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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3. 2022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의과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자신의 이름이 곧 장르가 되는 경지에 오르다.

1920년, 벨라루스와의 국경 지대에 있는 러시아 스몰렌스크 지방의 페트로비치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인 1923년에는 공산주의 혁명(이른바 10월 혁명) 이후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피해서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가족이 이민을 오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부모는 브루클린에서 편의점(캔디 스토어)을 운영해서 제법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편의점 일을 돕기 위해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와야 했던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꾸미고 살을 붙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자기만의 능력이 탁월했다. 이후 이러한 훈련(?)은 쌓이고 쌓여 그가 작가 기질을 발현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준다.

 

1926년, 전설적인 SF 편집자 휴고 건스백이 최초의 SF 전문 잡지인 <어메이징 스토리즈>를 창간하게 되는데, 그는 자기집 편의점 판매대에 놓인 이 잡지를 통해 SF라는 것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중학생이었던 11세 때에 그는 드디어 처음으로 창작을 시도했다. 장르로 치면 SF까지는 아니었고 자기가 읽은 청소년 소설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의 내용을 거의 베끼다시피 한 미완성 작품이었다. 창작이라고는 했지만, 정식 창작물도 아니고 물론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당시 유대계 이민자의 2세들이 상당수 그러했듯이, 그 역시 부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훌륭한 성적을 바탕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스 로 주니어 칼리지를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게 되지만, 동물 해부 실습 과정에서 심한 혐오감을 느껴 전공을 생물에서 화학으로 변경했다.

구렛나루를 기르기 전 젊었을 때

러시아에서 태어난 미국 작가로 과학소설과 교양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수많은 SF 작품을 발표한 미국 SF계의 제1인자로서 특히 미래사회를 묘사하는 데 뛰어난 아이작 아시모프 (Issac Asimov)의 이야기이다. 미국에 이주해오면서 그의 아버지가 영어를 잘 못했던 탓에, 성을 Asimov로 이민 서류에 잘못 기입하며 이름의 발음이 바뀌었다. 원래 정확한 알파벳 표기는 ‘Isaak Ozimov’이고 그의 이름은 ‘아지모프’가 아니라 ‘오지모프’가 된다.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SF계의 3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전설적인 작가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데,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생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49년에서 1951까지 미국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 교수를 지낸 명백한 생화학자였다. 소설가로 데뷔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교수직을 버리게 된다. 전공은 생화학이었으나 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 등 광범위한 과학 일반에 대하여 지식을 배경으로 뛰어난 해설을 하는 것으로도 더욱 유명했다. 무엇보다도 전업작가로서 끊임없는 집필을 통해, 방대한 영역에 걸쳐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낸 다작(多作)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 <파운데이션>과 <로봇> 시리즈가 있다.

대학생이 된 아시모프는 취미이던 SF 읽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소설 습작에 돌입한다. 마침 아시모프가 애독하던 SF 잡지 <어스타운딩 스토리즈>가 1937년에 새로운 편집장 존 W. 캠벨 2세를 영입하여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전과는 다른, 차별화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잡지의 편집 방향이 변화한 것이 유독 마음에 들었던 아시모프는 매호 수록된 소설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감상을 적어 잡지사에 투고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독자 대 편집자의 관계로 캠벨과 친분까지 맺게 된다.

 

SF의 역사에서는 1930년대와 1940년대를 이른바 ‘SF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다. 이른바 ‘SF계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A. E. 밴 보그트, 폴 앤더슨, 할 클레멘트, L. 스프레이그 디 캠프, 레스터 델 레이, 시오도어 스터전, 레이 브래드버리 등의 저명한 작가들 역시 이 시기에 <어스타운딩>, <어메이징> 등의 잡지를 통해서 주요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존 W. 캠벨

존 W. 캠벨은 유명한 SF 단편 <거기 누구냐?>(존 카펜터의 영화 <괴물>(1982)의 원작)의 저자로도 유명하지만, <어스타운딩>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신인 작가를 발굴한 공이 작지 않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위에 언급한 ‘SF 3대 거장’을 비롯한 황금시대의 주요 SF 작가들은 물론, 심지어 이후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가 되어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 L. 론 허바드까지도 캠벨의 후원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성장했다.

 

아시모프는 1938년에 처음 캠벨을 만났고, 그의 격려를 받으며 한 해 동안 무려 10편의 습작을 여러 잡지에 투고하게 된다. 결국 1939년에는 <어메이징> 3월호에 단편 <베스타 표류>를, <어스타운딩> 7월호에 단편 <추세>가 게재된다. 특히 <추세>는 같은 호 잡지에 실린 A. E. 밴 보그트의 <검은 파괴자>와 8월호에 실렸던 로버트 하인라인의 <생명선>과 함께 이른바 ‘SF의 황금시대’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간주될 정도로 처음 시작부터 그의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만큼 아시모프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있어, 캠벨의 조언과 후원은 결정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서전에서 아시모프는 그와의 멋진 인연을 이렇게 회고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당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확고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야, 아시모프. 나는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와 똑같이 수백 명이나 되는 작가를 도와주었지. 하지만 모두가 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되진 않았는걸.’”

