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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30. 2021

주지사도 되기 전에 하반신 불구라는 판정을 받고 나서도

미국 역사상 최초로 4선을 연임한 대통령으로 강대국 미국을 이끌다.

1882년,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지역 사회의 유복한 지주이자 철도회사 부사장이었던 덕분에,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당시 유복한 집안의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가 별로 없었지만, 공부만 파는 좀생이 아닌 운동을 좋아하는 활동파였다고 한다. 1905년, 먼 친척뻘(13촌)인 엘리너와 결혼하였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1913년 해군 차관보 시절

이때부터 대니얼스 전 장관을 자신의 ‘보스’로 모셨는데, 이때부터 대니얼스는 그가 자신을 비난한 적이 있음에도 쿨하게 계속 그의 후원자 역을 자처한다. 이후 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내기도 한다. 또 이때 그는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루이는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킹메이커로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통령 임기를 4선이나 연임한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본명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라, 줄여서 FDR이라고 부른다. 20세기를 이끈 정치가 중에서는 단연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특히,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두 차례의 국난을 안정적으로 극복하여 미국을 지금의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받는 전설적인 정치인이다.

백악관에 전시된 공식 초상화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당시 민주당 윌슨 대통령이 주도하다 결실을 맺지 못한 국제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공화당 워런 G. 하딩 후보에게 패하며 FDR도 함께 낙선한다.

 

게다가 건강에도 큰 문제가 생기는데,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 진단을 받으면서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 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 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때부터 혁신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 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했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러한 정력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사실 당시에도 그의 하반신 마비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중들에게 감춰서 그렇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병세가 심각했지만 노출하지 않으며 부단하게 노력했다. 심지어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해야만 할 정도로 하반신 마비는 나아지지 않았고,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휠체어 탄 사진을 공개하길 꺼려 몇 안되는 휠체어 탄 사진으로 꼽히는 사진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도 있었지만, 암묵적으로 기자들이 자발적인 보호를 해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동료 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

 

정적들은 1932년 전당대회 당시부터 루즈벨트의 건강을 물고 늘어졌고, 루스벨트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할 때는 대놓고 휠체어를 타고 나올 정도로 당내에서는 이미 그가 반신불수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 수준이었다.

 

1932년 1월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 다만 장가라의 총알은 FDR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사건에 대한 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장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장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그는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는데, 취임 당시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전설처럼 남았다.

루스벨트는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일단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하고,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 제정 등이 이때 이뤄졌다.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이자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이 시행된 후, 그의 집권 기간 실업률은 줄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 등 경제 상황이 빠르게 호전된다. 그리고 이러한 호경기에 힘입어 그는 1936년 대선에서 상대편 공화당 후보인 알프레드 랜든(Alfred Landon)을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한다. 1936년 대선 선거운동을 하면서 루스벨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We had to struggle with the old enemies of peace—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speculation, reckless banking, class antagonism, sectionalism, war profiteering.

우리는 평화의 오랜 적들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 산업과 금융독점, 투기, 무절제한 은행업, 계급 간 대립, 파벌주의, 전쟁으로 부당 이득을 챙기는 이들.

They had begun to consider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s a mere appendage to their own affairs. We know now that Government by organized money is just as dangerous as Government by organized mob.

그들은 미국 정부를 자신들의 사업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직적 자금에 의한 정부는 조직적 폭력배에 의한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Never before in all our history have these forces been so united against one candidate as they stand today. 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 and I welcome their hatred.

우리들의 역사상 한 번도 이 세력들이 한 명의 후보에게 이토록 대항해 힘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저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합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한편, 이 1936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여론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명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사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대규모 전화 여론조사 및 독자들에 대한 우편 설문을 통해서 랜든이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루즈벨트의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것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전국 득표율인 60.8%를 기록하며 여론조사가 얼마나 조작된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상하원 선거도 상원 76석, 하원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 담는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다.

 

잡지를 사서 읽을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표본대상만을 조사대상으로 삼는 말도 안 되는 여론조사를 한 탓이었다. 결국 이 실패로 인해 다이제스트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2년 후인 1938년 폐간하고 만다. 반면, ‘조지 갤럽’이란 언론인은 무작위 표본 추출을 통한 조사를 통해서 루스벨트의 승리를 예측했고, 이것이 맞아떨어지면서 인기를 얻는데, 이 성공으로 갤럽은 독자적인 여론 조사기관을 만들었고 이게 바로 당신이 들어본 바로 그 ‘갤럽’의 시작이다.

그렇게 루스벨트는 집권 2기에 들어섰으나, 1937~1938년엔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찾아왔고, 외교적으론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 지역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고심하게 된다.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선 경제 주기상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시적 패턴이란 설도 있고, 또 고전학파 전문가들은 뉴딜정책의 재정지출 효과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케인즈주의자들은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바로 재정지출을 잠시 줄이며 뉴딜을 멈춰서 일어난 참사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때의 경기 침체란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대공황 시기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집권 1기와 달리 집권 2기는 의회와의 상대적 불화로 애초에 뉴딜이 제대로 작동할만한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지도 못했다.

