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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6. 2022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을 모두 잃고서

인간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춤을 완성시키다.

18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큰 언니와 오빠들 다음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그녀가 태어나던 해, 아일랜드계 은행가이던 아버지가 운영하던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아버지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엄청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비난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저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기엔 조금 서운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는 은행이 파산하여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로 불렸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녀 역시 이런 아버지를 조금은 성가신 존재라고 여기면서도 자기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해 급격히 힘겨워진 가정형편으로 인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생활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글은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그녀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말하며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곤 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상당히 재능 있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버지 없이, 생계를 위해 끝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4명의 형제와 어머니는 언제나 시와 음악을 사랑하며 그 고난을 이겨나갔다. 그녀는 훗날 자신이 받았던 진정한 교육은 모두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정작 쓰레기였다고 과격한 발언을 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나체로 춤을 추곤 했었는데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자신보다 어린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바다의 파도를 묘사하는 춤 동작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그녀는 ‘나의 무용 학교’라고 불렀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그녀의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피아노 연주를 해주었다.

미국의 여류 무용가로,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무용을 시작, ‘자유 무용(Free Dance)’이라는 독특한 무용을 창시한 현대 무용의 시조로 불리는 전설, 안젤라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리스풍의 관의(寬衣)를 입고 맨발로 춤을 춘 것으로 유명했다.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 파리에서 처음 주목받게 된 이후,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부다페스트ㆍ베를린ㆍ피렌체 등지에서 각광받았다. 1904년 베를린에 무용 학교를 신설하고 1906년 무용단을 창설했고, 러시아를 방문하여 학교를 설립, 러시아 무용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무용에는 체계적인 기법이 없었고, 무용이라기보다는 묵극(默劇)에 가까웠다.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무용가로서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며 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되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너무도 지난한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그녀의 무용과 몸짓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로 인한 지옥 같은 궁핍한 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클럽에서 일주일에 몇십 달러는 벌기 위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춤을 추어야만 했고 실망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코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용기 있게 그 기회를 잡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오거스틴 달리가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이사도라는 그에게 만나 달라고 요청을 했고, 수차례 거절당한 이후 가까스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 말고는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깡마른 소녀에게 감동한 달리는 전격적으로 그녀를 스카우트하게 된다. 달리는 뉴욕에서 자신의 극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극단에 정식으로 입단하고 꿈에 그리던 뉴욕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극단의 극에서 이사도라가 맡았던 배역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한여름 밤의 꿈> 중에 등장하는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와 함께 등장하는 요정 역이었다. 비록 이사도라가 이후에 발레의 엄격한 형식에 대해 비난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달리의 극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통 발레에 아주 엄격하게 매진했고, 그 모든 테크닉을 제대로 습득했다.


이사도라는 극단의 순회공연에도 참여했는데, 달리의 런던 공연에도 자주 동행했다. 극단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녀의 생활이 풍족해진 것은 아니었다. 입단 1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주급 25달러로 자신과 어머니의 생계를 꾸려가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시절을 견뎌냈고, 그녀는 미국 최고의 극단에서 장래의 스타로 밀고 있는 미래가 촉망되는 발레이나 겸 연기자였다.

결국 달리의 극단과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극단을 나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뉴욕에 계속 머물렀는데, 그러던 중 우연히 저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에델버트 네빈을 만나게 된다. 그 둘은 의기투합하여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네빈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이사도라가 춤을 추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게 된다. 뉴욕의 비평가들은 이 새로운 형식에 크게 주목했고, 관중들의 호응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입이 크게 들어오지는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때 이사도라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짐은 모두 불타버리고 만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그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을 실행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유럽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하는 다소 기행을 벌일 정도로 푹 빠져 지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웃으며 떠들었다고 전한다.

그리스 말고도 그녀가 푹 빠져 지냈던 것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랑하게 된 니체, 베토벤, 쇼팽, 로댕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뭔가 제대로 입기 전에 대강 걸치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00년, 파리에서 조각과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게 되는데,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렸을 때 로댕은 특별 전시관을 짓고 무려 168점의 조각과 데생과 사진작품을 전시했다. 그녀는 이 전시회에서 로댕의 <빠삐용>이라는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인체의 움직임에 관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사도라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로댕의 작품을 마주하고서 진정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로댕 역시 이사도라와 춤을 접하며 전율을 느꼈고 갑갑한 발레복에 갇힌 무용수의 무용이 아닌 자유로운 아름다운 인체의 움직임을 보며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받게 된다. 로댕과 이사도라 던컨은 비롱관에서 함께 머문 적도 있었는데,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비롱관에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부부, 장 콕토, 화가 마티스도 함께 머물렀다.

