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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1. 2022

오지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부족들을 마주하고서는

29개 국어를 배우고, 그 경험으로 번역을 빙자한 대작을 재창작하다.

1821년, 영국 데번 주 토키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육군 장교였던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와 라틴어에 능통하게 되었는데, 이 유년기의 외국에서 체류하며 보낸 성장기의 체험이야말로 훗날 그가 모험과 어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그의 광활한 세계관과 수용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 그는 19세 때인 1840년에 옥스퍼드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교칙 위반으로 퇴학당하고 만다.

 

1842년에 그는 동인도회사를 위해 일하는 인도 주재 육군에 자원해서 입대했으며, 인도 서부 구자라트에 주둔한 제18 봄베이 토착민 보병부대에 소위로 임관한다. 이곳에서도 그는 탁월한 어학 학습 능력을 발휘하여 힌두스탄어, 구자라트어, 펀자브어, 신디어, 마라티어 같은 여러 지역의 언어를 차례로 습득해나간다. 


그의 탁월한 언어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밀명을 받고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부에 해당하는 신드 지역에서 토착민으로 변장하고 돌아다니며 정보원으로까지 활동했으며, 이듬해인 1843년에 영국 육군이 신드를 점령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우는 역할을 세우기도 한다.

19세기 대영 제국을 대표하는 탐험가이자, 인류학자, 작가, 언어학자, 번역가, 군인, 외교관의 다양한 활동으로 유명한, 말년에는 저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를 최초로 영문 번역한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경(Sir Richard Francis Burton, KCMG)의 이야기이다.

 

그는 본업이던 탐험가로도 상당히 유명했는데, 1858년 탕가니카호를 발견하였고, 1881년 황금 해안을 조사하는 등 주로 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하였다.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헨리 모턴 스탠리의 아프리카 탐험에 전문 길잡이로 활동하였다. 그 외에도 인도 · 근동 지역, 남북 아메리카 등을 여행하였다. 수많은 외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여행기 · 소설 · 번역서 등 모두 50여 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저서로 《메카 기행》, 《불행의 골짜기》 등이 있다.

 

사망 후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의 서재에 남겨졌던 귀중한 자료들은 왕립 인류학 연구소 헌팅턴 도서관(Huntington Library,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에 보존되어 있다.

1849년 봄에 버턴은 병가를 얻어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다시 군인의 신분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왕립 지리학회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가 계획했던 새로운 모험은 바로 무슬림의 성지 순례(하즈)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슬람교 신자들의 성지인 메카는 백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되고 있었다. 버턴은 아랍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이고, 신드에서 무슬림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에 이들의 관습에도 익숙했기 때문에 그러한 과감한 계획은 시도될 수 있었다. 1853년, 그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탁발승으로 변장하고 메카에 가서 성소 카바의 검은 돌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과감한 모험에 성공하게 된다.

아랍인으로 변장한 리처드 버턴의 모습. 그의 저서 <메디나와 메카 순례>(1855)의 권두화

1854년 봄에 인도의 본 대로 복귀한 버턴은, 탐험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임무를 계획하고서, 왕립 지리학회의 후원으로 제1차 소말리아 탐험에 나선다. 아프리카 북동부의 해안 및 내륙 지역을 탐사하는 목표를 위해서 버턴은 우선 무슬림 길잡이를 고용해 에티오피아의 하라르로 향했다. 당시까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하라르는 ‘백인들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인에게 적대적인 곳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버턴은 터키 출신의 이슬람교도로 변장하고 그곳의 관리를 직접 알현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각종 편의를 제공받는 배짱 좋은 추억까지 만들고 돌아온다.

