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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9. 2021

돈없는 하급 귀족이라 천대받고, 고향에서 도망쳐 나와서

프랑스 최초의 황제로 등극하여 전 유럽을 떨게 만들다.

1769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1768년까지 제노바의 소유였으며 그의 집안도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이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여기에 참여했던 그의 가문은 프랑스로 전향해 보나파르트 가문이 된다.

 

유년 사관학교에 보내져 자랐다. 이 시기의 사관학교는 프랑스혁명 이전 대귀족 자제들의 경연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코르시카라는 깡촌 출신의 하급 귀족 자제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사관학교에서 우스꽝스러운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을 받았다. 동기 중에 유일하게 동기생에서 브리엔이라는 학생이 그와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브리엔은 나중에 그의 부관이 된다. 동기들에게 괴롭힘도 당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겨내겠다는 반항심이 유년기의 그를 더욱 독하고 끈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프랑스 본토에서도 상류층인 귀족 자제들만 모인 사관학교 내에서야 촌동네 섬 자락 출신에 명문가라고는 하지만 프랑스 본토의 귀족이 알아볼 정도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일화에 따르면, 폭설이 내린 어느 날, 재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려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속한 편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지휘관을 자처하여 “지금 상황이 긴박하니 내가 우리 편을 지휘하겠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눈덩이를 뭉치기만 하고 나머지는 눈덩이를 던지기만 하라. 내가 가리키는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라.”하며 수세에 몰리던 자기편을 이끌었다. 그는 선택과 집중을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전략을 이미 10대에 체득한 상태였다.

 

이후 기록에 공개된 그의 당시 졸업 석차만 보고, 58명 중 42등으로 낮은 편이라고 오독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성적은 그가 1학년 때 3학년들과 경쟁한 통합 성적이다.


그는 학교생활 중 아버지 샤를이 위암으로 39살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가장을 맡아야 했는데, 이 상황에서 1학년에 3년 과정을 마스터하고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성적이 기록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은 수학과 물리 지식이 상당히 요구되었다. 그가 단순히 군사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졸업 당시 그는 사실 육군이 아닌 해군에 지원하고 싶어 했다. 포병으로 분류되자 이에 분통해하여 영국 해군에 자원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초급장교 시절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하며 쥐꼬리만 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책을 사는 데에 소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 계발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연애소설 등도 꽤나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에 루소의 광팬이었음은 자인한 바 있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글쓰기에 심취해서 연애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샤를이 부관으로 모셨던 코르시카 독립운동 거물인 파스콸레 파올리와 갈등을 빚게 된다. 파올리는 코르시카 해방군을 조직해 코르시카를 착취한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해방시킨 독립운동가로 제노바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구매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 실패로 끝나자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파올리는 샤를이 요절한 뒤 프랑스를 증오하는 친영파로써 코르시카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 총독과 사이좋게 지내던 전 부관 샤를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껴 보나파르트 가를 박대했고, 이에 그의 집안은 어쩔 수 없이 완전히 코르시카를 떠나 프랑스로 이민을 가게 된다.

 

프랑스령의 외딴섬 코르시카 출신으로 가난과 설움 속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프랑스 구국의 영웅이 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프랑스 최초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이른바 나폴레옹 황제 1세의 이야기이다.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지난 세기 프랑스 위인 열전에서 항상 1등의 자리를 고수한(그도 결국 20세기 드골에게 선두 자리를 내준다.) 위대한 인물이다.

 

스스로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지만,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을 통해 수립된 자유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이때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 제1제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과도한 패권주의적 외교와, 프랑스혁명의 산물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하는 유럽의 강대국들의 견제에 직면했고,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에 따른 백일천하의 종식으로 몰락했다.

 

2021년, 올해는 그의 서거 200주년이다. 그 유명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한마디로 그의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인물이다.

나중에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파올리에 대하여 고향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설움을 잊지 않고 코르시카로 쳐들어갔고 애송이라며 무시하던 나폴레옹이 당당하게 프랑스 황제가 되어 돌아온 것에 파올리는 제대로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코르시카 여론도 나폴레옹에 대하여 감탄하고 이제 프랑스 놈들이 우리 코르시카 무시 못하겠다라며 기뻐하니, 파올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결국 파올리는 믿었던 영국으로 망명하여 쓸쓸하게 죽는다.

