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07. 2022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던 소년가장이었으나

진경 시대의 진정한 우리 고유의 진경산수화 시대를 열다.

1676년(숙종 2)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유란동은 서울의 경복궁 뒤쪽, 백악산 아래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도 백악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멀리 한강변의 경치까지 보이며 서울 중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선조들은 본래 고려 말부터 전라도 광주목과 나주목에 세거하던 사족(士族) 집안이었는데, 그 뒤 경기도 광주부를 거쳐 그의 고조부 정연(鄭演) 대에 이르러 상경하여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정착하면서 여러 명문가와 교류하고 혼맥을 맺어 노론계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증조부 대부터 한미해져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이 이미 몰락해 있었고, 그가 14세 되던 1689년에는 아버지 또한 별세했으며, 그해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여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외가인 밀양 박 씨 집안의 도움으로 서울에 머무를 수는 있었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하던 형편에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웠던 그는 일찍부터 화가로서의 삶을 모색하였다.

 

그래도 양반 집안이어서 어릴 적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네에서 만난 것이 먼저인지, 김창흡 문하에서 만난 것인지는 정확한 고증은 없으나, 그의 평생지기 이병연(李秉淵)도 함께 김창흡의 제자로 동문수학하였다. 


이 둘의 브로맨스는 당시에도 이후에도 상당히 유명했다. ‘시의 사천, 그림의 겸재’라고 말이 당시 유행할 정도로 둘의 글솜씨와 그림솜씨는 당대 제일로 일컬어졌다. 그 둘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노년에 병을 앓고 있던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려낸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이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년,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 고유 화풍(畵風)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겸재(謙齋) 정선(鄭歚)의 이야기이다. 진경(眞景) 시대라고 하여,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眞景) 문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던 시기로,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眞景) 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로 꼽힌다.

 

특히, 정선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개발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대표작인 금강산 그림, <금강전도>를 그릴 때 사용한 빽빽한 구도와 힘찬 수직준,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에 사용한 짙은 묵법인 쇄찰준 등이 그가 창조한 그만의 화법이다. 이후 정선의 그 정신과 화풍은 다른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풍속화로 유명한 화가 김홍도(金弘道)가 금강산을 그리고 싶다며 선배 화가인 김응환(金應煥)에게 어떻게 그려야 할지 조언을 구하자, 김응환은 그 자리에서 정선의 <금강전도>를 본떠 그려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김응환,<금강산도>,1772년.

가난했기에 과거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던 정선은 김창흡의 후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생업으로 삼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서 이해할 것은, 그는 생업 화가가 아니라 엄연한 선비화가였다는 것이다. 


생업 화가는 이른바 ‘환쟁이’라고 하는 그림만을 그려 생업을 이어나가 소속도 도화서 등에 속해 있던 이들을 말하는 것이고, 선비 화가라는 것은 양반 가문의 선비로서 그림을 메인으로 그린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데, 아무리 정선이 가난했다고 하지만, 생업 화가들과는 구분되어 그의 생계에 그가 그린 그림이 도움이 되었는데, 그림을 전문적으로 판 것이 아닌, 주변의 유명 사대가들이 그의 그림을 비싼 값에 샀고, 실제로 금방 유명해져 워낙 그림을 청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계속 과거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도 초창기에는 과거를 치렀고, 음덕이긴 하지만 벼슬을 얻게 되고, 이후 유명해진 다음에는 영조가 태자 시절에 그림 선생님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르며 말년에는 음덕으로 올라갈 수 없을 정도라도 일컬어지는 종 2품 벼슬까지 하사 받게 된다. 정선과 평생 가까이 지낸 이웃이며 그 자신이 선비화가로서 정선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였던 조영석(趙榮祏)은 정선이 화가로서 이름이 너무 높아져서 그의 학문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평하였다. 사실 정선은 학문에도 일가를 이룬 선비였다. 정선은 깊은 학문을 토대로 형성된 높고도 진취적인 식견을 기반으로 남의 뒤를 따라가는 평범한 화가가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갔다.

