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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7. 2021

무려 27년 6개월을 감옥에 있다가 일흔이 넘어 나와,

조국을 변화시키고 남아공의 국부로 추앙받다.

1918년, 남아프리카 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라는 뜻의 ‘롤리흘라흘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


‘넬슨(Nelson)’이라는 이름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국식 이름이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6세 때 치른 이 성인식은 할례, 즉, 포경수술인데, 당시 부족의 전통 풍습이었기 때문에 마취 없이 성인식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부족의 족장이 대부(代父) 역할을 해주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이런 아프리카 민담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늙고 병든 여인이 여행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행자는 눈곱이 덕지덕지 낀 늙은 여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그 여인은 다른 여행자에게 자신의 눈곱을 닦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여행자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늙은 여인의 눈곱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여인은 젊고 아름답게 변신했고, 여행자는 그녀와 결혼해서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어머니의 이 이야기는 어린 아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게 된 내용들이 왜 백인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나 강도로만 묘사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덕분에 학업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었던 욘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 민권 운동가.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국가적으로 존경받는, 남아공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넬슨 홀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의 이야기이다.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어른)’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라는 의미의 ‘타타(Tata)’로도 불렸고,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의 ‘쿨루(Khulu)’라고도 불렸다.

법대에 입학한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학식에 불만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는 그의 사상이나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조언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족장이 강제 결혼을 시키겠다고 나서게 된다. 그러자 강제 결혼을 피하기 위해 친구 올리버 탐보와 함께 도망가 위장 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잡혀서 돌아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대학으로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고향에 갔던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다시 합류, 재회하여 세 명의 의기투합하여 그 유명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이라는 단체에 들어가게 된다.

만델라가 1912년에 조직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42년 말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의 꿈을 품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로 지내던 가우어가 그에게 “아프리카 민족회의만이 아프리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말을 듣게 되면서였다. 이 말에 집회에 참가했던 만델라는 이후 백인 사회 속의 별종 흑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점차 백인 정부에 대항하는 투사로 성장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정부는 일개 변호사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에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일행들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백인들의 무장 압력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지만,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한 백인 우월주의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터라, 원래부터 강조되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인종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다시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 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 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지었다. 약자로,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MK는 네 가지의 폭력 행위를 고려했다. 사보타주, 게릴라전, 테러, 공개적 혁명 등이었다. 군대를 운용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만델라는 아프리카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영국 런던을 다녀오고, 본격적인 군사훈련도 받았지만 집요한 당국의 추적에 결국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동료들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을 예상했던 만델라는 종신형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죽음만 아니라면 종신형 따위가 그의 투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로벤 섬의 감옥에서 18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466/64라는 수번을 부여받았다. 1964년에 로벤 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만델라는 46살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정치범으로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진짜 만델라가 단련되는 순간이 시작된다.

 

총 27년 6개월의 기간 중 로벤 섬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 이러한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ANC 회원들과 연락을 하는 등 할 것은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된 시간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채소밭을 만들었다. 묘목을 구해 나무도 심었다. 어떻게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거두는지를 그는 감옥의 채소밭에서 배운다. 한 번은 실수로 묘목이 죽었을 때 그는 그 묘목을 캐내어 물로 씻어 정원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만델라는 생애에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운동이라고 강조하며 자신을 단련하길 멈추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는 선수 수준의 복서였다. 감옥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일상적인 권투 연습과 유산소, 무산소 운동을 했다. 감방 안에서 제자리 달리기를 45분, 손가락 짚고 팔 굽혀 펴기 200회, 윗몸일으키기 100회, 허리 굽히기 50회 이상. 감옥 생활은 사람을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만든다. 다른 젊은 수감자들은 늙은이 만델라가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저 늙은이도 하는데 내가 못하겠냐며 감화를 받아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통해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시킨다거나 주변을 변화시켜나갔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이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1988년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에릭 클랩튼과 스티비 원더 등 유명 뮤지션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어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 이긴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1990년 2월 11일 여름이 끝나가는 날 오후 4시가 되기 직전에 ‘개인적인’ 자유를 되찾았다. 이것은 남아프리카인들이 ‘자유’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만델라는 그간 감옥에서의 소회를 이런 문장으로 남긴다.

 

“비록 일흔한 살이지만 나는 내 인생이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만 일 동안의 교도소 생활은 이제 끝이 났다.”

출소 이후, 그는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듦으로써 그해 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기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이 내전 사태로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이 자멸하면서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기존 국민의 구성이 흑인이 80% 가까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너무 늦게 얻어낸 투쟁의 결과였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서 일해왔던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히기는 했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단합을 강조했다. 덕분에 남아공의 백인들이 남게 되면서 남아공은 국가적 차원의 경제 타격을 받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도 중요한 사실은 만델라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보타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터르 빌럼 보타는 본래 보어인으로, 백인이다. 1948년 남아프리카 국민당에 입당 후 국회의원, 총리 등 승진을 계속하다가 대통령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재임했던 5년간의 폭정으로 인해 남아공은 더욱 암흑기를 달렸다고 평가된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오히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꺼낸 말이었지만, 만델라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은 확실한 반목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1998년, 만델라가 재임 중이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는 거절한다. 끝까지 보타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라고 말했다.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굉장히 유명하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백인만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심해, 국민 대다수였던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가 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이후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인빅터스> 로 영화화되었다.(만델라 역에 모건 프리먼,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역을 맷 데이먼이 연기했다.)