 

1855년 봄, 버턴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제2차 소말리아 탐험에는 존 해닝 스피크를 비롯한 육군 장교 3명이 그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원정대는 도적 떼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장교 한 명이 사망하고, 스피크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해서 목숨만 부지한다. 버턴은 도적 떼의 창이 한쪽 뺨을 뚫고 반대쪽 뺨으로 나오는 아슬아슬한 관통상을 입어서, 이후 얼굴 양볼에 선명하고 큼직한 흉터까지 얻으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제2차 소말리아 탐험이 시작도 되기 전에 무산되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게 되면서 버턴의 모험은 잠시 휴식기를 갖게 된다. 인도의 본 대로 복귀한 버턴은 크림 전쟁에서 터키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기로 배정되었지만, 이 부대의 터키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임명 자체가 취소되고 말았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에는 차질이 있었지만, 버턴은 이때까지 자신의 탐험 이야기를 책으로 간행해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성지 순례를 다룬 <메디나와 메카 순례>(1855)와 하라르 기행을 다룬 <동아프리카의 첫 답사>(1856) 등이 당시 그의 유명세를 만들어준 여행기들이었다.

나일 강을 찾다 발견한 탕가니아 호수를 그린 그림

1856년 말에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에서는 버턴에게 또 한 번의 아프리카 탐험을 의뢰할 계획을 제안하게 된다. 이번 탐험의 목표는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거대한 내륙의 호수를 찾아내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나일 강의 수원(水原)이 어디인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주기적으로 아프리카에 큰 홍수를 일으켰던 나일 강에 대한 어마어마한 힘을 보면서 결국 강의 수원(水原)을 찾게 되면 여러 가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금증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있었지만, 수많은 추측과 탐사 시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내륙 어딘가에 있다는 커다란 호수가 그 수원(水原) 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될 따름이었다.

열대병이 시달리던 버턴

1857년 6월 말, 버턴은 오늘날의 탄자니아 동부에 있는 섬 잔지바르에서 서쪽으로 원정을 시작한다. 이전에 소말리아 원정에 참가하려고 했다가 죽을 뻔했던 스피크도 그와 동행했다. 


아랍인 무역상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간 원정대는 1858년 2월에 드디어 탕가니카 호수를 발견한다.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턴은 열대병에 걸려 심하게 앓아눕고 말았는데, 그 사이에 스피크가 단독 탐험을 실시하여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호수를 발견한다. 그들은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그 커다란 호수를 ‘빅토리아 호수’라고 이름 짓는다.

결과적으로, 버턴과 스피크의 원정대는 나일 강의 양대 지류 가운데 하나인 ‘백(白) 나일’의 수원(水原)을 찾아낸 셈이었지만, 이 발견은 생각지도 못한 내분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와병 중인 버턴을 남겨두고 먼저 본국으로 귀국한 스피크가 자신의 발견을 먼저 공표해버리면서 유럽인 최초의 빅토리아 호수 발견자로서 찬사를 받게 된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열대병과 사투하고 있던, 실제 원정을 주도했던 버턴의 공은 그늘에 가려지고 말게 된 것이다. 


사실 그 이전도 그렇고 이후에도 아무런 탐험이나 발견의 성과가 없던 스피크의 행위는 버턴에게는 배신행위에 가까운 공 가로채기였다. 이후 버턴과 스피크는 격렬한 설전을 벌이게 되지만, 6년 뒤인 1864년에 스피크가 갑작스레 사망(자살로 추정)함으로써 허망하게 논쟁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스피크와의 불필요한 논쟁 이후로 버턴은 점차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환멸을 느껴 손을 떼게 된다. 40세였던 1861년에는 10세 연하의 이사벨 애런들과 결혼했고, 탁월한 언어능력과 그간의 탐험 경력 등이 인정되면서 외무부에 들어가 이후 30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아내와 버턴

