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그 마지막 이야기.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617
앞서 설명했지만, 스파이더맨의 빌런들은 스파이더맨의 안티테제로서의 존재들임과 동시에 스파이더맨에게 파생되어 나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심비오트가 스파이더맨에게 묻어서 잠식된 이후에 에디 브록에게 옮겨가서 베놈이 탄생하고 에디 브록의 피를 통해 카니지가 탄생하며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악화될 수 있다는 흐름을 보여준 것은 이제까지 등장했던 빌런들의 공식을 순서도로 보여주는 변화의 흐름도에 다르지 않다.
스파이더맨은 서민층을 대표하는 우리 이웃의 한 명이자,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질풍노도 시기의 10대이며, 그렇기에 돈이 없어서 늘 용돈이 떨어지는 것을 고민해야 하고 돈이 없어 웹 슈트도 집에서 직접 셀프로 만들어 입고, 당장 월세를 걱정하며 은행강도라도 해야 할 정도로 생계를 걱정하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불안정하고 타락 일로로 흐르게 되면 자신이 가졌던 책임감을 방기하거나, 책임에 대한 교훈을 삐뚤어지게 받아들인다. 그 사례로 ‘게임 엣지 오브 타임’에서 최종 보스인 사악한 피터 파커는 “큰 힘에는 큰 기회가 따르고, 그 큰 기회들을 다 얻어야 할 책임이 있다.”라는 괴상한 패러디로 삐뚤어진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스파이더맨>의 스토리 작가, 댄 슬롯은 피터는 성자가 아니며 사실 이기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을 책임감으로 억누르고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고 ‘굳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삼촌의 죽음이 피터가 깨달음을 얻는 아주 큰 터닝 포인트로 작용하고 삼촌의 잔소리였던 그 유명한 대사는 피터가 스파이더맨으로 자각하는 계기에 큰 울림을 준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피터 파커는 10대이고 서민이고를 떠나 인간이라는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외계에서 온 생명체도 아니고, 엄청나게 돈이 많아 기본적인 고민이랄 것이 없는 재벌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스파이더맨에서 독특한 친밀감을 느끼고 함께 공감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이 그들과 구분되는 것은 위의 교훈에서 느끼고 변모하기 전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은 언제고 어디서고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면 스파이더맨에서 그 빌런으로 변모하는데 한 걸음만 삐딱해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경고이고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비명을 스파이더맨은 매번 초주검이 되어가며 외치는 것이다.
작가들이 괜히 피터가 책임에 대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닥터 옥토퍼스 같은 인간이 되었을 거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이유들로 인해, 스파이더맨은 이제까지의 히어로들과 비교했을 때 가히 혁신적인 모습이었다. 스파이더맨 이전의 슈퍼 히어로는 이런 깊은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코믹스가 연재된 지 근 20년이 지난 1985년에 샐리 캠턴이라는 기자는 스파이더맨에 대해 ‘열등감, 여성 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며 반사회적이며 죄책감에 툭하면 사고를 치며 기능성 신경쇠약’이라는 분석 기사를 썼다.
사실 그 분석은 정확하기 때문에 더 아픈 구석이 있다. 코믹스를 보면 피터가 좀 심하게 신경쇠약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해리의 호의로 그와 함께 룸메이트가 된 이후에도 피터는, 숙모 메이 파커와 헤어지고 나서 메이가 병으로 쓰러져 죽으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끊임없이 혼자서 불안해한다.
문제는 그저 상냥한 마음에서 걱정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때 메이는 친구인 왓슨 부인, 즉 메리 제인의 숙모와 함께 살기로 했다. 즉, 메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없어서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서 온갖 시나리오에 생기지도 않은 일에 대해 상상하고 어쩌나 하며 괴로워한 것이다.
히어로들 중에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다크한 캐릭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불행한 과거를 통해 히어로의 길을 걷는 것은 장중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스파이더맨만큼, 불행을 끌고 다니는 찌질한(?) 캐릭터는 없다. 스파이더맨은 다른 불행한 히어로처럼 태생이 다크 한 히어로도 아니고, 세계관 자체가 참혹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최초의 10대 메이저 히어로라는 점에서 그를 따라다니는 이 불행의 플롯 구조는 독자들에게 남의 일이 아니게 다가온다.
플롯 구조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단 이유는, 다른 히어로물에서는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하다 불행이 우연 혹은 의도치 않게 딸려오는 구조지만 스파이더맨은 여지없이 불행이 먼저 들이닥치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갑작스런 불행에 대처한 행동이 오히려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웃픈 상황이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메이 파커가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데, 급하게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다. 마침 혈액형이 맞는 사람은 피터뿐이다. 피터는 방사능에 오염된 자신의 피를 수혈해주게 되면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되면 어쩌나 두려워하지만 당장 수혈하지 않으면 메이 숙모가 죽기 때문에 일단 수혈을 하게 된다.
다행히 메이 숙모는 회복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핏속의 방사능 때문에 메이 숙모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지고 코마에 빠지면서 숙모를 치료할 유일한 수단을 찾기 위해 방법을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다시 악당들과 싸우다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버리는 상황이 된다.
