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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4. 2022

서른도 되기 전에 두 번이나 파산하고 나서도

전 세계를 대표하는 초콜릿 재벌로 존경받는 삶을 살아내다.

185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700년 초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해 온 스위스-독일계 가문으로, 메노파 기독교 집안이었다. 이 당시의 농촌 유소년들이 모두 그렇듯 역시 농가의 집안일과 농사를 도우면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큰 기회만 잡길 바라는 몽상가에 그저 사람 좋은 낙천주의자였다. 또 끈기까지 없던 사람이라 여러 지역에서 여러 사업들을 계속 시도했다. 과수원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고, 송어 양식과 야채 통조림 사업도 시도했다. 그러나 이 모든 훌륭해 보이던 사업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남편의 노력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아내마저도 그가 영구적인 운동기구를 발명하려 하자 마음을 접었다. 아내는 남편의 별난 행동이 줄곧 언짢았지만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그나마 반대조차 할 수 없었다. 남편은 늘 떠날 때보다 더한 빈털터리가 된 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그는 처가의 재산을 모두 날려먹을 때까지 허황된 꿈을 꾸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

그들 부부에게는 딸 세레나가 있었는데 네 살 나이에 성홍렬로 죽자, 부부의 꿈과 희망이 모두 어린 아들에게로 쏠렸다. 부부는 아들의 교육을 두고 툭하면 다퉜다. 아버지는 아들을 이 학교 저 학교로 끌고 다녔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한 곳에 정착해 농장 경영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남편과 별거를 선언하고 아내는 남편의 모든 책을 불태워버렸다.

 

학업을 숱하게 중단해야 했던 아들은 가장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정도만 배웠고 농장 운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밀턴이 사춘기에 이르렀을 즈음, 그의 부모는 아들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장사를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1871년 4학년만 마친 아들은 지역 인쇄공 샘 에른스트의 도제로 들어갔다.


에른스트는 독일어-영어 혼용 신문을 만드는 인쇄소를 운영했다. 하지만 아들은 인쇄공 일이 지겨웠다. 어느 날 기계에 모자를 떨어뜨려 고장 내는 실수를 했고 에른스트는 바로 그를 해고했다.

 

어머니가 별거를 선언하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진로를 고민하다가 어린 아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은 사탕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온 가족이 농장 작물을 시장에 내놓는 토요일만 되면 아들은 심부름으로 모은 돈을 한 군데다 몽땅 써버렸다. 그는 누가, 사우어 볼(새콤한 드롭스), 감초 캔디, 막대 사탕 같은 과자를 샀다.


이런 아들의 행동에 어머니는 아들을 사탕 만드는 법을 배우도록 아이스크림 팔러&가든(Icecream Parlour and Garden)을 운영하는 조 로이어(Joe Royer)에게 보낸다.

로이어 씨의 가게에 도착한 순간, 아들은 천직을 발견한 듯 눈이 반짝였다. 설탕과 향신료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것, 재료가 끓고 섞이는 과정, 액체가 특정한 온도에서 고체로 완전히 굳는 변화, 이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의 제과 사업가이자, 자선가. 세계적인 초콜릿 제조기업 허쉬사와 펜실베이니아주의 기업도시 허쉬를 세운 밀턴 스네이블리 허쉬(Milton Snavely Hershey)의 이야기이다.

 

이후 4년간 허쉬는 과자 제조법을 배웠다. 1876년 필라델피아로 간 허쉬는 거기서 제과사업을 시작했다. 노처녀인 이모가 가게를 차리라며 밀턴에게 150달러를 주었지만 그는 아버지만큼이나 돈을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가게를 시작한 그는 너무 많은 제품을 취급했다. 설탕에 절인 과일이나 말린 견과류 같은 기본적인 품목은 물론, 마름모꼴 드롭스 기침약과 프랜치 시크릿 등 다양한 종류의 과자를 팔던 그는 결국 빚쟁이를 피해 가지 못했다. 특히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수입 설탕 값을 제때 치르지 못했다. 5년이나 그렇게 질질 끌 듯 이어가던 사업은 파산 직전까지 갔고 밀턴은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는 많은 미국인이 한몫 잡기 위해 물밀 듯 서부로 몰려들었는데, 그의 아버지 헨리도 그들을 따라 서부로 갔다. 밀턴도 곧 아버지와 합류했다. 그런데 정작 금광을 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밀턴이었다. 밀턴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주로 고급 캐러멜을 만드는 제과 업자 밑에서 일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밀턴은 비법을 몰래 캐냈다. 덴버 제과 업자의 비법은 캐러멜에 신선한 우유를 더하는 것이었다. 대개 캐러멜은 파라핀을 넣어 제조하는데, 이렇게 하면 씹히는 맛을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었다. 우유는 캐러멜을 크림같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게 하면서 버터 맛도 나게 해 주었다. 밀턴은 서둘러 동부로 돌아가서 낮에는 어느 사탕 제조업자 밑에서 일하고 밤에는 그 캐러멜을 손수 만들었다.


