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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2. 2022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의사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여성 비행사로는 최초로 대서양을 단독 횡단하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 아치슨에서 그다지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도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전근으로 고등학교만 6번이나 옮겨 다녀야 할 정도로 평탄하지 못했던 유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특유의 밝음과 긍정적인 성격으로 자신을 유지했다.

그녀는 매우 밝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여자아이의 놀이보다는 수영이나 테니스 등 바깥활동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필라델피아 근교의 오츠콘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캐나다로 가서 전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을 하면서 의학에 관심을 품은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와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곧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가족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야만 했다.

그녀가 가족이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던 1920년대 초반은 바야흐로 미국은 비행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이래 비행기 제조기술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여 일반인을 위한 시범비행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속도, 고도, 장거리 비행 기록 등이 새롭게 갱신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1차 대전 중 새로 도입된 비행기를 이용한 공중전에서 단련된 조종사들은 전쟁에서 닦은 비행 조종술을 바탕으로 곡예비행단을 꾸려 공연을 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흐름 속에서 1920년,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캘리포니아의 롱비치 비행장에 구경 갔다가 10분간 비행기에 직접 탑승해 볼 기회를 얻는다. 단 10분간의 시승일 뿐이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직접 타 본 비행기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다. 그녀는 그 10분의 비행이 이후, 비행기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할 유일한 운명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미국의 비행사. 여성 비행사로는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고,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태평양 상공을 쉬지 않고 날아 ‘하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나, 적도 주변을 도는 긴 항로를 이용한 세계일주 비행에 도전하였다가 실종된 아멜리아 메리 에어하트(Amelia Mary Earhart)의 이야기이다.

10분간의 시험비행의 경험은 내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아멜리아는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모은 1000달러를 들고 곧장 키너 비행장에서 비행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가죽점퍼와 숏커트의 헤어스타일을 하고서 남자들도 힘들어하며 낙오하는 비행 수업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1922년에는 여성 최초로 고도 1만 4000피트 비행에 성공했으며 마침내 1923년 국제 항공연합이 주는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세계적으로는 16번째 여성 비행사였다.


1924년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보스턴으로 이사한 아멜리아는 생계를 위해 미국 이민자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비행을 그만두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 모든 생활을 비행에 초점을 맞춰 지내는 것이 그녀는 마냥 좋았다. 마침내 그녀는 여성 비행경주 속도 기록 부분에서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여러 비행 기록을 경신하며 여류 비행사로서는 세계 1위로 회자되기 시작하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정말 어렵게 구매한 비행기를 몰고 미국 곳곳을 다니며 비공식적 시험비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항로가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항공지도, 항법 시설 등이 전무했던 시절이었기에 자신이 어디를 날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행이었지만 아멜리아는 그 두려움과 싸우면서 하늘에 점점 익숙해져 갔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다른 이들이 개척하지 못했던 새로운 항공로를 찾아 미국 전역을 날아다니던 아멜리아는 오래지 않아 미국 전역에서 조금씩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4월 아멜리아는 출판업자 조지 퍼트넘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는 2명의 남자 조종사가 대서양을 횡단하는 이벤트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 비행기에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아멜리아가 동행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1927년 린드버그의 논스톱 대서양 횡단 성공 이후 많은 비행사들은 대서양 횡단이 비행사들의 최종 과제인 양 동경했다.


그러나 당시 대서양 횡단 비행은 수 십 시간이나 걸리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남자 비행사들조차 선뜻 결정 내리기 두려워하는 모험이었지만 아멜리아는 그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게 된다. 그리고 이 비행은 미국의 뉴펀들랜드에서 이륙한 지 무려 20시간 40분 만에 영국의 웨일스에 무사히 도착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세계는 여성 최초로 목숨을 건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아멜리아에게 열광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세상 사람들이 열광할수록 아멜리아는 그 영광이 오롯이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조종한 비행기가 아닌, 그저 대서양을 횡단했던 비행기의 보조석에 여성이라는 이름만 달고 탔을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이 조종하는 비행기에 탑승해 겨우 비행을 보조하는 역할만 했다는 자괴감은, 그녀에게 최초의 대서양 횡단 여자 비행사라는 환호가 더해갈수록 비례하여 그녀의 마음을 억눌러왔다.