또 한 가지, 조선시대 내내 그렇기도 했지만, 당시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이 당파와 유관하다는 점도 그의 화풍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지방에서 관리로 근무하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백악산과 인왕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살았다. 18세기 즈음 백악산과 인왕산 주변에는 당시의 정권과 학문, 문화를 주도하던 명문거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었다. 18세기에는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 등이 서로 고유한 학풍과 사상을 형성하며 조선의 사상과 학문,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노론은 성리학의 정통성을 가장 굳게 지켜나갔는데, 노론은 다시 내부적으로 낙론과 호론으로 나뉘었다. 


정선은 특히 낙론계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낙론은 경향 지역에서 대대로 살던 노론 일파들로서 영남 지역에서 살던 보수적인 호론과 달리 청과 서양의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다 현실적인 사상과 문예론을 제기하는 진취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정선의 평생지기이며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 이병연(李秉淵)도 낙론계 인사였고, 정선의 그림에 제발(題跋;작품의 처음과 끝에 적는 글)을 쓰고 작품성을 인정해주었던 김창흡과 김창협 등도 낙론을 대표하던 안동 김 씨 집안의 선비들이었다. 


정선은 여러 문인들에 의하여 추앙을 받았다. 당시 노론계 석학이었던 권상하(權尙夏)의 조카인 권섭(權燮)은 정선보다 연장자이면서도 정선의 그림을 스스로 모방하였고, 손자에게 정선의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정선이 새로운 문인화를 추구하고, 조선의 실재하는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배경에는 정선을 후원한 세련된 경화사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선은 18세기 선비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들을 자주 그렸다. 문인들의 모임이나 계 모임, 전별연(작별하는 이를 위해 베푸는 잔치)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회방연도>, <의금부도>, <육상묘도>,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등은 생활풍속을 담은 그림들이다. 그중 <서교전의도>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가는 일행을 보내며 베풀어진 전별연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전별연은 조선 초 이래로 꾸준히 이어지던 선비 전통이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전별연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영은문 주변에서 벌어졌다.(서대문에 있던 영은문은 현재 헐렸고, 그 자리에 대신 독립문이 서 있다.)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1731년.

그런데 이 작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이별과 전송을 기록한 기념사진 같은 그림이 아니고, 영은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이다. 정선은 이 성대한 모임에 참가한 인물들을 기록하는 대신 평화롭고 빼어난 경치를 담아내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경치를 똑같이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 때로는 철학적, 문화적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이는 18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그림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17세기까지 선비와 화가들은 현실보다는 명분을 중시하고 사실보다는 관념을 선호하였다. 그 결과 문예면에서도 비현실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유행하여 현재의 것[今]보다는 과거의 것[古]을 가치 있게 여겼고 관념적, 상상적인 산수화와 상징적인 사군자화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세상은 급속히 변화하여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는 문화적 강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서양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게 하였다. 더 이상 성리학의 명분론에 갇힌 시야와 인식으로는 변화된 세계와는 이별을 고한 것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실천해 보이기라도 하듯, 정선은 평생 동안 조선 산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발로 밟아가며 돌아보는 현장답사, 또 현장에서 그린 밑그림을 토대로 하여 진경산수화를 완성해나갔다.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고 실재하는 경치와 의미 깊은 사건 및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한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자 조선 후기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선은 18세기 조선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정신과 문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개척자였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뿐 아니라 관념산수화와 고사인물화도 그렸다. 관념산수화는 실재하는 경치가 아니라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상상의 경치를 그린 작품들이다. 고사인물화는 역사나 경전, 문학작품에서 유래된 인물들의 행적을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정선은 『귀거래사 도화첩(歸去來辭圖畵帖)』, 『사공시화첩(司空詩畫帖)』, <취성도(聚星圖)> 등의 많은 작품에서 고사를 주제로 삼아 글이나 사건의 내용, 또는 관련된 인물들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정선이 그린 관념산수화와 고사인물화는 진경산수화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관념산수화와 고사인물화를 그릴 때 정선은 대개 18세기에 유행한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남종화풍은 본래 중국에서 형성된 문인화풍에 기반을 둔 화풍으로 이 시기에 중국 작품들과 여러 화보, 각종 판화가 수입되면서 화단의 주된 경향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청나라와의 교류가 점차 심화되면서 조선사회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북벌론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번성한 청조의 문물과 서양에 대한 관심과 필요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틀에서 벗어나 서양을 포함하여 확대된 세계를 만나게 된 진취적인 선비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가 진경산수화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해서 중국의 전통화였던 그림에 서툴거나 아예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물론 아니다.