어머니와 이모도 그와 합류했다. 그리고 남은 자금으로 또 한 번 사업을 벌였다. 젊은 밀턴에게 돈을 빌려줄 친척이 더는 없었기에 이번이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단지 남에 밑에서 일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이후 시카고, 뉴올리언스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났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1883년 뉴욕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두 번째 사업을 시작하는데 조금 잘 풀리나 싶었으나 3년 뒤 1886년 망하게 된다. 그렇게 사업 못하는 아버지의 자식인 점을 인증하는 듯했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두 번의 사업이 실패했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그의 시작하겠다고 랭커스터로 돌아온다. 하지만 친척들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나마 협조적이었던 그의 어머니조차도 그를 도와주기를 거부하고 밀턴을 집에서 내쫓았다.

그를 극적으로 도와줬던 이전 직원, 헨리

그렇게 낙심하며 거처하던 곳을 찾던 중, 1880년 고향사람이자 필라델피아 본인의 과자 가게에서 당시 직원으로 근무했던 헨리라는 사람을 찾아간다. 헨리는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나이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야망 있는 어린 사업가 밀턴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터라, 그에게 갈아입을 옷과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 그리고 밀턴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밀턴이 뉴욕에서 랭커스터로 부친 제조 기계들, 가구들의 배달비까지 모조리 대주는 도움을 준다.

그렇게 밀턴은 헨리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할 힘을 얻었고, 가족을 다시 설득하여 이모와 엄마를 이끌고 덴버에서 배웠던 캐러멜 만드는 기술을 활용해 공장 자리를 얻어 ‘Lancaster Caramel Company’라는 이름의 회사를 열어 ‘Crystal A’라는 캐러멜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밀턴은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제조법들로 캐러멜을 만들었고, 또한 캐러멜은 무더기로 팔아야 잘 팔린다는 것을 떠돌이 생활 중 알게 되어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어느 날 이름 모를 영국의 수입업자가 랭커스터를 방문했다가 허쉬의 캐러멜을 맛보고는 대만족 하여 영국으로 대량의 주문을 발주했다.

하지만 대량으로 제조하기에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Lancaster County National Bank’라는 지역 은행에 자금을 빌리러 간다. 하지만 과거 사업 실패의 경험이 있던 그라 신용등급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운이 좋았던 것인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은행원이 밀턴의 설명에게 감명을 받아 은행원 본인 이름으로 사업 자금을 대출받아 밀턴에게 주는 파격적인 배려를 해준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 영국 수출 건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수출을 계기로 그의 사업은 확장 일로에 들어서게 된다. 건물 한구석을 차지하던 그의 사업장이 건물 전체로 확장되었고, 1890년엔 그 건물을 통째로 사버리게 된다. 그렇게 랭커스터 캐러멜 사는 공장 2개에 노동자 1,300 명을 고용하는 중견기업이 되었다.


그가 있던 지역의 건물들을 통째로 하나씩 하나씩 매입해 나가기 시작하더니 무려 랭캐스터의 45000 스퀘어 피트, 총 1264.5평의 부지를 모두 매입하는 역사를 써 내려간다. 이제 랭캐스터가 좁다고 느낀 그는 필리델피아 주 밖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밀턴이 초콜릿에 비전을 갖게 된 것은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만국 콜롬비아 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1886년 세운 ‘랭커스터 캐러멜 컴퍼니(Lancaster Caramel Company)’로 이미 성공을 이룬 그는 박람회에 전시된 독일의 초콜릿 제조 기계에 매료됐고, 전시된 기계를 구매해 캐러멜을 위한 초콜릿 코팅을 처음 생산했다.

 

1894년 ‘허쉬 코코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는 허쉬 브랜드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밀턴은 1900년 경쟁사에 ‘랭커스터 캐러멜 컴퍼니’를 100만 달러에 팔고 본격적으로 초콜릿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다.

 

1900년 랭커스터 캐러멜사를 매각한 밀턴은 랭커스터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고향인 데리 면 근교의 농지를 구입했다. 하지만 그 공장을 짓기 3년 전, 밀턴은 한 가지 연구를 시작했었다. 그 연구는 ‘밀크 초콜릿’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밀크 초콜릿이 브랜드 ‘네슬레(Nestle)’가 있던 스위스에서만 유일하게 공급되어 값이 비싸 부유층들만이 즐길 수 있었다.


밀턴은 이 맛있는 밀크 초콜릿을 일반 사람들에게도 제공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밀크 초콜릿을 만드는 재료 중 신선한 우유를 대량으로 구하기가 쉬운 이점을 가진,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밀턴은 3년의 연구 끝에 우유, 설탕, 카카오를 사용해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밀크 초콜릿 제조 비율을 찾아냈다.

