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31. 2021

7년 동안이나 수익이 없던 신생 회사에 돈을 들이붓고서

결국 그 회사를 통해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하다.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모델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미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고, 할머니는 영국과 독일계 혈통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남아공에 거주 중이며,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현역 모델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가 남아공에서 최연소로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우수한 전기 기술자여서 상당히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남아공 에메랄드 광산 채굴권을 헐값에 구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컴퓨터에 흥미를 가졌던 10살 때, 이미 가정용 컴퓨터를 살 수 있었고, 또한 10대 중반에 아버지로부터 전기와 폭발물 관련 지식을 익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즈음에 이혼하게 된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어렵게 결정했는데, 사춘기 때부터 틀어져서 현재까지 심각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다. 공식적으로 자세히 밝히진 않았으나 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괴팍하고 폭압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2세이던 소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우울함을 겪은 후,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서로 극복을 시도했다고 한다. 본인의 언급으론 가장 좋아했던 책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반지의 제왕>, <파운데이션 시리즈>였다고 했는데, 특히,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경우 그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했는데, 이후 ‘SpaceX’와 ‘인류의 다행성종족(Multi-Planet Species)화’라는 개념은, 해리 셀던이 만든 단체 ‘파운데이션’에서 착안한 것이다.

 

컴퓨터에 일찍 눈을 뜬 탓에 프로그래밍에도 재능을 보였다. 12살 때 프로그래밍 언어를 독학해서 ‘Blastar’라는 이름의 게임을 동생과 함께 만들고, 이를 게임 잡지에 500달러(현재 가치로 1,200달러)에 판매했다. 또 모형 로켓 만드는 데도 취미가 있어 가솔린과 각종 화학 약품을 혼합하여 로켓 연료를 만들곤 그걸 자작 로켓에 넣어 시험 발사한 적도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몸이 허약한 데다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탓에, 주변 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건 기본이고 폭행과 괴롭힘을 당했다. 한 번은 계단에서 밀려 굴러 떨어진 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때 코 재건 수술을 했으며 후유증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호흡기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정착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징병제를 시행 중이었고, 남아공 국적자였던 그는 입영 대상자였는데, 마침 캐나다 시민권자였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캐나다의 시민권을 취득해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17살에 1년간의 절차를 거쳐 어렵게 캐나다 정부로부터 입국을 허가받는다.


18세에 캐나다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와 척을 져서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어머니는 아예 돈이 거의 없던 상태라 상당한 고생을 하게 된다. 정작 몬트리올에 살던 외가의 친척들이 그가 도착하기 훨씬 전에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던 것이다. 때문에 18살의 나이로, 1년 동안 노숙자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공장의 유독 보일러 폐기물을 치우거나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는 등 인력시장의 궂은 일을 하며 살았다.

 

겨우, 2년 동안 온타리오에 위치한 퀸스 대학교(캐나다)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편입, 2년 동안 물리학 학사를 받기 위한 학점을 이수하고, 이후 1년 더 머물러서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점까지 이수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경제학 복수전공으로 학사를 끝마친다. 그 기간 중에 아르바이트로 게임 제작사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이후 재료과학 전공으로 1995년 스탠퍼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합격하였으나, 창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면서 입학도 하기 전에 합격 통지만 받고 등록을 하지 않아 자동 제적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미국의 기업인으로 PayPal의 전신(前身)이 된 온라인 결제 서비스 회사 X.com, 로켓 제조 회사 겸 민간 우주 기업 스페이스 X,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회사 뉴럴 링크, 훗날 GPT-3을 개발한 인공지능 회사 OpenAI를 설립했고, 초고속 진공 열차 하이퍼루프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또한, 지하 운송 시스템 더 보링 컴퍼니를 설립했으며, 시가 총액 기준으로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만든,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꼽은 현재 세계 제일의 부자, 일론 리브 머스크(Elon Reeve Musk)의 이야기이다.

