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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0. 2022

조신하지 못한 바람둥이에 도박중독이었지만

컴퓨터가 나오기도 전에 등장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다.

1817년, 저명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외동딸로 영국에서 출생하였다. 바이런에게는 혼외관계를 통해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있었지만,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출생한 법적 자녀는 그녀가 유일하다.

 

바이런은 이복누이인 어거스타 리(Augusta Leigh)와의 근친상간 불륜설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불식하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는 설도 있다. 바이런은 아내가 임신하자 대를 이어 작위를 계승할 ‘영예로운 소년(the glorious boy)’을 낳아주길 바랐지만, 딸이 태어나자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바이런은 딸을 이복누이의 이름에서 어거스타(Augusta)라고 이름 짓고, ‘에이다’라고 불렀다.

 

그녀가 태어나고 나서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버지 바이런은 그녀의 어머니 앤 이사벨라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그녀와 함께 친정으로 쫓아내 버린다. 당시 영국법은 부모의 이혼에 있어 아버지에게 전적인 양육권을 부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바이런은 친권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고 석 달이 지난 후에는, 영원히 영국을 떠나버렸다. 이것은 앤 이사벨라가 평생에 걸쳐 전남편인 바이런의 부도덕한 행실을 성토하게 만들었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어린 그녀는 빅토리아 사회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영국을 떠난 바이런은 딸에 관련한 그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리스에서 질병으로 객사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 병약했고, 자주 아팠다. 8살 때는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할 정도의 두통을 앓았고, 14살 때는 홍역에 걸려 병상에서만 지내다가 16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병치레가 잦았다.

4세 당시

어머니, 앤 이사벨라는 딸의 양육을 할머니에게만 맡기는 등 아이에게 소홀하였음에도 이혼한 여성에 대해 관대하진 못한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여 대외적으로는 모성이 가득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딸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고는 어머니로서 성실하다는 것을 증거로 삼기 위해 딸에게 그 편지를 잘 보관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10대 시절의 그녀에게서 ‘도덕적인 일탈’에 해당하는 징후들을 포착하였다고 얘기하였지만, 그녀는 훗날 어머니의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과장된 얘기를 지어내곤 했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18살이 되던 해, 그녀는 가정교사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려다가 발각되어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에게 의해 좌절된 바 있다. 당시 사교 사회에 자신과 자신의 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질 것을 우려한 그녀의 어머니가 미리 손써 스캔들로 비화하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10대부터 상당한 방황을 보였다.

17세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아버지를 닮는 것을 두려워하여 문학 대신에 수학이나 논리학에 심취하게끔 유도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가정교사로부터 수학과 과학을 배웠는데, 그의 스승은 윌리엄 프렌드, 매리 소머빌과 같은 19세기를 대표하던 과학자들이었고 그중엔 저명한 수학자 드 모르간도 있었다. 17살 무렵부터 그녀는 이미 수학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드 모르간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녀가 일류 수학자가 될 재능이 있다까지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딸에게서 아버지 바이런을 지우고자 하는 어머니의 집착은 생각보다 크고 집요했다. 딸이 20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바이런의 그 어떤 초상화도 보지 못하도록 차단할 정도였지만,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아버지를 혐오했음에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은 갈수록 사무쳐만 갔다. 그렇게 그녀는 아버지를 사모했고 죽을 때는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바란다는 유언까지 남겼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딸로, 컴퓨터란 기계 자체가 없던 시절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해내고 미래의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을 예견까지 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어거스터 에이다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Augusta Ada King, Countess of Lovelace)의 이야기이다.

1980년 미 국방부는 서로 난립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완료한 뒤 이 언어를 ‘에이다’라고 명명해, 에이다를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인정했다.

25세 당시

19세가 되던 해, 에이다는 사교계에 병약하면서 천재적인 미녀라는 조건을 모두 갖추며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보는 이들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춤에 재능이 있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줄 아는 센스가 있었다. 나중에 가까워진 아버지 바이런의 친구였던 존 홉 하우스는 당시의 에이다를 이렇게만 묘사했다.

“덩치가 크고 피부가 까칠한, 그런데 어딘가 바이런과 닮은 구석이 있는(특히 입부분이) 젊은 여자였다.”


에이다는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털어놓고 가까워진 홉 하우스만큼은 예외였다.