 

1785년 16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불과 4년 뒤인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진다. 나폴레옹은 휴직한 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지원병 대대의 장이 되었으며, 휴직기간이 경과되도록 복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792년 7월에는 정규군 대위로 승진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여러 군주제 국가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대(對) 프랑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프랑스는 홀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군사강국과 맞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몸담고 있던 프랑스 제1공화국 또한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다. 온건파인 지롱드 파와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지롱드 파를 쓸어버리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지롱드 파가 많았던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터지고 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번에는 툴롱에서 왕당파가 혁명파들을 쫓아내고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막 가족과 함께 코르시카를 탈출했던 나폴레옹은 여기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전법으로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군을 진압했다.

23세 때 나폴레옹의 초상화

나폴레옹이 지휘관이 된 데는 기존의 장군, 제독들이 왕당파로 몰려 망명하거나 처형당해 많은 고급 장교 보직이 공석이 된 것도 한몫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정치군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당시 자코뱅당의 총수였던 로베스 피에르와 연이 닿아 있었다. 깡촌의 나폴레옹이 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철저한 나폴레옹의 전략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미관말직에 있던 나폴레옹은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Le Souper de Beaucaire)’라는 짧은 정치 팸플릿을 작성한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이긴다.’라는 내용의 이 팸플릿은 혁명에 대한 지지가 목적이든, 출세 목적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툴롱 포위전이 벌어지는 1793년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당시 이 팸플릿을 보고 깊이 감탄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 바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었다.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주면서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에 전격적으로 배치된다. 나폴레옹은 바로 군대 내에서의 뒷배를 만드는데, 역시 코르시카 출신으로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파견 의원 앙투안 크리스토프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였다. 포병대 지휘관이 부상당하자 살리세티는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천거해서 낙하산으로 꽂아준다.

 

이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은 사령관 카르토와 공적을 다투었고, 결국 정치적 뒷배의 영향력을 동원해서 카르토가 파리로 소환되게 만들었다. 참고로 이 카르토는 화가였고, 교체된 사령관은 피 공포증이 있던 내과의사, 도페 장군이었다. 따라서 한 번 더 바뀌고, 3번째로,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자신이 지휘하게 된다.

 

상급자가 여러 번 바뀌게 되면서 실무자에 해당하던 나폴레옹은, 지휘관이 바뀔 때마다 승진을 거듭했다. 툴롱 포위전이 4개월도 되지 않아 종료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거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폭풍 승진이었던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 들어가서 툴롱을 점령하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으며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오귀스탱은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자진하여 ‘이탈리아 방면 포병 사령관’을 맡게 된다.


그 직후,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가 몰락한 것이다.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형인 막시밀리앙, 동료인 생쥐스트 같은 이들과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코뱅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게 된다. 이때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던 살리세티는 나폴레옹을 ‘자코뱅 주의’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에게 탈옥을 권유했으나,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투옥된 지 2주 만에 정작 자신을 감옥에 넣었던 살리세티에 의해서 풀려난다. 하지만 목숨만 건진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돌아갔지만 단지 부대 참모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였다.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인맥을 만드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툴롱 포위전 이후 왕당파를 학살했던 대표적인 장군 중 하나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하여 실권을 잡은 권력자 바라스였다. 바라스는 훗날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는 조제핀의 내연남이었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와 약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라스와의 관계를 위해, 혹은 진정으로 조제핀을 사랑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제핀과 결혼하게 되면서 클라리와 파혼하게 된다. 클라리는 이후,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해서 스웨덴 왕비가 된다.

 

명령 불복종으로 직위해제까지 당했던 당시 나폴레옹을 복권시킨 것이 이른바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이다. 1795년 9월 아르투아 백작이 영국 육군과 해병대, 망명 귀족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친가톨릭-반혁명 왕당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왕당파 시위대는 3만까지 그 숫자가 불어나게 된다.

 

이에 당시 중앙정부는 방데 전쟁 진압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를 한 장 프랑수아 드 므뉴(Jean-François, baron de Menou)를 진압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파리의 병력은 5천이었고 므뉴는 이 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정부는 므뉴를 파면 및 구속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라스였다. 나폴레옹은 바라스에 의해서 현장지휘관이 되었고, 므뉴에게 얻은 정보를 활용, 한 기병 장교를 시켜서 파리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파리로 끌고 오게 된다. 이 기병 장교가 바로 ‘조아킴 뮈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끌고 온 40문의 대포를 튈르리 궁 인근 교차로에 배치해서 파리 시내에서 대포를 쏴대는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이후 왕당파 시위대는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해산했고, 나폴레옹은 육군 중장 진급을 하게 된다.