 

다만 이처럼 흑백 간의 갈등을 아우르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은 성과를 낸 만델라였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의 빈부격차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내지는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그의 집권 시기 남아공 경제는 상당한 성장세를 이루기도 했지만 기업가와 정기적으로 회동하던 만델라가 당시 트렌드였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받아들였는데, 정작 그 성과의 혜택을 누렸던 것은 백인과 일부 부자 흑인들뿐이었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아프리카 전반의 극심한 기울어진 경제구조에서 온 것으로 그의 정치 실책만이라고 탓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는 의회 구성 문제로 당시 지루해져 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 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했던 상황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이후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엄벌에 처하지 못했다던가 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가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여 당시 내전 사태로 흘러 폭동이나 대학살이 나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당시 남아공의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업적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처분했고 백인들에 대한 재산 몰수 같은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그는 백인들한테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렇게 그는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존경받는 정치인임에 분명했다.

 

2009년쯤부터 병세가 나타나 투병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 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생전 마지막 공개된 모습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 게 사유였다.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업적이라는 것은 감옥을 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다. 대체 어떻게 27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견뎌내고 다시 일흔이 넘은 나이로 감옥에서부터 꿈꿔왔던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본래 낙관론자가 아니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총기로 무장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는 변화했다. 그것이 타고난 것인지 교육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항상 머리를 태양을 향해 똑바로 치켜들고 발을 내딛는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것이 그의 낙관론이었다. 그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인간성에 대한 나의 신념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 어두운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신형으로 감옥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준비만 잘한다면 언젠가는 자유인으로 아프리카 대지를 두 발로 걸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사고를 했다. 처음엔 열악했던 감옥 생활에 견딜 수 없었지만, 여러 번에 걸친 감옥 투쟁으로 점점 개선되고, 교도관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로벤 섬은 마치 정치범들의 대학과 같은 느낌으로 변화되어갔다고 그는 회상한다. 


만델라가 감옥 생활을 잘하고 오히려 투쟁의 노하우가 더 좋아지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정부에서 교묘한 술책을 부리기도 했다. 수 차례에 걸쳐 만델라에게 탈옥 제의를 하는 인물을 보낸 것이다. 만델라는 유혹을 느끼긴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것은 그를 탈옥시키는 척해서 사살하려던 암살 계획이었다.


당신이라면 40대까지 투쟁을 해도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비폭력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총기를 잡을 정도로 과격한 성향이었다가 종신형을 받고 무려 27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면 일흔이 넘어 감옥에서 나온다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감옥에서 그는 젊음을 바쳐 노인이 되었다. 노인 만델라는 감옥을 들어갈 때와 달리 이미 큰 그릇으로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다. 인간성을 죽이기 위해 가두어 놓은 감옥에서 그는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들 완성시키는 수양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어떤 일로 몇 년을 그저 버린 것처럼 보냈을 수 있다. 한창 일했어야 할 시기에 제대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빚더미에 앉아 그 빚을 갚는 것만으로 허덕이며 그 귀중한 세월을 모두 날렸다고 허망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은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지, 결코 당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 증거가 당신이 지금 굳건한 의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강한 검을 만들기 위해 대장장이는 수천수만 번의 망치질을 한다. 그렇게 담금질한 검은 때린 만큼 더 강해져 다른 무른 검들을 자르고, 부러뜨려 버린다.


당신이라는 검을 세상이 아무리 후려치고 때리고 쓰러뜨려고 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힘들었던 그 시절의 고통들은 당신에게 무엇이었는가?


그 시기의 눈물 섞인 밥은 당신에게 복수의 칼을 갈아 다시 정점에 올라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짓밟고 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오르게 만들었던가?


아니다. 정작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 들었더라도 당신은 어느 사이엔가 당신을 단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그 힘겨웠던 하루하루가 그 시기에 당신을 때리고 아프게 했던 그 망치질들이 훗날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세상의 담금질에 끊임없이 시험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많은 망치질은 이제 당신을 어지간한 시련에는 꿈쩍도 하지 않은 명검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이다. 그 단단해진 검을 갈고닦는 것은 여전히 당신의 몫이다.

시련만으로 단련되는 인간은 결코 없다.


그 시련을 통해 자신을 부단히 단련한 사람만이 세월을 보내지 않고 시련을 극복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에 세월만 보낼지,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낼지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웃음이 나오지 않겠지만, 웃어라.

즐길 수 없겠지만, 즐기려 노력해라.

어차피 당신에 닥친 시련이라면 당당히 극복하고 이겨내라.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해야만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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