 

『사계산수도첩(四季山水圖帖)』

44세 때 그린 이 작품을 통하여 정선은 중국 회화와 여러 화보를 따라 그리면서 남종 문인화풍을 배웠고,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형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중국 그림에 대한 공부는 중국에서 가져온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익히는 것을 정론으로 여겼다. 이렇듯 정선이 진경산수화에서 나타낸 대상들은 우리나라에 실재한 경치이지만, 그것을 그리는 데 사용한 주요 기법들은 중국의 남종(南宗) 화풍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당대의 수장가이자 감식가로서 정선을 높게 평가한 이하곤(李夏坤)은 정선이 1712년에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대해 평하면서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심주(沈周) 등 원말명초에 중국 문인화를 정립한 대가들과 비교하였고, 때로는 정선의 개성적인 화풍이 한국 산수의 훌륭하고 멋스러운 경치를 잘 표현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점 때문에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그동안 강조되어온 것처럼 ‘조선 중화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하여 맺어진 열매라고 보는 것은 비뚤어진 한쪽의 시각으로만 그의 그림을 오해하는 오독이고 오류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그는 18세기의 새로운 국제적ㆍ사회적 배경에서 형성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현실 지향적인 문예관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변화가 회화 분야에서 새로운 주제와 화풍을 모색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선은 그때까지 그려지던 낡은 그림을 버리고 18세기 조선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을 담기 위하여 새로운 그림을 찾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17세기까지 상상과 관념의 세계를 즐겨 그리던 화습을 떨쳐버리고 눈앞에 실재하는 조선의 산천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를 제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 결과 정선은 “조선의 산수화는 정선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였다”는 평을 받는 등 이례적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고, 또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해주어정도>

정선은 평생 겸재(謙齋)라는 호를 애용하였다. 겸재(謙齋)란 ‘매우 겸손한 선비’라는 의미를 가진 호로 정선이 평생 동안 즐겨 읽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이다.

 

노론계의 배경을 가진 정선 자신은 천기론을 기반으로 진경산수화를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정선은 자연을 직접 대하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흥취를 경험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명승을 찾아 평생 수없이 여행하였다. 정선은 평생 쓰다 버린 붓을 모으면 붓 무덤을 이룰 것이라는 말이 전해질만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없이 사생하고 연구하면서 정선은 자신만의 화풍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를 논함에 있어 금강산의 그림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풍광 좋은 곳 중에서도 가장 자주 갔고, 또 그로 인해 가장 뛰어난 평판을 얻은 그림의 배경이 바로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이하고 신비로운 경치라고 이름이 났다.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성지로서 금강산의 명성은 부정되곤 하였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금강산의 명성은 꾸준히 이어졌다.


18세기 즈음에는 금강산에 한번 다녀오지 못한 이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금강산에 한번 가본 사람들은 금강산 여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또 가보지 못한 이들은 금강산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금강산 그림을 가지고 싶어 했다.

 

정선은 36세 때인 1711년과 37세 때인 1712년, 72세 때인 1747년을 포함하여 평생 세 번 이상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여행하였다. 정선은 금강산의 현지에서 많은 사생을 하였고 평생 이 밑그림을 토대로 금강산을 그렸다. 1712년 정선은 친구이며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병연과 금강산에 들어갔다. 


금강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이 잘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정선이 이병연의 붓을 빼앗아 단숨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비로봉을 그려내더니 얼른 붓을 던지고 다시 산행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처럼 정선은 진경을 만나면 즉흥적인 감흥과 인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현장을 여행하고 진경을 만난 이유였다.