그렇게 1903년 3월 2일, 세계 최대의 초콜릿 공장을 짓겠다는 다짐으로 초콜릿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1905년 완공된 공장은 밀턴의 제조 비율에 맞춰 밀크 초콜릿 생산에 돌입했고 이렇게 밀크 초콜릿 바 'HERSHEY'S'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허쉬의 공장은 목장 한가운데 있었는데, 허쉬 본인이 주도하여 공장 주변으로 사택, 교회, 상가,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 초콜릿 공단은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오늘날의 ‘허쉬’라는 지명을 얻고 도시가 되었다.

밀턴의 허쉬 초콜릿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미국 전 지역에서 판매되는 최초의 밀크 초콜릿이 되었다. 밀턴의 초콜릿 사업 인기 비결은 ‘대량생산’에 있었다. 밀크 초콜릿의 생산 비용은 비싼 편이었지만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초대형 공장을 세우고 많은 양을 한 번에 제조했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가 가능해진 것이다.

 

허쉬는 1898년, 초콜릿 공장을 결정하기 직전, 캐서린 키티 스위니와 결혼했다. 하지만 부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밀턴 부부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자기 아이를 낳아 기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하여 1909년 신탁을 만들어 허쉬 공업학교를 세웠다.

착한 마음을 갖게 되면 하늘도 그를 돕는다고 했던가? 1912년, 허쉬 부부는 영국으로 유람선 여행을 예약했다. 그러나 허쉬에게 갑작스러운 사업상 용무가 생겨 여행을 취소하게 된다. 그 취소했던 배가 바로 ‘타이타닉호’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여행을 취소한 이유가 키티가 갑자기 아파서였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키티는 이 즈음 만성적으로 아팠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이유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타닉호의 불운을 피한 허쉬 부부는 독일 호화 여객선 SS 아메리카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허쉬 박물관에 가면 밀턴 허쉬가 타이타닉호의 1등칸을 예약하면서 화이트 스타 라인에 계산한 수표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수표는 현재 2009년 허시 박물관을 대체한 허쉬 스토리 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다.

1918년 밀턴은 회사 경영권을 포함한 자기 자산 대부분을 허쉬 학교 신탁기금에 넘겼다. 지금도 이 신탁회사는 허쉬 초콜릿의 주주로서 큰 지분을 차지하며 경영권을 쥐고 있다. 1951년 학교 이름이 밀턴 허쉬 학교로 개명되었다. ‘밀턴 허쉬 학교 신탁’은 허쉬 오락 휴양 회사(호텔 허시, 허시 파크 등의 모회사)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허시는 학교와 사업의 발전을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노동자들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밀턴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생활환경을 제공하면 노동자들이 더 훌륭하게 일한다는, 당시 미국에선 이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본가였다. 허시는 노동자들의 사택 및 편의시설로 만든 기업도시 ‘허쉬 마을’의 공동체를 가꾸는 것에 일생동안 열정적이었다. 1935년 밀턴은 자선재단인 M.S. 허쉬 재단을 설립해서 허쉬 마을의 주민들에게 교육과 문화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하지만 허쉬의 사내 복지정책은 어디까지나 자본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으로써 그 한계도 분명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요구하자 밀턴은 이를 불허했다. 허쉬 마을은 시장도, 자치기구도 없었고, 온정적 가부장인 밀턴 허시가 계몽 절대군주로 군림하는 소왕국이었다.

 

1937년 산별노조협의회(CIO)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 타사 초콜릿 공장과 동일한 노동시간, 근로계약서에 임금과 수당 명시 등의 조건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서자 밀턴은 자신이 그렇게 잘 해준 노동자들이 왜 그런 요구를 해오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600명이 공장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고, 밀턴 사장을 지지하는 다수 노동자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하여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밀턴은 공포에 질려 저택에 틀어박힌 채 모든 일처리를 변호사들에게 맡겼다.


다수 노동자들이 사측 편에 서면서 최초의 노조 결성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장기적으로 노조 결성이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쉬 노동자들은 CIO보다 온건한 미국노총(AFL) 소속 제과제빵 노동자 국제 조합에 가입했다.

레이션 D 초콜릿.

허쉬 초콜릿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바형 초콜릿을 납품했다. 이 바들을 일명 ‘레이션 D 바’라고 한다. 육군은 허시에게 레이션 D 바를 주문하면서 특이한 요구사항들을 달았다. 무게는 1-2 온스(28-57 그램)이어야 하고, 화씨 90도(섭씨 32도) 이상에서만 녹아야 하며, 병사들이 비상식량을 몰래 까먹지 않도록 불쾌한 맛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1~2년 뒤 레이션 D 바에 만족한 육군은 허시에 트로피컬 초콜릿 바라는 전투 초콜릿을 발주했다. 트로피컬 초콜릿 바는 레이션 D 바와 대동소이했으나 다만 맛이 조금 더 좋았다. 트로피컬 초콜릿 바는 이름 그대로 열대기후에서도 녹지 않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레이션 D 바와 트로피컬 초콜릿 바는 총 30억 개 이상 생산되어 전 세계의 미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다.