1861년에 아프리카 서부의 섬 페르난도포(현재 적도기니의 비오코) 영사, 1865년에 브라질의 산투스 영사, 1869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영사, 1871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리에스테(현재는 이탈리아 영토) 영사로 재직했다. 외교관으로서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주업이 아닌 부업으로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집필에 투자하며 번역가로의 명성을 높여갔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를 소재로 한 16세기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서사시 <루지아다스>(1880), 성(性) 문학의 고전인 인도의 <카마수트라>(1883)와 아라비아의 <향기로운 정원>(1886), 그리고 그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1885)역시 이 시기의 대표적인 번역 작품이었다.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은 1890년, 70세를 일기로 트리에스테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져서 런던의 모트레이크에 있는 베두인 천막 모양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은 그가 최초는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다언어구사자(polyglot)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주세페 메조판티 추기경은 무려 38종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20세기 에스토니아의 철학자 우쿠 마싱은 무려 65종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전한다. 버턴이 구사했던 언어는 29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 시대의 다언어구사자(polyglot)에 대한 판단은 현재와 같이 엄격하거나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순하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각 나라와 부족의 서로 다른 풍속을 체득해서 언제라도 토착민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문화적 친화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버턴은 다양한 민족과 종족에 대한 분야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간행했다. 초기의 저술로는 인더스 강 유역의 여러 종족을 다룬 <고아와 푸른 산맥>(1851)과 <인더스 강 유역의 매 사냥>(1852) 등이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식민화 작업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민족학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류학의 전신인 민족학 분야의 연구는 ‘제국주의의 확장’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당대의 분위기와 지원은 버턴의 탐험과 저술이 탄생할 있었던 흐름을 만들어주었다.

그를 언급하면서 그의 유명세를 만들어줬던 이른바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작품의 원제는 <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Alf Laylah wa Laylah)>, 즉, 버턴의 영역본 제목과 같은 <천 개의 밤과 하룻밤(One Thousand and One Nights)>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일역본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출판하면서 ‘천야일야(千夜一夜)’, 또는 ‘천일야화(千一夜話)’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이름은, 사실 1706년에 익명으로 나온 최초 영역본의 제목이 <아라비아의 밤에 즐기는 오락(Arabian Nights' Entertainment)>이라고 표기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인들은 <아라비안 나이트>가 마치 중동을 대표하는 문학 작품으로 생각하는데, 정작 아랍 문학사에서 이 작품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오히려 중동권의 문학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버턴의 번역을 통해 유럽에서 간행된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성(性) 묘사 등을 근거로 중동을 폄하하고 왜곡한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이다. 본래 <아라비안 나이트>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페르시아의 설화집 <하자르 아프산(1천 개의 이야기)>이 있긴 하지만, 이후 그가 번역 출간한 <아라비안 나이트>는 정작 번역에 대한 원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본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곳의 문화와 문학에 동화되어 익숙해진 버턴의 새로운 형태의 창작이라고 간주되기도 한다.

 

앞서 <아라비안 나이트>를 최초로 번역한 인물이라고 버턴을 소개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출간했던 이들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유럽 최초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앙투안 갈랑이 1704-1717년에 간행한 판본이다. 200일 분량의 내용을 담은 갈랑 판이 큰 인기를 끌면서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번역은 물론이고 위작까지 나올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영역본에도 버턴 전에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판본(1838-1840년)과 존 페인의 판본(1882-1884년)이 있었다.

 

버턴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전형적인 액자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고, 그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사실 인도의 고대 우화집인 <판차탄트라>(BC 3세기경)나 <히토파데샤>(12세기경), <인도 앵무 70일 야화>(12세기경), 그리고 페르시아의 우화집인 <새들의 회의>(12세기)처럼 인도와 중동에서 전해지는 설화 문학 작품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그가 마흔이 되어 집필활동에 몰입하기 이전까지 어디에서 활동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버턴의 경험과 체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궤적을 읽어낼 수 있다.

 

1001일 동안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하루에 한 가지 이야기씩 진행되지 않는다. 유명한 ‘선원 신드바드의 이야기’는 무려 30일간 지속될 정도로 길지만, 짧은 이야기의 경우에는 하루에 대여섯 편씩 들어 있기도 하다. 비교적 원본에 충실하다는 갈랑의 번역본만 해도 200일 정도의 분량밖에 담고 있지 않다. 결국 전체의 3분의 2 가량은 이후의 유럽에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며 재창작, 또는 수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버턴 영역본의 삽화, 중국인 알라딘(오른쪽)

가령 우리에게도 친숙한 ‘알라딘과 마술 램프’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경우, 버턴 판본에서는 1001일 동안의 이야기에는 속하지 않고 ‘권말부록’으로 따로 수록되어 있다. 심지어 ‘알라딘’ 이야기의 배경은 중동도 아니고 중국이며, 주인공 역시 중국인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아라비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하면 602번째 밤의 이야기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기본 액자 구조였던 샤리야르 왕의 이야기와 유사한 단편이 ‘또’ 등장한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원본을 확정하는 과정과 그것을 편집하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음을 반증한다.