 

20살이 된 에이다는 윌리엄 킹, 제8대 킹 남작과 결혼하여 킹 남작부인이 되었다. 부부는 영국 남부의 서리 주(Surrey州)의 대지(大地)와 토이돈 호(湖), 런던에 있는 저택에 거주하였고, 서머싯 주(Somerset州)에 남편이 마련한 장원에서 신혼생활을 즐겼다. 장원은 원래 사냥 별장이었던 것을 킹 남작이 에이다를 위해 개축한 것이었다. 저 너머 브리스톨(Bristol)만이 보이고 이탈리아식 테라스 정원으로 둘러싸인 낭만적인 저택에서 부부는 여름휴가를 보냈다.

부부는 세 명의 아이를 가졌다. 장남 바이런이 1836년에 태어났고, 이듬해에 딸 이사벨라를, 그리고 2년 후인 1839년에 차남 랄프 고든을 낳았다. 딸을 낳은 직후 에이다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질병’을 몇 달 동안이나 앓았다고 기록하였다.

 

1838년, 남편인 킹 남작은 초대(初代) 러브레이스 백작이 되었고, 이후 그녀는 남은 세월을 ‘러브레이스 백작부인’(The Right Honourable the Countess of Lovelace)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841년, 어머니 앤 이사벨라는 딸 에이다와 ‘바이런의 조카’ 엘리자베스(Elizabeth Medora Leigh)에게 엘리자베스의 친아버지가 바이런이며 두 사람은 이복자매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에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며 그다지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에이다는 아버지의 근친상간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모였던 어거스타 리가 순진한 아버지를 유혹했다고 여겨 그녀에 대해 ‘타고난 사악함을 지닌 여자’라며 비난했다. 어머니는 그런 딸 에이다의 아버지 비호에 대한 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전남편 바이런을 비난했지만, 그럴수록 에이다는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녀의 어머니, 앤 이사벨라

1843년, 에이다의 어머니는 손주들의 교육과 에이다의 ‘도덕적 교정’을 위해 저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벤자민 카펜터(William Benjamin Carpenter)를 가정교사로 채용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금세 에이다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고 에이다와 불륜관계를 맺기를 원하였지만 에이다는 단호히 거절한다.

 

에이다는 이미 여러 가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져 갔다. 남자들과의 ‘편안한 관계’로 숱한 소문이 퍼졌고, 도박에 빠져 돈을 잃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들과 공동으로 출자하여 판돈을 만들고 그녀가 야심 차게 준비한 수학적인 모델에 따라 거액의 베팅을 시도하였으나 이것이 처참하게 실패하게 된다. 에이다는 거액의 빚을 지고 협박까지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궁지에 몰린 끝에 이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하지 않으려고 패물을 모두 내다팔아야 하는 구차한 상황에까지 몰린다.

 

에이다는 사실 백작부인만으로 삶을 사는 것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시적인 과학자(poetical scientist)’, '분석가', '형이상학자'라고 불렀다.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골상학과 최면술을 포함한 당대의 과학적 유행에도 관심이 많았다.


1844년에는 친구에게 두뇌가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는 원리를 나타내는 수학적인 모델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한 바 있었는데, 이 연구와 관련하여 전기기술자 앤드루 크로스를 방문하여 실험방법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같은 해, 에이다는 칼 폰 라이헨바흐 남작이 쓴 <자성에 대한 연구>를 읽고 평론을 쓰기도 하였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수학과 음악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 기록도 남아 있다.

찰스 베비지(Charles Babbage)

에이다는 그를 가르친 많은 스승들 중에서도 여성 과학자인 매리 서머빌을 좋아하고 따랐는데, 발명가이자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찰스 베비지(Charles Babbage)와의 만남은 서머빌의 주선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의 발명품 소개회에 참석하면서, 그의 후원자 겸 동료가 된다. 당시 베비지는 모든 종류의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 기계인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을 설계 중이었다.


배비지로부터 전해 들은 ‘초기 컴퓨터’에 대한 연구에 에이다는 매혹되었고, 서머빌과의 친분을 최대한 이용하여 배비지와 자주 접촉하려 하였다. 에이다의 여름 별장에 있는 테라스 한편에서 두 사람은 수학에 대해 토론하곤 하였고, 그곳은 ‘철학자의 길(Philosopher's Walk)’이라고 불렸다.