1939년이 되면 허쉬 공장은 하루에 100,000 개의 군용 초콜릿을 생산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군용 초콜릿을 1주일에 240만 개씩 찍어냈다. 군용 초콜릿 생산에 양과 질 모두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허쉬 초콜릿 사는 육해군 E급 생산상을 수상했다.

 

194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밀턴 허쉬는 이듬해인 1945년 10월 13일 폐렴으로 허쉬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였다.

 

그가 만약 욕심을 차리겠다고 했던 사업가뿐이었다면 그는 ‘슈가 대디’라는 별명으로 미국 국민들에게 존경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의 대지를 사서 세계 최대의 초콜릿 공장을 차리고 확장하여 마을 만들고 직원들을 위해 교회, 병원, 공원, 주택, 학교 등 일명 ‘허쉬 타운’을 만들겠다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실제로 그는 자식도 없이 자신이 번 재산의 전부를 그 사회를 위해 써달라며 재단에 100% 기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웠던 허쉬 산업학교는 지금은 ‘밀턴 허쉬 학교’로 이름을 변경하고 지금까지도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가장 부유한 학교’라 불리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14살까지밖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서른이 되기 전에 쫄딱 망하기를 두 번이나 거듭했다. 처음 자신이 빠져들었던 사탕가게의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캐러멜에서 그리고 다시 초콜릿으로 전설을 만들어냈다. 오늘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순간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도왔던 이들에게서 다시 도움을 받아 일어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거부(巨富)가 되고 나서도 언제나 직원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함께 가족처럼 챙겨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자신이 집도 없고,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던 젊은 날을 보냈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만이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정치에 나서 나라를 바꾸지 못하는 대신 자신이 세운 작은 초콜릿 나라에서는 직원들이 교육이나 다른 여타의 것들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실천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그가 1915년 츄잉껌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한 적이 있었다. 초콜릿으로 이미 시장을 선점했고, 탄탄대로의 사업 성공 가도를 가고 있던 중에 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것이었다. ‘허쉬 츄잉껌’은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점차 줄었고, 1921년 수입 제한으로 재료 조달도 어려워졌다. 결국 허쉬의 껌 사업은 1924년 중단됐다.


당신이라면 이 사업을 실패라고 부르는가?

이미 20대에 어마어마한 실패를 통해 바닥까지 가봤던 밀턴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허쉬 츄잉껌’의 실패는 ‘아이스 브레이커스’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됐다. ‘아이스 브레이커스’는 민트 캔디 시장 1위 자리를 다투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는 성공하지 않았을 때도 파산하고 실패했다고 좌절하고 그 일을 접지 않고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였고, 성공했을 때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역에 끊임없이 연구하고 도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얻은 재부(財富)를 자신의 꿈을 이뤄주는 직원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모두 환원하는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꿈꿨다.

 

당신이 언제 처음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내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언제고 실패를 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안다. 실패는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꿈을 향해 달리고 달리다가 쓰러질 수 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달리면서 이리저리 신경 쓰는 바보는 없다. 다만 쓰러졌을 때, 왜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연구하고 다시 똑같은 이유로 쓰러지지 않으면 될 뿐이다. 쓰러진 것일 뿐 결코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쓰러지지 않게 되고 훨씬 더 잘 뛰게 되었을 때, 당신의 눈에는 그저 달리는 것만 생각했을 때와는 달리 풍광이 들어오고 공기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안락하게 그저 그 상태를 누리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의 한계를 뚫고자 더 노력하고 다리에 힘을 주는가? 성공하고 나서의 상상을 벌써부터 꿈꾸라는 말이 아니다. 성공하기 전과 성공한 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밀턴 허쉬가 겪었을 그 실패와 성공은 하나의 동전에 보이던 양면이었고, 그는 두 가지 면이 하나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니,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되겠다.


그는 무작정 ‘열심히만’ 살지 않았다. 늘 ‘왜’라는 것에 주목했고, 자신이 왜 쓰러졌는지, 앞으로 쓰러지지 않고 더 빨리 힘차게 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신중하게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실패가 곧 당신을 찾아오게 될 성공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역시 당신이 현재의 실패를, 과거의 실패를 어떻게 당신의 삶에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밀턴 허쉬는 달콤한 초콜릿 안에 그의 비밀을 대놓고 당신에게 전하고 있다.

당신은 진정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자격을 갖추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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