 

실제 집권 1기 동안에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과반 의석에 힘입어 뉴딜 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을 거침없이 통과시켰지만, 1937년 들어 민주당의 진보화에 불만을 가지던 보수적인 상당수 남부 민주당원 의원들은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이른바 보수연합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보수연합은 1930년대 중후반 이후에 상정된 뉴딜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의 거의 대부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가장 마지막으로 입법화되는 데 성공한 뉴딜 정책 관련 중대 법안은 1938년에 제정된 ‘공정한 노동기준에 대한 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이다. 또 보수연합은 뉴딜 정책에 대한 법안들의 상당수를 위헌으로 판결한 당시의 보수적인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법관 증원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던 중 1940년, 루스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지켜져 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지난 선거보단 낮았지만 여전히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1940년이 딱 폭풍전야의 시기였다.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많이 사그라든 상태였다. 즉, 미국인들도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참전할 것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 아닌 전쟁을 의미했다.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천천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시기를 조율 중이던 미국에게, 역사적인 1941년 일본제국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다. 루스벨트는 바로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이 연설 이후 미국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전쟁을 이끌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마스 E. 듀이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루즈벨트는 다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대통령에 4번이나 당선되는 전설을 이뤄낸다. 다만 3선과 달리 4선은 당시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 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나, 4선 당시에는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성이 절박한 사태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자칫 그가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물론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3선 이상 연임을 할 수 없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 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미 사망 하루 전이던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루스벨트의 사망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깐 들떠서 과거 프리드리히 2세가 7년 전쟁에서 멸망 직전에 몰린 순간,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인해 기사회생한 전례를 재현하길 꿈꿨다.


이런 생각을 한 게 히틀러 혼자만은 아니였는지 괴벨스는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전화로 “여제가 죽었습니다.”라고 흥분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잠시 동안 베를린 전체가 살았다는 열광에 휩싸였지만 후임자인 트루먼은 표트르 3세의 전철을 밟을 인물이 아니었다. 서방 연합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독일을 압박해왔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자결하기에 이른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후임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맡았다. 그는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만큼 루즈벨트가 남긴 일들은 산적해 있었다.


FDR은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어, 대공황으로 수렁에 빠져있던 당시 미국에 희망을 불어넣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내, 오늘날에도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서유럽 국가들을 대신해 세계를 이끄는 명실상부한 지도국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고,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그가 계획했던 유엔 창설 등의 주도적 역할을 하며 전후 국제 질서의 틀을 구축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데까지 올라서게 된다.

 

당신이 이름만 들어봤다고 기억하는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되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하던 시절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었다. 다시 말해, 일각에서 비난하는 공산주의스런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수호한 수정자본주의적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루즈벨트가 지나왔던 1930년대부터 15년간의 겪어온 사회의 변화상을 보면, 그가 뉴욕주지사를 연임하며 정치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복지정책이나 경제 부양책에 훈련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장애를 물고 늘어지며 어떤 식으로든 그를 끄집어 내리기 위해 공격했던 보수집단들의 공격은 끊임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들은 여론을 조작하고 기득권층이 누리던 부정부패를 이어나가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신이라면, 정치가로서 유명세를 떨치기도 전부터 장애를 얻게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연설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전국을 돌며 선거운동을 하며 4선이나 대통령을 하겠다는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하반신 불수로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장애를 겪으면서도 그는 긍정적인 사고를 버리지 않았고, 오랫동안 아무도 개선하지 못할 것이라던 미국의 대공황을 경제 호황으로 일궈냈다. 4선을 연임하면서 아무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이루어내는 미국을 만들어냈다.

 

당신이 걸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 대통령은 고사하고 당신은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이뤄낼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당신에게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사지 멀쩡한 육신이 있다. 다만 당신의 정신이 장애를 겪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스스로에게 찾지 않고, 노력하기도 전에 사회 탓을 하고, 제도 탓을 하고, 정부가 모든 정책을 잘못해서 당신이 집을 살 수 없다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아니다. 문제는 밖에 있지 않다. 당신에게, 당신의 안에 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삐뚤어지고 스스로의 한계를 지으며, ‘그런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그 나약한 정신으로 휠체어를 타지도 못하는 상태에 처해있단 말이다. 유명해지기도 전에 걷지도 못하는 장애를 얻어도, 이를 악물고 재활을 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걷지 못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그는 그가 이끌던 미국을 20세기 최강대국의 반열에 올리는 역사를 이뤄냈다.


나라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고, 고작 당신의 한 몸 하나 당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리는데 당신의 노력으로 안될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해보지도 않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디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지 당신은 아직 모른다.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싶지 않은가?

당신이 어디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인재인지?


당신이 그 누구보다 높고 멀리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뭐하러 이 귀한 시간에 공을 들여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있겠느냔 말이다.


시작하라, 깨달은 바로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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