 

1842년에 찰스 배비지는 해석 기관에 대한 세미나를 위해 이탈리아의 토리노 대학을 방문했는데, 이 날의 강연을 들은 젊은 과학자(훗날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는) 루이기 메나브레는 프랑스어로 해석 기관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된다.


배비지와 에이다의 친구 찰스 휘트스톤은 이것을 영어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고, 에이다는 번역을 의뢰받고 무려 9개월이나 그 작업에 매달렸고 결과는 메나브레의 논문을 단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에 두 배에 달하는 주석이 붙은 또 다른 한 권의 책, <베비지의 해석 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판하게 된다.

 

에이다는 베비지의 해석 기관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설정된 조건을 만족하는 한 같은 계산이 반복되도록 하는 ‘루프(loop)’, 전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한 공식을 다시 사용하는 ‘서브루틴(subroutine)’, 구문을 건너뛰어 실행하는 ‘점프(jump)’, 조건식이 달린 구문인 ‘if’ 등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알고리즘

해석 기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당시로선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러브레이스는 찰스 배버지의 기계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에 관한 노트를 남겼는데, 그 노트는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은 최초의 ‘알고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그 노트의 주석문은 알파벳 순서대로 A부터 G까지의 각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고, G 파트에는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해석기관용 알고리즘이 실려있었는데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인정되어 에이다에게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에이다는 주석문에서 ‘해석기관’은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입력하는 방식을 통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계산 기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하였고, 특히 해석 기관이 더욱 다양한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배비지조차도 단순히 계산이나 수치를 처리하는 장치로만 해석 기관을 이해했던 것과 비교하면 개념적인 도약이었다. 에이다는 음악의 요소들이 해석 기관이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될 수 있다면 해석 기관을 이용하여 작곡과 같은 창작활동도 가능하다고 언급하였고, 여기에서 현대의 컴퓨터에 대한 예측을 엿볼 수 있다.

 

작업을 마친 후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고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다. 말년에 에이다는 배비지를 유언의 집행자로 지명하는 편지를 썼지만, 법적 문제로 인해 전달되지는 못했다.

 

에이다의 생일날인 1980년 12월 10일에 미국 국방부는 ‘에이다’라는 이름의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참조 설명서를 승인하였다. 에이다 프로그래밍 언어(MIL-STD-1815)의 미국 국방부 군사 규격에 붙여진 숫자는 그녀가 태어난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에이다는 연구를 위해 친분을 맺은 과학자 앤드루 크로스(Andrew Cross)의 아들, 존 크로스와 1844년부터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에이다가 세상을 떠나고 법률적인 합의에 의해 그와의 서신을 거의 대부분 파기해야 했으므로, 뚜렷한 증거는 남지 않았지만 에이다의 유언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보의 상속자로 그를 지명한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피아노 앞에서(1852년, 생의 마지막 해)

1852년, 에이다는 자궁암과 의사의 잘못된 처방인 사혈요법(瀉血療法)의 부작용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에서 객사했을 당시의 나이와 같았다. 에이다는 유물론자였지만 어머니의 종용으로 병상에서 자신의 삶을 신에게 회개하였고, 어머니를 유언의 집행자로 지명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간통 고백을 들은 남편은 그녀의 마지막을 지키지 않았다.


그녀는 유언에 따라 노팅엄셔주(Nottinghamshire 州), 성 매리 막달렌 교회에 있는 아버지 바이런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의 아버지, 바이런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가 컴퓨터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나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서 많이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이다.


지금은 기본이라고 되어 있는 프로그래밍의 기본개념이라는, 루프문, 조건문, 서브루틴 같은 프로그램 제어문이라는 것도 모두 에이다가 그 당시에 만든 것들이었다. C, C++, Java, C#, PHP 등 현재 존재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들이 러브레이스가 최초로 구현한 if문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값을 구할 때 중요한 건 그 값을 구하는 방정식 중 가장 최소 비용의 방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은 알고리즘 분석이라는 학문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에이다는 아날로그적이라 간주되는 자연현상을 수치화함으로써 숫자의 기계적인 조작을 통해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일들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했지만, 그게 정말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구현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무리가 있음까지도 예견했다. 즉, 튜링 머신과 폰 노이만 구조의 등장을 1세기 전에 예언한 것이다.