 

정선은 자신이 발로 밟고 눈으로 보았던 금강산의 경물들을 하나하나 그리기 시작하였을 때 참으로 큰 고뇌를 느꼈다. 그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수많은 선배 문인들이 글로 읊어댄 천하의 명산을 어찌 그려낼까 하는 숙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선은 36세 때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여행한 뒤 『풍악도첩(楓嶽圖帖)』을 제작하였다. 이 화첩에는 모두 13개의 장면이 담겨 있는데, 정선의 초기 화풍을 대표하는 풋풋한 솜씨가 잘 드러나 있다.

『풍악도첩(楓嶽圖帖)』중

그 가운데 장안사 장면에서 정선은 금강산의 입구에 자리한 장안사의 수려한 풍광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고운 필묘와 은은한 채색을 사용하여 품위 있고 신비로운 경치로 표현하였다. 실경의 모습은 때로는 똑같이, 때로는 적당히 변형시켜 재구성하였다. 이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실경을 묘사하는 것보다 현장을 대면하였을 때 느낀 화가의 감흥과 진경의 분위기를 화가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대상과 화가의 일체됨을 표현하고자 한 천기론적인 예술관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장안사도(長安寺圖)>, 『풍악도첩(楓嶽圖帖)』 중 1711년

정선이 36세 때 최초로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풍악도첩』에 실려 있다. 금강내산의 초입에 있는 금강산의 3대 거찰 중 하나인 장안사와 그 주변 경치를 그린 작품이다. 흙 산과 바위 봉우리, 시내와 돌, 전각과 둥근 다리 등이 각기 음양동정(陰陽動靜)의 이치를 나타내면서 정선이 구사한 초년기 화풍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다음 해인 1712년, 37세가 된 정선은 다시 한번 금강산과 그 주변의 뛰어난 경치를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즉 ‘바다와 산의 초상화’라는 제목을 가진 화첩을 제작하였다. 이 화첩에는 모두 30점 정도의 작품이 실려 있었는데, 정선의 스승과 선배, 친구들인 김창흡, 이병연, 이하곤, 조귀명 등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 각 장면의 경치를 기리는 시를 짓고, 멋진 글씨를 써넣어 시서화 삼절을 이룬 대작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747년(72세)에 다시 한번 같은 이름의 화첩이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다행스럽게도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21면의 그림과 50면의 글씨로 이루어진 시서화첩으로 이제 조선화단을 대표하는 거장이 된 정선의 개성이 한껏 발휘된 수작이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그린 『해악전신첩』을 토대로 제작된 듯이 보이지만 그 화풍만큼은 정선이 정립한 진경산수화의 정수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금강전도(金剛全圖)>,1734년, 국립중앙박물관.

1734년 59세 때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 정선은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된 금강산의 진경을 표현하여 진경산수화의 한 정점을 이룩하였다. 이 그림은 우선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그 마력과도 같은 힘의 근원은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한 화면에 꽉 채워 담아낸 구성에서 나온다. 이는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는 밀밀지법을 대표하는 방식으로 마치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를 단번에 느끼게 한다.

 

화면의 오른쪽에 나타나는 하얀 봉우리들은 금강산을 대변하는 일만 이천봉으로 수직선을 반복적으로 힘차게 내리그어 표현하였다. 화면의 왼쪽에는 둥글고 부드러운 흙 산이 나타나는데, 먹을 짙거나 옅게 사용하고 부드럽게 점을 찍어 그려 수직의 바위 봉우리들과 교묘하게 대비되고 있다. 이로써 금강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적인 상징처를, 또 음양이 조화를 이루며 화ㆍ수ㆍ목ㆍ금ㆍ토의 오행(五行)이 서로 생겨나는 시원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년,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은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자 두 개의 안경을 포개어 쓰고 그림을 계속 그렸는데, 왕성한 필력과 웅장한 기세가 여전하였다. 정선이 일군 진경산수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의 중요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관직을 역임한 어엿한 선비였지만 평생 붓을 놓은 적이 없었고, 이 때문에 천한 그림으로 이름을 얻어 출세하였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편견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선은 늘 화가로서 살아갔다.