오죽하면 초창기 코믹스에서 주 플롯의 패턴이 ‘사건 해결-> 일이 꼬인다->피터가 자기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냐고 한탄한다’의 구조가 주를 이루는 패턴이었다. 피터가 울면서 끝나는 스토리도 있었고 ‘아예 초능력을 얻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며 한탄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한 에피소드에서는, 빌런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얼굴마담으로만 등장하고 정작 메인 스토리는 피터의 불행 이야기만으로 꾸며진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힘들어하던 차에 빌런 때문에 인생이 더 꼬이거나(예로 좋아하는 여자와 사이가 안 좋아져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빌런을 잡기 위해 스파이더맨으로 변장하고 급히 자리를 비우자 악당을 보고 도망간 겁쟁이라고 경멸당하거나, 심지어는 그 여자를 다른 남자가 구해줘서 그 둘이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다.), 빌런을 잡아도 인생이 나아지는 경우가 없어 허탈해하는 경우였다.
이런 일이 계속돼서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된 걸 과거의 악행에 대한 벌이라고 자책하기도 하는데, 오죽하면 ‘Parker Luck’이라며 자기 불운을 한탄하는 용어가 따로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것은 일종의 <스파이더맨>의 클리셰를 자아내는데, 절대로 스파이더맨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피터는 스파이더맨 생활을 후회하면서도, “내 삶이 원래 그렇지 뭐!” 하며 울적해한다. 일상을 희생하면서도 계속 싸워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악당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보고 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싸워나간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특히 90년대를 지나가면서 그런 불행 플롯 구조가 많이 개선되고 바뀌는 양상을 보여준다. 60년대 10대의 삶에 대해 주목한다거나 사회의 중심 연령층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그들의 삶이 80년대를 지나 90년대가 되면서 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하고 브레이크 댄스를 지나 힙합으로 대두되는 10대 문화들이 사회문화를 리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의 관심사에 주목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성향이 사라지게 되는데, 최근 실사 영화에서 초기 코믹스의 형태로 돌아가면서 이 형태는 옛 추억을 되살리는 클리셰로 다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캐릭터도 일반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블의 캐릭터들이 모인 어벤저스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유독 외톨이라는 점은 도드라진다. 그가 일반 생활을 문제없이 하기 위해서 그는 동료들에게도 신분을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불운의 아이콘이라던가, 10대 서민층 히어로라던가 하는 다양한 요소가 합쳐져서 나온 스파이더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코믹스로 탄생한 초창기부터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편집증적인 강박관념 때문에 다른 히어로들에게조차 정체를 숨기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친구 없이 외톨이가 되어갔고 나중에 어디 팀에 들어가도 오래 못 붙어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어벤저스에서 좀 오래 붙어있었지만 여기서도 사정상 탈퇴하거나 솔로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히어로팀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는 것은 스파이더맨이 갖는 이중적인 성향을 다시 한번 심리적으로 주목하게 된다.
작품 외적으로 보자면 스파이더맨의 매력 중 하나가 어려운 역경을 홀로 이겨내는 평범한 청년이라는 점이고, 다른 동료가 함께 활동하게 되면 그의 불운 플롯 구조도 희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을 외톨이로 만들려는 작가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피터 파커가 계속 불행해지면서 친구를 잃는 것은 ‘스파이더맨은 외톨이여야 재밌다’ 공식 같은 것이 매우 크게 작용한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점 때문에 메리 제인과의 결혼을 결혼식 당일에 파국으로 끝장내버리려는 막장 아이디어까지 나왔었다.
이 클리셰 때문에 피터는 거의 일본의 하렘물 만화 속 주인공만큼이나 여자가 꼬이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좋게 인연을 맺어가거나 사랑을 쟁취하지 못했다. 헤어지거나 이어진다 하더라도 오래 못 가거나 하는 건 그나마 형편이 좋은 케이스이고 상대가 죽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동성 친구들도 마찬가지라 2014년에도 친구인 플래시 톰슨이 베놈의 숙주가 되어 생고생을 하다가 피터를 구하고 죽고, 해리는 그린 고블린이 돼서 피터와 갈등을 빚다가 마지막에는 피터를 구하고 죽는 등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영원한 외톨이이기 때문에 영원한 연인은 없으나 다양한 여성들과 사귄다. 특히, 클래식 시리즈에서 대학 시절은 청년 슈퍼 히어로의 순수한 사랑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것만으로도 마니아층에서의 평가가 높은 편이다.
그간의 애인 계보를 정리해보면, 그웬 스테이시(첫사랑/첫 여친) → 메리 제인 왓슨 → 블랙 캣 → 메리 제인 왓슨→실크(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4-2015))→메리 제인 왓슨(시크릿 워즈)→모킹버드(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5-2018))→메리 제인 왓슨(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8-))으로 이어지는 방황과 행복을 되찾는 시절은 청춘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이야기로 꼽힌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사랑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도 악명 높다. 작가들이 스파이더맨을 외톨이로 두어야 한다는 전개상의 목적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 때문인지 스파이더맨의 특징 중에서 떠벌이에 해당할 정도로 쓸데없이 계속 떠들어대는 점을 특징처럼 캐릭터화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가 특유의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소로 활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1964년 시작된 이 오래된 코믹스가 2021년 다시 멀티버스를 통해, 그 옛날의 팬들부터 새로운 팬들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독자층을 반영해 온 부단한 작가들의 노력과 피땀으로 일궈낸 것에 다름 아니다. 문화가 탄생한 그 나라의 숨결이 들어가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 아닌, 자연의 섭리이다. 이제 문화의 중심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고 다들 자신하고 있다.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글 쓰는 이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리는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 것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독자들의 눈이 올라가 있는 것만큼 그들에게 채찍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공부하고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현상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던가. 한류의 세계화는 어느 한 오타쿠의 행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라며, 길고 길었던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이것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