 

물론, 이런 천재적인 그녀에게도 오만함에 이른 실수는 늘 있어왔다. 특히 수학 천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인 ‘나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이면 도박에서 높은 승률을 올릴 수 있을 거다.’라는 오만함이 그녀를 도박중독에 빠지게 하여 전재산을 탕진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천재인 그녀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에이다의 열정적인 분석 책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찰스 배비지의 해석 기관은 완성되지 못했다. 즉, 몇 세기를 앞서간 천재 백작부인 에이다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실행되지도 못하고 망각 속으로 묻혀져 갔다. 그렇게 그녀는 막 워밍업을 끝내고 더 업그레이드되려던 차에 제대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권태로운 귀족부인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즉, 그녀에게는 천재적인 두뇌를 활용하여, 몰입할만한 과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업적은 이후 망각 속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컴퓨터의 시조로 알려진 앨런 튜링 등에 의해 재평가되어 다시 세상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수많은 컴퓨터 언어들이 개발되고 혼재되는 속에서 이를 통일하기 위해 미 국방부가 만든 컴퓨터 언어에 에이다란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컴퓨터 언어, 에이다는 구조화되고, 통계학적 형태를 가지고, 명령적이며, 객체 지향적인 고급 수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이유로 수준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요즘 와서는 잘 쓰이지 않은 언어가 되었다.

 

당신이라면,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갈구하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고 말할 정도의 애틋함을 품을 수 있었을까? 어딜 가더라도 그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사교계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 어느 당대의 과학자들보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당대 최고 일류대학 교수이자 발명가인 이의 연구가 미흡함을 지적하고 주석서를 작성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서도 귀족부인으로 무료한 삶에 만족하고 살 수 있었을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을 퍼붓는 어머니의 서글픔을 대하면서 그녀는 어머니가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는지 이미 알았기에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남자였다면, 좀 더 건강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천재적인 진취주의자였음에도 그 재능을 삭히고 마흔도 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치료 같지도 않은 중세적 방식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당신이 여자라서, 경력단절녀라서, 아니면 단절될 경력도 없이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묶여 있다고 육아 스트레스에 하루 종일 우울해하면서,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하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보다 능력도 안되는데, 버는 돈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집안 살림은 내팽개치고 식구들 식사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서 워킹맘입네하면서 점심 먹는 재미에 노닥거리듯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낄낄거리는 여자들을 보며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에이다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자신을 위한 노력으로 바꾸어나가고 연구의 방식이 굳이 밖으로 도는 것이 아님을 알았더라면, 벅찬 사회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도 그녀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을 방법이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늘 아팠고, 육체가 힘겹고 병약했던 것과는 별개로 결핍이라는 정서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은가?

당신은, 버는 것보다 밖에 버리는 것이 더 많으면서도 알량한 워킹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그 허접한 여인네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감성으로, 당신이 읽는 책으로, 당신의 삶과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이다.

아이에게 묶여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육아에 묶여 아이들 똥기저귀를 가느라고, 당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있다는 자괴감 따위 느끼지 마라. 에이다가 매일 컴퓨터 회사에 출근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대학교수이자 발명가였던 이의 연구가 무엇이 미진한지를 9개월 만에 파악해냈겠는가?


에이다도 아이가 셋이었고, 늘 몸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단 9개월 만에 비지의 논문을 다른 이가 번역한 내용을 보면서 공부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연구성과를 이뤄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능력이 어떤 것까지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방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무료한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 뿐이다.

당신은 다르지 않은가?

당신이 하고 싶어 하던 것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굳이 워킹맘 코스프레를 하는 그 허접한 이들과는 달리,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두뇌와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설사 그것이 당신의 아이를 천재적인 인재로 만드는 것으로 목표를 삼더라도 당신은 이미 사랑으로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그 아이가 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지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생님이라는 점을 안다.


지금 워킹맘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의 80% 이상은 아이들의 일타 과외선생의 수업료조차도 채우지 못할 정도의 월급을 받아가며 일합네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 역시 모르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양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이가 수십 년을 똥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의 기초, 순서도라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지에서 조건문을 만들어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어떻게 얼마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능력 문제이다. 그것이 ‘워킹맘’이라고 불리지만 격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당신만이 만들어내는 노하우가 될 것이다.

세상에 일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지금 당신의 준비과정을 폄하할 자는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값진 당신의 그 인생 과정 과정이 모두 의미를 갖고 있음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세상도 안다.


아직 당신의 인생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감히 끝났다고 입을 놀리는가?


당신의 계획을, 더 멀리 보는 그 인생을 응원한다, 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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