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05. 2022

동생의 죽음과 함께 세상이 끝났다고 여겼지만

다시 일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그림에 담아내다.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친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봐왔던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추억에서 학습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주목받는 오페라 가수였다. 때문에 음악적은 열정과 재능 또한 그대로 물려받았다. 음악가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음에도 그가 작품을 통해 악성 베토벤을 기념하고자 했던 의도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부모의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집안은 상당히 유복한 편이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그는 1876년 14살이 되던 해,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배워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그가 미술을 응용 미술인 장식 회화의 분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은 훗날 다양한 실험적 작품세계를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특히 매료되었던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장르의 그림이었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으로 불리던 한스 마카르트의 역사화는 모호한 듯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어서 어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묘한 미술적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한스 마카르트<지그문트의 죽음>(1883년)

물론 그의 미술적 재능은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할만한 잠재력과 실질적 표현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1883년 그는 남동생 에른스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열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하게 된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이 당시의 주도적인 화풍은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이 대세였다. 이에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하는 것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이야기이다.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젊은 시절에는 사실적인 회화에도 능하였으나 점점 더 평면적이지만 장식적이고 구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화풍뿐만 아니라 대학 회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문제작들에서 특유의 반항적, 회의적 주제 의식을 보여줘 큰 비난과 함께 명성을 얻은 바 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면서, 클림트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그가 구축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 이전 전통과도 다르면서 훗날 미술과도 다른,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작가로 평가된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는 디테일을 구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작업을 인정받아, 그는 황제에게 특별격려 상인 황금 공로 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자신을 지지하고 동료로서 큰 힘이 되어주던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이 너무 강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큰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로서가 아닌, 예술가로서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만든 시련을 통한 사유의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우지 못했던 그는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파고들어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섬세하면서도 끝 모를 깊이를 갖추게 된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는 이전의 그와는 결별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클림트는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그가 의뢰받은 부분은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었다. (친구 마치는 별도로 ‘신학’을 의뢰받았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의학>(1900),<철학>(1900),<법학>(1903)

클림트가 그린 3점의 대학 회화는 화풍부터가 기존 건축물의 패널화와 달랐지만, 특히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 때문에 관계자들을 격분시켰다. 마치 인간이 우주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법학>)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 삼으며 그에게 너무 벅찬 주제라 비난하였고 특히 빈 대학교 교수진 87명은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까지 했지만, 교육부 장관 리터 폴 하르텔 박사와 같이 클림트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다.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철학>은 결국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입증해 주게 된다.

 

그러나 이 패널화는 끝내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고, 클림트는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하라는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았던 제작비는 전액 되돌려주고 ‘학부 회화’ 최종판을 자기 소유로 하였다. 하지만 훗날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하는 수난을 겪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세 작품을 찍은 흑백 사진은 아직 남아있다.

 

클림트는 자기 개성이 누구보다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들을 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미술 협회의 보수성에 반발하게 된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반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면서, 1896년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와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후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유겐트>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 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는 당시 황제까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그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이미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 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디자인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베토벤 프리즈>의 마지막 부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주제를 선정하였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예술적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白眉)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가 그동안 시도하고자 했던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정점을 보여준 극치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예술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를 표방하였다는 이유로, 이 작품은 관람객들의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얼어붙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만다.

 

빈 분리파로부터도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 빈 분리파와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나긴 했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분리파의 이념까지 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그가 독자적으로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 해나가게 된다.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가둘 철조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키스>(1907~1908),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그의 미술세계에 있어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하기 시작한다.

 

클림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무려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하고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부유했다.


심리학자들은 그의 그림을 통해 그가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전통적인 결혼을 통해 아기를 낳고 평범한 가정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 피터팬 신드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그것은 클림트의 전기작가들이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 했다고 짐작한 것과 맥락을 함께한다.