그는 창업을 결심하기 전에, 망하게 될 경우를 상정한 일종의 실험을 한다. 이른바 ‘일론 머스크의 욕구 실험’으로 유명한,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창업을 앞두고 혹시나 실패했을 때 뒤따를 가난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1달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는 대형마트에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 30달러어치를 사서 컴퓨터를 끼고 한 달 동안 매일 그것들만 먹고 생활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 달을 지내보니 제법 살만했다고 그는 판단하게 된다.

 

머스크는 원래 에너지 사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실리콘밸리에서 발전 중인 인터넷 사업의 가능성을 보고 곧바로 인터넷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1995년 스탠퍼드에서의 수업이 시작된 지 이틀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당시 퀸스 대학에서 역시 경영학을 전공하던 그의 동생을 실리콘밸리로 불러들여 23살에 첫 회사인 집투 코퍼레이션(Zip2 Corporation)을 설립했다.

‘ZIP2’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지역 정보를 신문 출판 사업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주로 하는 회사였는데, 뉴욕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1999년 2월 컴팩에 3억 700만 달러에 인수되었다. 그중에 당시 머스크의 지분은 7%로 2,200만 달러였다. 28살의 나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컴팩은 인수한 이 회사를 잘 운영하지 못했고,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큰 손실을 보고 이 회사를 폐업한다. 결국 컴팩은 일론 머스크에게 더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종잣돈만 퍼준 셈이 되었다.

 

일론 머스크가 다음으로 노린 곳은 온라인 금융 시장이다. ‘ZIP2’를 매각하며 마련한 돈으로 친한 동료 3인방과 함께 온라인 은행 엑스 닷컴(X.com)을 설립하고 이메일 주소를 이용해 송금을 하는 방법을 고안한다. 2000년, 동일한 서비스를 개발 중이던 '컨피니티(Confinity)'라는 회사와 합병하고, 회사명을 '페이팔(PayPal)'로 변경하였다. 이 두 회사는 서로 같은 건물에 있는 경쟁 관계였는데, 계속해서 경쟁만 하다가는 모두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에 두 회사가 모두 동의하면서 전략적인 합병을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합병 후 구성원들과의 의견 갈등이 자주 일어났고, 결국은 머스크가 호주로 휴가를 간 사이 동료들이 이사회에 해임안을 올리는 바람에 CEO에서 잘리고 만다. 그래도 2002년 이베이가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인수했을 당시 페이팔 지분은 약 11% 정도 가지고 있었기에 머스크는 약 1.7억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소유한 청년 사업가로 널리 이름을 알린다. '엑스 닷컴'을 설립한 지 3년 만에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두 번의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어려서부터 가슴에 품었던, 조금 더 스케일이 큰 꿈을 위해 큰 걸음을 떼기로 결심한다. 즉, 우주 발사형 비행체, 쉽게 말해 우주 로켓을 만들겠다는 것을 사업화한 것이었다. 단순히 로켓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한 저가형 우주여행과 화성 식민지 사업을 꿈꿨다.


이것이 그가 2002년 6월 설립한, 그의 세 번째 회사, ‘스페이스엑스(SpaceX)’이다. 일론 머스크는 여기서 자신이 그간 모은 개인 자산을 모두 쏟아부으며, 최고경영자를 맡음과 동시에 발사체의 디자인까지 직접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로 향하는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스페이스엑스에서 최초로 발사한 모델은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팰컨1(Falcon 1)’이다. 2006년 발사시험에서는 발사하자마자 연료가 누출돼 화재가 발생했으며, 1년 뒤에 겨우 발사에는 성공했지만, 회전축 제어장치 이상으로 고도 321km에서 임무를 종료하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버린다. 몇 개월 뒤 세 번째 발사 역시 순조롭지 않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끝이 났다.

 

2008년 9월 28일, 세 번의 발사 실패 끝에 ‘팰컨1’은 드디어 창공으로 날아올랐고, 일론 머스크는 총 5번의 시도 중 2번의 성공을 이뤘다. 그 전까지 실패만을 거듭했다고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 기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화물을 수송하는 사업자로 스페이스엑스를 선택했으며, 현재까지 민간업체로는 유일하게 ‘우주 화물선’을 운행하고 있다.