그녀가 그런 자괴감을 느끼고 힘겨워했던 것과는 별개로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명성은 아멜리아의 이제까지의 삶에 하이라이트를 비춰주는 터닝포인트가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그 이벤트를 기획했던 출판업자 조지 퍼트넘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였고 그의 권유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제목으로 한 <20시간 40분>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림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렇게 얻은 명성과 부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던 돌을 떼어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한번 대서양 횡단을 ‘단독으로’ 시도하게 된다.

 

1932년 5월 20일. 아멜리아는 미국의 뉴펀들랜드에서 ‘록히드 베가호’라는 비행기에 올랐다. 드디어 그녀가 원하고 원하던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고도계가 고장나버렸고 심지어 엔진이 파손되는 사고가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는 불굴의 의지로 이 모든 고비를 넘기고, 이전 기록보다 훨씬 단축된 14시간 56분 만에 북아일랜드의 한 농촌에 큰 사고 없이 비상 착륙을 하게 된다. 세계 최초로 여성의 대서양 횡단 ‘단독’ 비행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아멜리아의 이 대서양 횡단 비행은 여성 최초라는 의미 외에도 대서양 ‘최단시간 횡단’이라는 기록까지 함께 세웠다.

아멜리아는 이제 여류비행사로서가 아닌 비행사로서 그야말로 세계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창공의 여왕’. 최초로 대서양 논스톱 횡단에 성공했던 린드버그의 이름을 따서 ‘레이디 린디’ 혹은 ‘하늘의 퍼스트레이디’ 등등 수많은 애칭으로 부르며 열광했다.

 

시대가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게 그녀를 운명으로 이끌었다면, 당시 미국의 시대적 흐름은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였기에 그녀를 미국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로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그녀의 도전과 성공은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당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아멜리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비행 성공 이후 아멜리아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연예인으로 주목받는 삶을 살게 된다. 모든 미디어는 그녀에게 찬사와 러브콜을 보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그녀의 인기의 중심으로 치켜세웠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이 늘씬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용감한 여인을 기꺼이 자신들의 국가 귀빈으로 다투어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미 국립 지리학회의 금메달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교황을 알현하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부부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30대 중반이던 나이에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비행사로서의 정점에 오른듯한 삶이었지만 아멜리아의 도전은 결코 거기서 멈추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셀레브의 인생을 뒤로한 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계속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하여 1935년에는 세계 최초로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에 성공했다.


미국 전국을 돌며 크고 작은 비행기록들을 세우고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그녀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계획에 다시 한번 착수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세운 그녀의 다음 계획은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온전히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지구의 둘레 최장 길이인 무려 2만 9천 마일의 적도를 도는 모험을 계획한 것이다.


애초 아멜리아는 이 모험 역시 당연히 자신이 혼자 단독으로 비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첨단장비를 갖추고서도 어려울 수 있는 당시의 열악한 비행조건을 감안할 때 혼자서 감행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그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항법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아멜리아는 1937년 6월 1일 마이애미에서 ‘록히드 엘렉트라’라는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록히드 엘렉트라의 조종칸에 탄 아멜리아, 1937년 5월 록히트 엘렉트라호 앞에서 항법사 프레드 누넌와 함께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2만 2천 마일에 달하는 거리의 비행을 성공한 아멜리아와 프레드 누넌은 1937년 6월 29일 뉴기니 리에에 도착한다. 지구를 온전히 모두 돌기까지 남은 비행거리는 이제 고작 7천 마일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아멜리아와 프레드 누넌은 7월 2일 다시 록히드 엘레트라호에 올랐다.


며칠이 지나면 곧 그녀의 마흔 생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다음 기착지로 예정된 곳은 2500여 마일 떨어진 ‘하울랜드’라는 섬이었다. 미국 해안경비대 경비선 이타 스카호는 미리 약속했던 대로 하울랜드에서 아멜리아가 탄 록히드 엘렉트라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침 7시 30분경 갑자기 아멜리아에게서, ‘연료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긴급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무선을 끝으로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를 태운 비행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그녀의 비행기는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아멜리아의 갑작스러운 실종 소식은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실종 소식을 접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66대의 비행기와 미 해군 군함 9척이 그녀를 찾기 위해 보름 여 동안이나 남태평양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 모든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태운 비행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와 프레드 누넌의 흔적뿐만 아니라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의 그 어떤 유류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구조대는 아멜리아의 실종을 해상 추락사고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2년 후 캘리포니아 법정에서는 법적으로 그녀의 사망을 선언하게 된다.

