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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3. 2022

천한 출신에, 평생을 제대로 알아주는 군주를 못 만나도

전 세계 배우는 자들의 스승으로, 성인(聖人)이라 일컬어지다.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상적인 결혼이 아닌 어머니가 16살에 야합(野合)으로 태어난 아들이었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 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딸 셋 중 막내딸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당시 숙량흘은 이미 70살이 넘은 나이였고, 안 씨는 16살이었기에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야합(野合)’이라 칭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갔다고 하여 이름을 ‘구(丘)’라 지었다. 그가 태어난 후 3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의 빈소를 거리에 차렸었다. 어느 나이 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겨우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季氏)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가 스무 살 되던 무렵, 계씨(季氏)가 선비들을 위한 잔치를 벌였다. 그 역시 참여하려고 했더니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쫓아내며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면박을 다.


이후 그는 발분망식(發憤忘食; 분발하여 끼니마저 잊고 노력한다)하여, 나이 34세가 되었을 때, 노나라의 대부 맹리자(孟釐子 : 삼환의 하나인 맹손씨)에게까지 인정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맹리자가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그는 맏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구(孔丘)는 聖人(은나라 탕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여공에게 양위한 분이다. 정고보(正考父)에 와서 여러 임금을 보좌함에 그 공손함이 지극하였다. 내가 듣자 하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세상을 맡아 다스리지는 못하나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는 나이가 젊고 예를 좋아하니 아마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당부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실제로 맹의자는 공자에게 예를 배웠다는 기록이 『논어』에 보인다.

중국 춘추시대 사상가이다. 주(周) 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정리하여 유학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이 예악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실현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실질적 유학의 창시자이자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공자(孔子; Confucius)의 이야기이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를 지냈고, 노나라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노나라의 당시 권세가였던 세 가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었고, 실각하게 된다.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실망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14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끝내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공자 나이 35세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을 하다가 다투어 후소백의 집터를 침략하여 집을 늘려 지었다. 평소에도 계평자는 못된 짓으로 노나라 대부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평소 집안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싫어했던 소공(昭公)도 가담하여 그를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쳤는데, 계평자는 맹 씨 숙손씨의 세 집안과 더불어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노나라에 난리가 나자 공자도 제나라에 가게 된다.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그를 통해서 경공과 연을 맺고자 하였다. 제나라 태사(太師)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들은 다음 배우려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자 제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랫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喪禮)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라고 안영을 칭찬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이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 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은 탓에 그대를 등용하지 못하겠다.”라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이전보다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마침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에 답답해하던 차였다. 그래서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라며 그에게 가려하였다.


이에 제자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불과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의 나이 56세에 재상의 일을 대리하게 된다. 그때,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사형에 처한다.

소정묘를 처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라며 계책을 도모하게 된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해지고 만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노나라를 떠나는 공자

그리고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子路)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노나라에서는 얼마의 녹봉을 받았는지를 묻고 그에 맞춰 그를 대우해주었다.


하지만, 얼마 뒤,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서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위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한다. 공자는 사양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결국 만남을 갖게 된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再拜)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자로(子路)가 괜한 소문을 만들어낸다며 화를 냈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 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衛靈公)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 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구나,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 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내가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公之魚)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면, 또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제자인 염구(冉求)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스승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식량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르는 이들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子路)가 성을 내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묻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라고 대답한다. 공자가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子路)를 불러 말하였다.


“시(詩經)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라 했는데, 우리의 道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한단 말이냐?”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子路)야, 어진 이는 필히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 백이·숙제가 있었겠으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子路)가 나오고 자공(子貢)이 들어가니 공자가 다시 똑같이 묻는다.


“자공(子貢)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자공(子貢)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수확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子貢)이 나가고 안연(顏淵)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다시 똑같이 묻는다.


“안연(顏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 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子貢)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그 억류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무려 14년 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가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굳이 구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子路)가 위나라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공자가 병이 깊어져 자공(子貢)이 스승을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子貢)아, 왜 이제야 오느냐?”하고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니라.”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애공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子貢)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 : 새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 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곡부시, 공자의 무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위 내용은 『사기』의 「공자세가」에 사마천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적 기록이라기보다는 숭앙하는 편집이 들어간 것을 감안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기 상의 기록과 크게 어긋남은 없다.

 

기원전 500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오십이 훌쩍 넘은 즈음,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써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돌이켜보건대,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조국을 떠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천하에 자신을 등용해줄 위정자 한 명을 만나지 못하고 14년 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악(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顏淵)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 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죽고 나서 영화가 무슨 소용이냐며 살아 있을 때 100층짜리 마천루 넓은 아파트에 살며, 제대로 대접받고 누리고 사는 것이 최고 아니냐고들 말한다. 다들 긍정하고 끄덕거린다.


사마천이 평가했던 공자의 삶은 반대였고, 사마천은 오히려 살면서 그렇게 영화를 누리던 이들이 죽고 나서 후세에 기억되지도 못하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 의미 없음을 탓한다.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살아서의 삶이 위대하지 못한 자가, 죽고 나서 갑자기 그의 삶을 인정받을 리가 없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을 적립하지 않지만, 죽고 나면 그의 삶은 후세에 의해, 역사에 의해 평가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이다. 공자의 삶을 이 시리즈가 시작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의 삶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운 뜨거운 것이 올라와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속했던 곳에서는 그의 재능과 도량을 시기하고 질시하는 이들의 견제와 음모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였고, 정작 다른 나라에서 등용이 될라치면 그로 인해 그 나라가 강하고 부강해질 것을 아는 기민한 자들의 견제에 의해 늘 실패를 거듭해야만 했다. 그의 가르침을 일부만 소화한 제자들마저 곳곳에서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살아생전에 모두에게 인정받는 큰 성현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도 힘겹고 가슴 아팠던 시기에 공자의 삶을 저술했던 사마천의 마음마저 전해져 온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이고, 무엇을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하면 될 것인지 모두가 보이는데도 등용해주는 군주가 없어 세상에 그 도를 펼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되는 그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삶을 평생 참아내며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도 인간인지라 죽는 일주일 전까지도 그 아픔과 그 울분을 붉은 선혈 쏟아내듯 꾸역꾸역 흘렸다.

 

그의 말씀이, 그의 가르침이,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의 삶을 한 점 한 점 오려내듯 기워져 당신에게 전달되고 있다.


당신의 노력이, 누군가의 질시와 그의 음모로 무시되거나 강탈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한 순간 말도 안 되는 거짓과 모함으로 부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견뎌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지금 바로 밝힐 수 없어, 피눈물이 쏟아져도 당신은 견뎌내야만 한다.

그것이 당신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버겁고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할퀴고 살점을 뜯어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당신은 견뎌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우뚝 서야 한다.

그것이 당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그것은 그저 부수적인 것이고 언제든 한방에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지킨 당신의 사랑, 당신의 신념, 당신의 삶은 결코 어떤 풍파에도 날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롯이 당신만의 삶이고, 살아있는 증거물로 당신을 증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겹기 그지없고 이미 늦어버린 것 같고, 결코 이뤄낼 수 없을 것 같아 힘들겠지만, 내가 장담하마. 이대로 끝이 아니다.

당신이 끝났다고 모두 포기해버리지 않는 한,

아직 남아 있다.

당신의 삶이 어둠을 뚫고, 심연의 바다에서 올라와 물보라를 일으키며

비상하게 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모습, 내 반드시 지켜보마.

절대 그대로 무릎 꿇지 마라.

이제 곧 비상(飛上)할 때가 도래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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