사실, 2001년 당시 그는 ‘화성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수분 보급용 젤에 작은 식물들을 채워 넣은 미니 온실을 나사를 통해 화성으로 보내 식물들의 성장을 공개 방송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우주로 돌리고 나사의 예산을 증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발상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나사(NASA)와 기타 우주 산업체들의 자료를 뒤적거려 본 결과, 일개 사업가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금액이 튀어나와 전략을 수정, 아예 러시아의 핵탄두를 제거한 깡통 ICBM을 사서 거기다가 실어서 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인맥을 통해 기술자들을 끌어모으고 현찰 가방을 들고 러시아까지 갔으나 그대로 문전박대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는 그냥 직접 로켓까지 다 만들어서 쏘는 게 비용면에서 훨씬 저렴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스페이스 X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2015년에는 원래 한 번 쓰고 버려지던 로켓을 다시 송환시켜서 연료만 충전시키고 재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성공시키면서 나사로부터 한화로 약 3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지원금까지 약속받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가 아직까지 흑자 전환을 하지 못해 적자 운영 중이라는 점이다.

2016년 1월에는 드디어 처음 생각했던 화성 오아시스의 판을 키워 2025년까지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쯤 되면 스페이스 X의 야망이 단순한 우주 산업 틈새시장 공략이 아니라는 것이 와닿는다.

 

그는 2016년 9월 27일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천문 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구체적인 계획안인 ‘Interplanetary Transport System’을 발표했다. 이 ITS는 2019년까지 현실적으로 여러 부분이 조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새턴 V 수준의 크기를 가진 운송량 100톤급 초대형 로켓이라는 테마는 그대로 유지된 채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2014년 청문회에서는 ULA의 CEO의 면전에다 대고 “우린 완전 미국제에 가격도 저렴한데 이놈들은 러시아제 엔진 쓰면서 가격도 훨씬 높다.”라는 디스를 날려 ULA 측을 완벽하게 디스 하게도 했다. 펜타곤뿐만 아니라 NASA 역시 많은 관계자들이 팰컨 헤비에 주목하며 ULA, 아리안스페이스 등의 경쟁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팰컨과 드래곤 시리즈의 재활용 시도는 이미 전 세계의 차세대 발사체, 우주선 연구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그를 ‘테슬라(Tesla, Inc.)’의 주인으로 떠올린다. 실제 ‘테슬라’는 2003년 마틴 에버하드와 마크 타페닝이 공동 창업한 회사로, 2004년 일론 머스크는 초기에 자금을 투자하여 최대 주주로 등극하면서 법률, 회계사를 주선하고, 모터 개발을 주도한 J.B. 스트라우벨 등의 엔지니어를 영입하는 등 간접적인 역할만을 한 회사이다.


하지만, 애초 계획에 비해 개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로드스터의 원가가 판매 가격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져 2007년 마틴 에버하드를 CEO에서 해고하고, 일론 머스크가 직접 CEO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마크 타페닝 역시 회사를 떠났다. 이와 관련해 벌어진 법적 분쟁에서 초기 경영과 개발에 관여했던 이안 라이트, 일론 머스크, J.B. 스트라우벨까지 다섯 명이 테슬라의 공동 창립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회사의 캐치프레이즈는, 하이브리드가 아닌 100%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자동차 생산이다. ‘테슬라 로드스터’를 시작으로 ‘모델 S’ 등이 대박을 치면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기차 제조사로 꼽히며 시대의 트렌드와 맞아떨어지면서 신생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명 자동차 브랜드에 비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6월 12일, CEO 일론 머스크는 블로그를 통해 테슬라 모터스의 특허를 모두 공개한다고 발표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2021년 1월 도요타를 추월해 전 세계 자동차 회사 중 시가 총액 1위에 올라 있다. 몇 차례나 파산 위기에 몰렸으나 고비를 모두 견뎌내고 자동차 시장에 획을 그음과 동시에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들으며 테슬라의 주가는 연일 고공 상승했다. 대주주인 머스크의 재산 역시 껑충 뛰어 현재의 세계 최고 부자를 만드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설립한 회사는 한두개가 아니다. 그 중에는‘솔라시티 (SolarCity)’라는 회사도 있다. 2006년 머스크의 사촌인 린든 라이브와 피터 라이브가 공동 설립한 회사인데, 린든과 함께 네바다 사막에서 개최되는 버닝맨 페스티벌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린든이 ‘좋은 일을 하는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자 태양광 발전 회사 설립을 그가 제안했다고 한다. 린든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솔라시티를 창업했고, 머스크는 솔라시티의 최대 주주 겸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거의 무료로 솔라판을 설치해 주면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린 에너지와 값싼 에너지 공급을 목표로 시작한 독자적인 사업이었지만, 좋은 기술력과 엔지니어가 있었음에도 사라진 다른 전기차 회사들과는 다르게 테슬라 모터스가 살아남게 한 숨은 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전기차'라는 개념은 자동차 시장이 태동하던 때부터 가솔린 자동차와 대립하였으나 가솔린의 장점에 밀려 시장에서 잊혔다.