로댕이 스케치한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의 성공은 파리에서가 아니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시작을 알렸고, 주로 좁은 장소에서 수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춤을 공연했다. 그런데 부다페스트의 공연 기획자였던 알렉산더 그로스는 이사도라에게 오페라 극장에서 정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많은 관중들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고 위해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일반 대중이 자신의 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려했던 이사도라의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 모였던 관객들은 이사도라의 춤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첫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무대에서 그녀가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에 맞춰 왈츠를 추자 광란의 상태까지 연출되며 관객들이 지르는 환호성으로 극장 지붕이 터져나갈 듯했다. 이사도라는 그 환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맨발로 왈츠를 추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그녀는 헝가리 출신의 연극배우와 첫사랑을 시작한다. 이 당시만 해도 이사도라는 대단히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전형적인 아일랜드계 여성이었다. 그녀는 무용을 계속할 것인가 무용을 포기하고 그와 결혼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사랑을 버리고 그와 결별하고서는 그 상실감에 몇 날 며칠을 심하게 앓아 눕니다. 이별의 아픔을 털고 일어난 이사도라는 살인적인 공연 일정을 잡고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유럽 연극계의 거물이던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Paris Singer)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이 아이들은 이사도라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이사도라는 두 아이 데어도르와 패트릭, 그리고 보모와 함께 운전사가 운전하는 르노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베르사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마침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엔진이 꺼졌고 운전사가 차 밖으로 나와 다시 엔진을 걸자 차는 갑자기 강둑의 경사면 아래로 질주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뒤였고, 아이들은 보모에게 매달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로 파리 시민들은 미친 듯이 아이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센 강변을 뛰어다니는 이사도라를 몇 번이고 목격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죽은 뒤 1914년 이사도라는 러시아로 떠났다. 그곳에는 그녀를 기다리던 ‘예세닌’이란 천재 시인이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대단한 천재일 뿐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처음 보고 이렇게 느꼈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아마 너는 그 공통점을 모르겠지?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이사도라가 예세닌을 통해 본 것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었다.

예세닌과 함께

이사도라의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작은 키에 가냘픈 체구, 눈부신 금발의 예세닌과 춤을 추기엔 너무나 살이 쪄버린 깊고 슬픈 눈빛의 이사도라는 무려 열여덟 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혼인신고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예세닌은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난동을 피웠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는데, 이사도라는 푸른색 정장에 심홍색 넥타이, 흰색 부츠를 신은 예세닌을 옆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금발의 천사가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한 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예세닌과의 삶은 추함 그 자체였다.

예세닌과 함께 떠난 미국 순회공연은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녀의 종말을 더욱 재촉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잘 있거라, 벗이여’란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손목을 그어버린 예세닌의 자살 이후 이사도라는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좌우명을 ‘무한하게’로 바꿨다. 이 말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나 이제는 술 한 병 살 수 없는 가난뱅이 전직 무용수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만은 거부하겠다는 그녀만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가겠다며 이탈리아 청년 베노아 팔체토가 프랑스제 신형 스포츠카 아밀카르를 몰고 그녀와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던 어느 저녁, 2미터가 넘는 붉은색의 긴 스카프를 목에 두른 이사도라는 차가 출발할 때 그 스카프가 뒷바퀴 살에 낀 것을 모르고 액셀을 밟은 탓에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만다. 당시 그녀의 나이 불과 49살이었다.

그녀가 친구 이반과 메리에게 차가 달리기 전 한 인사는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다.

“안녕, 여러분. 전 영광을 향해 갑니다.(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

 

정작 그녀의 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가 되새겨진 것은 1977년 이사도라 던컨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르마 던컨의 제자 실비아 골드가 주죽이 된 던컨 댄서 그룹이 이사도라의 안무를 그대로 재현하는 합동 공연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젊은 날에는 리허설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고 나타나고,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돈이라면 극심한 가난이 예상되더라도 당당히 거부했으며, 자연스러운 신체 동작을 숭배했고, 예술 세계가 잃어버린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관습에 도전했으며, 소리와 빛처럼 만질 수 없는 자유스러운 춤을 추었던 이사도라의 명예는 추문과 비극에도 결코 손상될 수 없었다. 이사도라가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춤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예술 욕구를 몸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닌 예술이다. 그녀는 그 어떤 형태나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현대무용이 갖는 본연의 모습을 스승도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익혀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정작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유럽과 러시아에서 인정받았고, 무용학교를 세워 그녀만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현대무용의 기틀을 잡았다. 늘 가난했고 어려웠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어 힘들었지만 그녀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면 그만이라며 낙천적으로 기회를 기다렸고, 만들었고, 이겨냈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고, 무용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다가 사랑을 버리고 무용을 택하고,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사고로 죽는 슬픔을 겪고서도 끊임없이 살아냈다. 그 시련을 견디지 못해,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을 소홀히 하여 몸이 급격히 불어나고 무용을 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지만, 결국 그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당신에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라거나 당신이 지금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음에도 그녀가 참고 견디지 않았느냐는 뻔한 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사람을 살았을 뿐이다. 그녀가 자신의 사람을 대단히 곡절이 있고,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 자신의 삶을 살아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부러워하는 그 누군가의 삶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누구에게나 어느 집에나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힘겨움이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당신만 불행하고 당신만 실패하는 것 같고, 당신에게만 자꾸 이런 일이 생긴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나마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큰 여행가방에 모든 살림을 넣어 다니던 그녀가 미국의 호텔에서 모든 짐이 불타버렸을 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미국이 아닌 유럽으로 진출하라는 신의 계시이고 기회로 받아들인 것은, 그녀가 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내 언젠가는 유럽으로 가서 자신의 춤을 이해하는 이들을 만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밑그림을 그렸고, 불행이라면 불행일 수 있는 호텔 화제를 자신의 운명적인 전환 포인트로 결정하고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당신이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당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설사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난과 아픔이 닥쳐오더라도 당신은 그다음을 또 생각하고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란 말이다.


춤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슬프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이 아무리 감정을 표현한답시고 몸을 움직이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철학을, 그리고 그리스의 정신을 맨발로 맨몸으로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당신은 그 무엇으로 당신의 꿈과 당신의 이상을 드러낼 것인가?

당신에게도 당신의 꿈과 이상을 이뤄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던가?


이제까지 살아온 당신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당신은 결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며, 당신의 지난한 삶들은 당신이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완성된 꿈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였고 노력이었음을 세상이 알아주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결코 멈추거나 주저앉지 마라.


봐야 할 것 아닌가?

당신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세상이 결국 어떻게 인정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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