1797년 그려진 초상화

이때의 전공(戰功)으로 그는 다시 원하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프랑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까지 차지하게 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원했고, 혁명정부도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락한다. 당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를 쉽사리 격파하며 카이로까지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프랑스 해군이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 나면서 퇴로가 끊기는 위기에 처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재탈환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요격을 겸해 내친김에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으나 결실 없이 물러났고, 프랑스 본국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받게 되자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탈출해 겨우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뒤엎고 나폴레옹을 제1 통령으로 하는, 3명의 통령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500인회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나폴레옹

당시 프랑스에는(산악파와 대비되는) 평원파(지롱드)라고 불리는 온건 부르주아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년마다 정권이 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종식시켜줄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폴레옹 중심의 새 정부는 곧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종신 통령에 취임했다.

 

국민 교육 제도의 확립, 훈장 제도의 도입, 프랑스 은행 설립 등이 이 시절의 업적으로 꼽히지만,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이었다. 또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함께 자유주의가 널리 확산되면서 현재의 독일이나 스페인 등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급진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 급진세력은 프랑스혁명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자국을 짓밟은 침략·학살·약탈자였던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지극히 증오하였으며, 이는 내셔널리즘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당시의 급진세력으로부터 나타난 공화주의, 자유주의, 내셔널리즘은 19세기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탄생’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고,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루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욕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렇게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교황에게 대관받아 나폴레옹 1세에 등극한다. 자유, 평등, 권리를 기치로 내건, 소위 근대 공화정의 출발을 알렸다는 프랑스혁명의 결과치고는 대의명분이 부족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안정적인 정권의 성립을 바라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며 거친 대관식에서 보인 행보도 이후에도 뒷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냈다.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려는 군주들은 로마로 건너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이 관을 머리에 씌워줬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기가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고, 교황을 직접 파리까지 데려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했을 뿐 아니라, 교황이 황제에게 부여해주는 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을 집어 머리에 썼다.

당시의 광경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

이 사건은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몰락 즉, 더 이상 신의 권위로 정치를 행사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후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마저 붕괴시켜 신권 정치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하여 혁명을 끝내고 기존의 지배질서에 스스로를 편입하려고 했지만 유럽의 정통 왕실들에게는 그저 찬탈로 보였다. 결국 나폴레옹은 계속 유럽 구체제 국가와 전쟁을 하게 된다. 베토벤이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하며 나폴레옹을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이라 칭했다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보나파르트라고 쓰여 있는 표지를 찢어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후에,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황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 베토벤은 웰링턴을 찬양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기까지 하며 뒤끝(?)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는데, 이탈리아는 외젠 드 보아르네를 부왕으로 임명하여 맡긴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동북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 크로아티아(일리리아), 아이티 등을 다스렸다.

 

당시 세계 제일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과 대적하기 위해 스페인 해군까지 끌어들이며 프랑스 해군을 강화하여 영국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넬슨 제독에게 패하면서, 영국 점령의 꿈은 물 건너가 버리고 만다.

 

대신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1806년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식민지와의 무역으로 대유럽 무역 중지로 인한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과 스위스(헬베티아 공화국)가 가장 많은 타격을 받았다.

 

물론 영국도 경제 피해를 좀 입기는 했으나, 정작 프랑스의 해군력 자체가 영국 해군에 비해 전력차가 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되려 프랑스가 경제 봉쇄를 당한 꼴이 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에는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거대한 시장이 있어서, 영국이 캐나다와 미국 등과 교역을 하면 그 나름대로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판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실리를 챙겨가는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스페인 왕위를 빼앗아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겼고,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을 휘젓고 다니면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을 샀다.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포르투갈과의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약 30만 명의 병력을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가 좌지우지되던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고 계속 통상에 나서자, 이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1812년 당시로선 유례(類例) 없는 61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페인 전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어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러시아 침공의 실패로 나폴레옹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나폴레옹의 부대가 격파당한 틈을 타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대불동맹이 다시 결성된 것이다.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등이 동맹을 맺었고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까지 동맹에 가입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동맹에 맞서 나폴레옹은 고작 몇 달 만에 새로운 군대 양성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초반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점차 전쟁은 피차의 소모전으로 흘러가며 나폴레옹의 입지를 좁혔다. 더군다나 대불 동맹군은 워낙 강한 나폴레옹 본인과의 교전을 피하고 다른 장군들을 각개 격파하며 프랑스군의 총전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결국 1814년 4월 퇴위를 선언한 나폴레옹은 대불 동맹국에게 투항한다.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코르시카를 프랑스에서 분리 독립시켜 나폴레옹을 코르시카의 영주로 보내버리려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불침 무적의 요새로 만들어 재차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다시 동맹국에 도전할 것이라는 우려로 포기한다.