이후 잊힐 만하면 터지는 오일 쇼크 때마다 수많은 사업가들이 전기 자동차 사업에 도전했지만, 배터리의 용량의 한계로 인해서 주행 거리가 100km도 넘지 못하는 게 대다수였고, 배터리를 한 번 충전하려면 몇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은 문제 때문에 실용화가 번번이 실패했었다. 머스크는 전기차보다는 배터리를 값싸게 생산하는 게 전기차의 미래라고 판단했고, 태양 에너지가 주력이었던 솔라시티를 통해서 배터리 관련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했다.

 

그는 2014년경에 기존의 방식에 비해 20% 더 효율적이고, 가격은 20%만큼 줄인 배터리를 테슬라 차량에 탑재시켜 기존 가솔린 차량과 비슷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16년,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소유한 NV에너지의 로비로 인해, 솔라시티가 큰 타격을 입고 위태로운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머스크는 테슬라의 전기차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솔라시티가 보유한 기가팩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솔라시티를 인수하여 테슬라의 자회사로 편입하는 강수를 둔다.


이 결정 때문에 몇 년간 테슬라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크게 증가하는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테슬라의 전기차 대량생산 능력의 핵심 자산이 기가팩토리일 정도로 불확실성이 많이 해소된 상황인 것을 보더라도 당시 머스크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증명된 셈이다.

 

‘하이퍼루프 프로젝트 (Hyperloop)’ 역시 그의 작품 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 계획은, 최고 속도 1280km/h를 내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30분에 주파할 수 있는 가상의 교통수단을 기획한 프로젝트인데, 일론 머스크가 미국의 서부 고속 철도 사업을 보고 효율성과 비용에 실망하여 고안한 아이디어이다.

요몇년새 대세가 되어버린 A.I. 분야에도 그의 선견지명은 손을 뻗었다 ‘Open AI’라고 하여 2015년 10월 샘 알트만과 비영리 단체 회사를 공동 설립한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특허와 지식을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독점을 방지하여 인공지능의 안전한 발전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취지였다.


비슷한 개념으로 ‘뉴럴 링크(Neuralink)’라는 회사도 창립했는데, 이 회사는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했다. 뇌에 흐르는 전극을 이용해 데이터를 읽고 쓰거나 AI와의 융합을 위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의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가 창업하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한 회사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만큼 그는 창업 이후 쉴 새 없이 달려왔다. 페이팔을 만들어 억만장자가 되었을 때도 피터 틸의 쿠데타와 격무로 인해 신혼여행조차 가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0년 12월에 첫 번째 아내였던 저스틴과 모잠비크로 2주일 간 여행을 떠난 게 알려진 공식적으로 유일한 장기휴가 기록인데, 불행하게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치사율이 높은 열대열 말라리아에 걸려 열흘 이상 사경을 헤맸다.