 

다양한 이전 번역 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버턴의 판본이 오늘날까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가장 분량이 많고 자세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논란이 될 정도의 노골적인 성(性) 묘사를 가감 없이 표현해 화제가 된 까닭도 물론 있었다. 그보다 10살이 어렸던 버턴의 아내, 이사벨은 이런 호색적인 성향을 질색한 나머지, 남편의 사후에 번역 및 저술 원고의 일부를 불태우고 이른바 <아라비안 나이트 ‘삭제판’>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녀가 임의로 그의 원고를 태워버린 일이 유명한 사건으로 회자되면서 오늘날 금서와 검열의 시작이라며 문학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혹자는 버턴을 가리켜 ‘겨우 생애의 절반 동안에 대여섯 명의 보통 남자들에 맞먹을 정도로 많은 공부와 많은 시련과 많은 도전과 모험을 겪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한편으로는 ‘경직된 빅토리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단아’로서 그 시대의 통념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웠다는 증언도 있다. 비록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며 탐험에 몰두하기는 했지만, 그는 의외로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가급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만난 지역과 사람에 대해 기술했다.

 

사실 문란한 성묘사로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논란의 중심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이전에 기술된 그의 기행기를 보더라도 그는 종종 특이한 성(性) 체험기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본인의 직접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풍문과 상상에 의거한 창작이었다. 내가 오늘 단순한 대영제국을 등에 업은 콧대 높은 탐험가나 고상한 척하는 문학가들과 달랐던 그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겉으로만 고상하고 품위 따위를 강조하던 빅토리아 시대에, 그들의 가식과 본능이 원하던 부분을 글로 건드리고 자신의 그간 몸소 체험을 녹여냈던 그는 이미 시대를 선도한 예술가였다. 그는 미지의 것을 알고 싶어 하고 즐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性)과 마법과 괴물과 모험을 비롯하여, 미지의 것 전반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 바로 그가 인정받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당신은 왜 지금 그 일을 하는가?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당신은 왜 사는가?

당신이 이제까지 당신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잘못 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해 왔는가?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스스로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한 목적으로 집약되어 있어야 한다.

 

버턴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가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그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같이 선택을 하고 판단을 내린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인생을 결정지을만한 큰 선택과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선택과 결정에 뒤따르는 결과는 오롯이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인이고 배운 자의 자세이다. 그런데 오늘 버턴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덧붙인다. 언제고 그 선택과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바로 수정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보완한다는 것,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누구보다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냉철하게 구분해야 할 사람이 자신인데, 대부분이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너그럽고 적당히 타협해버린다.

 

그러지 마라. 당신이 진정 더 나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면 그 한계를 깨고 올라서라. 당신의 적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니라 당신이다.

 

마지막으로 리처드 버턴이 <아라비아 나이트>를 출판하며 붙인 머리말이 당신의 깨달음에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 확신하며 읽어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을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며, 그것은 나에게 아무리 퍼내도 마를 줄 모르는 샘처럼 위안과 만족을 주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초목이 무성한 서아프리카의 인적이 드문 황야와 남아메리카의 단조롭고 쓸쓸한 반(半) 개척지로 공무를 띠고 추방되어 있던 몸으로서, 이러한 번역 작업은 권태와 실의를 잊게 해 주는 부적이요 호신부였다. 이 책은 언제나 어떤 환상이 홀연히 내 눈앞에 떠오르게 하고, 머릿속 공상의 화랑에서는 한 장의 그림이 벗겨지며, 여러 곳을 두루 여행한 여행자일지라도 못 갖고 있을 만큼 많은 추억과 회상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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