 

당시 동맹국은 나폴레옹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추방지로 샤르데냐, 미국, 세인트 헬레나, 심지어 호주 쪽까지 고려하였으며 결국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을 유배지로 선택한다.

엘바섬 유배지

그 와중에 차츰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나폴레옹이 탈출하는 것을 방조한다. 그 틈을 타 나폴레옹은 탈출에 성공한다.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돌아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연합군을 보냈다. 나폴레옹 군은 상당히 선전했지만, 러시아 원정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컸기에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그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났고, 프랑스 의회가 온통 적들로 가득 찬 상태에서 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조제핀이 말년에 기거했던 말메종에 잠시 머물며 옛 추억을 회상하던 나폴레옹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이 파리 외곽으로 접근해 오자 서둘러 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가려했으나 해상을 봉쇄한 영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영국에 명예롭게 항복하기 위해 영국 전함 벨레로폰 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지만 영국은 그의 영국 상륙을 불허한 후, 계속 그를 항구에 묶어 놓았고, 결국 세인트 헬레나 유배라는 조치를 취한다.

세인트헬레나 유배지

이 섬은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절해고도라 험악한 곳이었고, 평소에도 사람이 편안하게 살기엔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섬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섬의 예전 총독이 기거했던 총독 관저였던 롱우드 하우스는 당시 매우 낡았고 형편없었으므로 이를 수리하고 새 단장하는 동안 시가지와 가까운 저지대의 브리아스에 머물다가 이후 롱우드로 옮긴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회고록 구술과 산책 등으로 시간을 때웠다.

 

영국에서 세인트 헬레나의 총독으로 파견된 동갑인 허드슨 로(Sir Hudson Lowe)가 나폴레옹을 학대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쎈 허드슨은 초반부터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나폴레옹을 굉장히 미워하여 나폴레옹이 거주하던 롱우드 하우스 주변에 감시병을 배치해 가택연금했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황제라는 칭호 대신 장군이라고 부르게 시키는 등 모욕적인 조치를 취했고 그도 나폴레옹을 이런 식으로 욕했다.

 

허드슨에게 박대당하는 유배 생활과 지병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821년 5월 5일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 묘

나폴레옹의 일대기는 프랑스 근대 공화정의 성립과 당시 유럽 국제정세까지 모두 한꺼번에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분량이 많아졌다.(사실 이렇게 다이제스트판으로 줄이는 것도 상당히 축약하고 정리한 것이다.)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만큼 자세히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에 한번 다루는 것 조금 촘촘한 돋보기로 들여다보았다.

 

힘없는 지방의 하급 귀족, 빽이라고는 전혀 없이 프랑스 본토 귀족 자식들에게 차이고 밟히고 같은 학교에서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16살에 장교로 임관하였으나, 아버지와 척이 졌던 고향의 실권자에게 찍혀서 가족과 부득이하게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던 그의 삶은 결코 승자의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그 상황에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짜냈고, 그렇게 올라가고 올라가서 끝내 프랑스 최초의 황제라는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를 유배하면서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그가 언제든 약간의 틈만 있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전쟁의 신이라며 두려워했고, 실제로 그는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 정말로 100일 천하를 이루기도 했다.

 

당신이 금수저도 아니고, 명문대학 출신도 아니며, 그렇다고 뒤를 봐줄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당신의 인생을 허접하기 그지없는 삼류인생이라고 자조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똑같은 처지였던 키 작고 있는 것은 머리와 깡밖에 없던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떨게 하는 황제가 되었다. 당신에게 세계를 정복할 깜냥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수백 년 전의 코르시카 촌놈은 유럽을 정복했는데, 당신은 고작 당신의 인생 하나 확실하게 세우지 못하고 고작 부모를 탓하고, 시대를 탓하고, 돈이 없고 빽이 없어 그 모양으로 산다고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그저 접고 말 것인가?

 

나폴레옹은 운을 믿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늘 스스로 준비했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고, 없는 인맥도 만들어냈으며,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노력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공하는 이들이 그저 한때의 운이 좋아서, 혹은 빽이 좋으니까, 혹은 든든한 뒷돈을 대주는 처가가 있으니까, 따위로 생각하며 당신의 인생을 그렇게 방기 할 것인가?


그러지 마라.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에게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주셨고,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당신이 그만한 인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임을 수백 년 전 프랑스 외딴섬 촌놈이 황제가 되면서까지 증명하지 않았던가?

바보 같은 소리 할 시간에, 책 한 줄 더 읽고 당신의 생각을 정리할 것이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기획하고 생각해서 앞으로 나아가라.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이라고 깨닫고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늦었다고 생각한 만큼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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