당시 머스크는 체중의 20kg 이상이나 빠지며 겨우 죽다살아난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머스크는 1주일 이상의 장기휴가를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머스크의 첫 번째 아내였던 저스틴은 머스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저녁 7~8시나 되어야 귀가한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일론은 밤 11시에 집에 오는 데다가 그 이후에도 일을 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일론처럼 사생활을 희생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머스크 본인 또한 주당 80시간 근무가 필수적이라며 자신의 일중독 예찬을 당연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세상에 일하기 쉬운 곳은 많지만 1주일에 40시간 일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주당 80시간 이상 일해야 한다.”

 

그가 그저 부자 아버지를 두고 순탄한 길로 지금의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막연히 알고 있는 당신의 같잖은 질투가 어느 정도 현타를 맞고 있는가? 지금 그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준 테슬라는 설립 후 7년간 전혀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가 사비를 털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으로 자금을 충당하기도 했다.

 

‘팰컨1’가 실패를 거듭하던 2008년에는 세계 금융위기가 겹쳐서 자금 조달이 매우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스크는 테슬라 로드스터의 추가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으로 그 위기를 뛰어넘는다. 테슬라 모터스도 2007~2009년 사이 테슬라 로드스터의 생산 차질로 파산 직전까지 갔었다.


2008년 중순 스페이스 X 팰컨 1 4차 발사가 성공하면서 나사와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2012년 테슬라 로드스터를 성공적으로 출시한다. 이후 모델 S, X, 3 라인업의 출시가 성공하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 정국이 길어지면서 2년 만에도 자영업자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고 한다. 기존의 매출에서 반토막이 났네 뭐했네 한다. 힘들 것이다. 하지만, 7년간 수입이 없고, 현재까지도 수입이 없는 사업을 유지하며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일론 머스크는 땅을 파서 돈을 만든 자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환경보다 힘겨운 아버지와의 알력이 있었고, 불과 18살에 총을 잡기 싫다고 군대를 피해 외가가 있는 캐나다에 갔지만, 제대로 살 곳조차 없이 1년이나 막노동을 하며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신이라면, 과연 당신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캐나다의 대학에서부터 유펜으로 편입하여 와튼스쿨에 이어 스탠퍼드 대학의 박사과정까지 올라가는 일을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방의 대학을 다니며 등록금 때문에 24시간 편의점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알바를 한다고 당신의 삶이 바닥인생이라고 한탄만 하고 싶은가?

 

공부만 잘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확실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면 창업을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창업을 하고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여 거부가 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이 외고나 사관고를 나와 외국대학에 유학파여서 그런 일이 쉽고, 당신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알아봤는가? 도전해봤는가? 해보지도 않고서 당신이 무엇이 문제인지 뭘 안다고 입을 놀리는가? 하다못해 그러면 그들의 회사에 지원해서 그 곁에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회사를 성장시키는지라도 보고 익혔는가?

맞다. 당신은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도 않고, 그저 질시 어린 시선으로 입만 놀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고, 노력해볼 생각을 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갖춘 것이 없고, 금수저 부모를 만난 이들만 잘 나가는 사회라는 둥, 집을 도저히 살 수 없게 만들었다며 유튜브의 장사꾼들의 부화뇌동에 같이 놀아나며 정부를 욕하기만 한 것이다.


노력해보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당신의 청춘을 불살라보고 나서 이야기하라.


그렇다면 설사 실패하게 되더라도 그 실패를 통해 당신이 다음 도전에 무엇을 더 채워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달려야 할지가 명징해질 것이다.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는 것은, 여유가 넘쳐서 그러는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을 정도로 뛰는 것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라고 표현한다.

허세 넘치고 겉보기엔 SNS만 할 것 같은 저 세계 최고의 부자가 아직도 휴일 없이 매주 80시간 이상 일하고 공부한단다. 당신은 도대체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일하고 공부하나?


그것이 당신과 세계 최고의 부자간의 현재 간극이다.


누리고 싶다면 먼저 위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라.


올해의 마지막 날, 그를 당신에게 소개한 이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지사도 되기 전에 하반신 불구라는 판정을 받고 나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