 

전술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에밀리 플뢰게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자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그의 사후에도 어떠한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이 당연히 플뢰게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에밀리 플뢰게>(1902)

오늘날 대중에게도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그저 볼에 입맞춤을 하는 정도의 그림이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자세히 본 이들은 알겠지만, 두 사람은 몸을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는 날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를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키스>는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닌, 클림트의 이상의 세계에서 상상을 통해 그려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야말로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디(에밀리 플뢰게의 애칭)를 찾는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와 관련된 비밀을 지켜주고자 노력했다. 플뢰게는 1952년 자신이 세상을 뜰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구스타프와의 추억을 평생 가슴에 안은 채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화가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는 그와 같은 해에 모두 눈을 감았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그가 표현했던 나체와 섹스 장면들이 줄곧 문제가 되면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힘겹게만 만들었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예술은 급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말 피크를 찍으며 이제는 세계적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한때는 그저 외설로 여겨졌던 그의 예술세계가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예술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의 그림은 처음 그려졌던 19세기 말의 그때부터 어디 하나 달라진 곳이 없었다. 20세기 말을 통과하며 똑같은 그림에 대해 그가 죽고서 50년이 지나서야 변화된 사람들의 인식이 그의 예술세계를 알아보게 된다. 그가 100년이나 시대를 앞서간 것일까?

 

그가 엄청난 재능이 있는 예술가였다는 점은 이미 그의 생전에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행복하기 그지없는 생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늘 돋보기를 가져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돋보기 반대편으로 보이는 당신의 삶과 어떤 점이 닮아있는지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던, 함께 일하던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어 방황했다. 그에게 동생이 차지하는 의미가 얼마나 컸는지 그 어느 누구도 가늠할 수 없지만, 그가 보인 방황만 보더라도 그가 받았을 충격과 무엇보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는지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그저 무너져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지했거나 그렇게 무너져버렸다면 그는 이 시리즈에서 내가 다룰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심약하기 그지없는 이는 다시 붓을 잡았고, 대작을 의뢰받아 자신의 심화된 정신세계로 완전히 달라진 예술세계를 통해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한다.

<유니트 1>(1901)

하지만, 그는 기존의 보수적인 이들에게 공격받는다. 그리고 다시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그 그림을 가져와버린다. 그리고 그가 칩거했던가? 아니다. 그는 그 썩어빠진 고인물들을 뒤집기로 하고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단체를 만들어 시대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또 한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현실적인 벽에 막혀 그 단체를 나와 오롯이 혼자가 되어 작품세계를 구축해야만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좌절하고 칩거하였던가? 아니다. 그는 그때부터 그의 대표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에 그닥 조예가 없는 당신이 보더라도, 그의 그림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느꼈을 것이다. 오늘 그의 삶을 모두 읽고 난 당신의 눈에는 그의 그림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세계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었고, 그는 좌절하여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그를 막아서는 파도를 향해 달겨들었다.

 

회사에서 당신을 태우는 직장상사? 동료들?

당신의 노력을 제대로 몰라주는 조직? 당신의 능력과 재능을 알아봐 주지 않고 아직도 중용해주지 않는 세상?


구스타프 클림프의 인생을 보고서 지금 당신이 넘어야 할 파도가 그가 부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던 파도보다 거품이 크다고, 파고(波高)의 규모가 더 거대하다고 느끼는가?


아니라면, 그의 힘겹고 지난했던 삶이, 그리고 그 파도들을 향해 소리치며 당당하게 달려들었던 그의 외침이, 그의 그림을 통해 들려온다면, 이제 당신이 달겨들 때이다.

 

거지 같고 엿같은 세상에게 당당히 외쳐라.

나는 결코 너의 그 어설픈 방해에 굴하지 않겠노라고.

너희들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그 정점에 올라서겠노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내 삶을 살아내겠다고.

얼마나 높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흰 거품을 몰고 오는 파도라 할지라도 그대로 달겨들어 뚫고 그 앞을 향해 가겠노라고.

 

운명? 팔자?

웃기지 말라고 해라.

당신이 하고자 한다면,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장을 보겠다고 달겨드는데, 버텨낼 운명이나 팔자 따위는 없다.


스스로를 믿어라.


당신도 당신을 믿지 못하면서, 대체 누구더러 당신을 믿어달라고 할 셈이냐?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도 되기 전에 두 번이나 파산하고 나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