공부를 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기념할만한 크리스마스에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고위한 존재였던 교황, 단순히 종교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그릇됨을 바꾸려고 했고, 기어코 바꿔냈던 그의 삶을 통해, 당신의 이제까지 그 작고 사리사욕만을 찾겠다고 바둥거렸던 모습을 스크루지처럼 오늘 밤의 기적을 일으켜보란 말이다.

 

당신에게 갑자기 당신의 가족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고통이 들이닥친다면, 돈을 모으는 것은커녕 자유와 생명을 위협받으며 조국이 이념의 제물이 되어버려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게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이란 말인가?


당신을 죽이겠다고 당신의 심장에 총을 겨눈 자의 평온을 위해 용서하며 그를 안아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결국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당신의 욕망을 모두 채워주기 위함이 아니지 않았던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누군가의 미소를 보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모든 것이 수포로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란 말인가?

 

지금 당신의 곁에 있는 가족, 당신이 어떤 일을 벌이더라도 어떤 소리를 밖에서 듣더라도 묻고 따지지 않고 당신을 안아주고 당신을 믿는다고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당당히 외쳐줄 수 있는 사람, 당신의 가족밖에 없다.

 

어느 사이엔가 당신의 사랑, 당신의 부모님, 당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서 그 사랑들에게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조금 더 올라가자고 조금 더 움켜쥐자고 이건 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서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는가?

 

당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고 힘들었는지 그 목적을 잃지 마라.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길을 잃을 수는 있어도 그 길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배가 바다에서 길을 잃는 것은 등대가 없어져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등대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당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시간 함께 하길 기원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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