 

76세 때 그린 <인왕제색도>는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긴 세월과 인고를 다 품어낸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그렸다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응축된 정기와 강인함이 충만하게 표현되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단단하고 묵직한 화강암 덩어리는 검고 윤기 나는 먹을 겹겹이 칠하고, 붓을 힘차게 죽죽 그어내려 남성적인 기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산은 강인하기만 하여 사람을 짓누르는 산이 아니다. 산 중턱에는 하얀 연기구름에 감싸인, 사람이 깃들일 만한 정자가 한 채 있어 부드러운 시적 정취를 돋우고 있다. 


이 진경산수화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담아낸 삶의 현장이면서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산수와 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을 함께 표현하여 역사와 존재의 영원성과 보편성, 낙관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그림은 평생지기 이병연의 쾌유를 바라며 그린 그림이다.

 


다 망해 생계를 걱정해야 할 선비, 14살에 가정을 짊어졌어야 할 그의 힘겨움은 그저 생계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보다도, 선비라는 자존감을 놓지 않으면서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가야 한다는 괴리감에서 훨씬 더 크고 무거웠을 것이다.

 

신분제도 아닌 지금도, 내가 있던 자리에서 혹은 아버지대에 있던 자리에서 나 혼자 괴리되어 갑자기 추락했을 때, 이전 같은 그룹에 있던 이들과 교유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부모가 잘 살다가 갑자기 이혼했거나 사업이 부도가 나면 전과 달라진 상황에 견디지 못한 그 집 자녀는 원래 잘 지내던 친구들의 그룹에서도 스스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한다. 내가 잘 나갈 때는 바빠서도 굳이 챙겨나가지 않던 동창회에 망하고 내 신세가 변변찮게 되면 오히려 그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친구들을 마주칠까 봐 꺼려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을 정선의 마음을 그려보라. 아무리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준다고 한들, 결국 잘 나가는 친구들이 그림을 사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정식 과거를 통해 승승장구하는 친구들 틈에서 음적으로 고작 한 고을의 현감직이나 명예직 벼슬을 유지하며 반쪽 양반을 하는 것이 그의 작품, 어느 한 구석에라도 드러나던가?

 

그는 그것을 그림으로 극복했다. 잘 그리고 팔아야 하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울분 울적함 자괴감을 붓을 들어 잊었다. 그리고 심지어 모두가 베껴 그리며 따라야 한다던 중국 문인화에서 벗어나 우리 자연을 그리고 자신만의 기법으로 표현해내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고 우리 고유의 풍경을 우리 고유의 정서로 풀어내는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그들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며칠이나 힘들어하는 일반인들의 심리에 비해, 정선은 그들과 교유하고 그들에게 그림을 팔고,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림 세계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그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까지도 그림을 놓지 않고 오히려 완숙한 정점의 진경산수화를 그려냈던 것은 앞서 그림을 통해 충분히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자존심을 굽히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아니, 혹 내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으로 인해 상황이 환경이 여의치 못하게 흘러간다 하더라도 그것에 자신을 꺾고 죽이며 지내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당신은 묵묵히 다시 당신의 삶을 일으켜 세우면 된다. 그렇게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통해 당신만 배우고 당신만 깨닫고 당신만 갖춘 무언가를 당신은 분명히 얻었고, 그것을 체득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당신만의 성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기를 하나 더 얻은 것이다. 노력하여 만회할 수 있는데 지금 당신이 고개를 숙여 주눅 들 이유가 무엇이 있느냔 말이다. 당신만 당신 자신에게 떳떳하고 당신을 믿는다면 고개를 들고 당당히 내일을 보라고 그들에게 말해줘라.


오늘보다 더 빛날 당신의 내일을 위해, 

절대 당신의 꿈을, 희망을 사그라뜨리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을 모두 잃고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