나중에 발견된 비행기

비행기 파편조차 발견되지 않는 씻은 듯한 실종사건은 세간에 여러 가지 의혹들을 불러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아멜리아가 지나친 유명세에 지쳐 일부러 실종된 척하고, 다른 사람으로 신분을 바꿔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당시 남태평양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정찰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도 주장하였다. 심지어 음모론자들은 그녀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버렸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다.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녀의 실종을 ‘사라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하기도 했다. 결국 1998년, 한 무인도에서 발견된 유골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녀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멜리아가 실종된 후 끝까지 홀로 남아 현지에서 수색을 시도하던 남편 조지 퍼터넘은 결국 그녀가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 자신에게 보내왔던 편지들을 모아 <마지막 비행>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자신의 사랑을 기렸다.


마흔이 되기도 전에 하늘의 별이 된 그녀의 이야기를 오늘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인생 마지막에 실패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마지막 비행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그 도전을 완수하고도 남을 짧지만 굵은 인생 역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미국의 대중음악 스타들만 보더라도 딸랑 하나의 히트곡만으로 평생을 먹고사는 이들이 숱하게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히트곡조차 없이 그저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래도 하나의 히트곡을 낸 것이 어디냐고 항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은 큰 단 한 번의 성공으로 주목받고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로 더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인생에 크게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물론 그것을 세어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말로 그런 기회가 오는지도 통계적으로 객관적인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숨은 방점은 그 큰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고 반드시 잡으라는 조언이고 경고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라면,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각 나라의 정상들이 귀빈으로 초청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자기 나라의 대통령 부부와 친구사이가 되었는데, 목숨을 건 비행을 또 해야 한다고 다음날부터 일어나 준비를 할 생각을 하겠는가?

 

누구에게나 목숨을 건 행동은 무서울 수밖에 없다. 비행기를 오래 탔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직전 비행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거나 하는 경우에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을 비행기 조종석을 잡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처음 성공에서부터 그녀가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가기까지 그녀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도전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대서양 횡단의 비행을 보조 비행사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부터가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녀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저 액세서리로 부각되는 것에 상당한 자괴감과 불편함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 비례를 맞추기 위해,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우주비행사가 되고 다양한 일을 하게 되는 기회가 여성들에게는 주어졌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역량을 더 높은 곳에 두고 도전하거나 ‘여성’이라는 틀에 갇힌 배려를 던져버리고 더 높은 곳을 위해 목숨을 걸 듯 뛰어오르는 과감한 도전을 하지 못했고,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남성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는 둥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며 징징거렸다.

 

아멜리아는 이미 100년 전에 그런 틀을 깨버리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목숨을 걸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이 유명세였고, 돈이었다면 할 수 없는 도전들이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비행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느꼈고, 그 힘겨운 도전을 통해 얻어지는 희열과 성취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낀 여걸이었다.

 

100여 년이 지났다. 지금 당신은 여자라고 핑계로, 아이 엄마라고 핑계로, 경력이 단절되고 힘이 없고, 남자만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사회구조가 어쩌고 하면서 한걸음 이미 발을 뒤로 물리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지금 그렇게 물러 터진 것은 당신이 생물학적으로 여자라서가 아니다. 그저 당신이 게으르고 당신이 두려움이 많으며, 올라가고 싶은 욕망만이 터질 것 같은 풍선의 상태일 뿐, 그것을 하늘로 올릴 만큼의 노력도 도전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을 이겨내고 있지 못할 뿐이다.

조직에서,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이라고 차별받는 부분? 분명히 있다.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일 못하고 능력이 없어서 린치 당하이들여성이라서 더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여성보다 일 못하고 능력없는 남자들도 수없이 비교 당하고 비참하게 내쳐진다.

 

당신의 꿈을 가로막는 것은 결코 유리천장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한계를 긋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자위하며 안주하려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당신을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것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후에, 그것을 회복할 수 없을 때 깨닫게 된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당신이 살아 숨 쉬는 동안, 당신의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인생을 마칠 때 말고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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