필라델피아 해군 병기창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SF 작가 세 사람. 왼쪽부터 로버트 하인라인, L. 스프레이그 디 캠프, 아이작 아시모프. 1944년.

1939년에 아시모프는 일종의 당시 반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의과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낙담한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을 전공하려 했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전공을 바꾸게 되면서 화학으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밟는다.


그런 와중에도 SF소설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계속해서 집필하고 기고함으로써 아시모프는 점차 마니아층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941년에는 유명한 중편 <전설의 밤(Nightfall)>을 발표해서 격찬을 받고, 명실상부한 SF 분야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파운데이션>과 <로봇> 시리즈를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시모프는 친구이자 동료인 스프레이그 디 캠프와 함께 필라델피아 소재 미국 해군 조선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이던 로버트 하인라인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두 사람을 도와준 까닭이었다. 3년간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를 마친 뒤, 아시모프는 다시 육군에 징집되어 9개월간 버지니아 주와 하와이에서 현역으로 복무했다. 1948년에 아시모프는 박사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의 의과대학 소속 생화학 담당 강사로 생계를 위한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55년에 아시모프는 조교수로 승진하지만,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의와 월급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직위만 유지한 채 전업 작가로 변신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정작, 그 결정을 내리고 1950년대 말부터 아시모프는 SF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 분야는 20대에 이미 충분히 써서 더 이상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대신 이 시기부터 그는 스푸트니크 충격의 여파로 수요가 급증한 과학 논픽션 집필과 대중 강연에 힘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추리소설과 역사서와 고전(성서와 셰익스피어 등등) 주해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일반 교양서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작을 내지 않았음에도 이전에 출간한 <로봇>과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꾸준히 팔리면서 SF 분야에서 아시모프의 명성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정점이었다. 오히려 후속작을 원한다는 팬들의 성원이 그치지 않아, 출판사의 설득을 받아들여 무려 20여 년 만인 1981년에 SF 복귀작인 <파운데이션의 끝>(1981)을 출간한다.

대담한 상상력이 돋보였던 초기작에 비해 후기작은 기존의 여러 가지 작품 소재(가령 로봇과 파운데이션)를 하나로 엮어 보려는 시도였다. 물론 전만 같지 못하다는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지만, 거장의 귀환을 반기는 독자들 덕분에 책은 또다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아시모프는 초인적인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1950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무려 99권의 단행본을 펴낸 기념으로, 100번째 책인 <작품 100번>(1969)은 지금까지 자신이 출간한 책들에 관한 해설서로 꾸몄다. 그리고 심지어 10년 뒤에는 <작품 200번>(1979)을, 또다시 5년 뒤에는 <작품 300번>(1984)을 펴내며 연이어 놀라운 필력을 자랑했다. 1968년부터는 특유의 구레나룻을 기르기 시작해서, 이때부터 대중에게 친숙한 바로 아래 사진의 모습으로 스타일까지 자리 잡는다.

1992년, 아시모프는 72세를 일기로 뉴욕 시의 자택에서 심장과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의 진짜 사인이, 1980년대 초에 받은 수술 당시에 수혈로 감염된 HIV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합병증이었음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평생 쓴 글이 정확히 몇 편인지는 아직 아무도 집계하지 못했다. 단독 저술만 해도 500권이 넘는다는 것은 출판 데이터로 확인이 되지만, 공저와 편저, 그리고 각종 칼럼과 서문과 추천사 등까지 그의 저술로 간주한다면 그는 정말 가공할 정도로 글쓰기를 해온 것이다.

 

1940년 12월, 아시모프는 <어스타운딩>에서 잡지 편집자이자 지지자였던 캠벨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로봇을 소재로 한 소설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때 캠벨은 ‘로봇이 따라야 하는 세 가지 규칙’을 정하자고 제안했고, 아시모프는 그에 응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관해서도 안 된다.

(2) 로봇은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1)과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아시모프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이용해서 단편 23편과 중편 3편을 썼는데, 훗날 로빈 윌리암스의 명연기로 영화화된 중편 <2백세가 된 남자(바이센테니얼 맨)>(1976)와 역시 윌 스미스가 주연으로 연기한 <나, 로봇(I, ROBOT)](1950)에 수록된 9편의 단편도 그 일부분이다. ‘로봇 공학’(robotics)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시모프의 신조어로 인정되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아시모프는 이 3원칙의 창시자는 자기가 아니라 캠벨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캠벨은 ‘그 내용은 원래 자네의 작품 밑바탕에 깔려 있던 것’이라며 그 단어와 개념의 창시자라는 영예를 극구 사양했다.

로봇이란 명칭은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R.U.R.)>(1920)에 처음 나왔다. 여기 나오는 인간 모양의 인공 생명체의 이름인 ‘로봇’(robot)은 체코어의 ‘로보타’(rotoba, 일; 노동)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페크 이후에 나온 대부분의 SF가 로봇을 인간의 적수로 규정하는 천편일률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에 반발하여, 아시모프는 로봇이야말로 엄격한 법칙에 따라 운용되는 기계 장치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련의 작품을 썼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파운데이션 시리즈’에 나오는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이라는 단어 역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된 신조어이다. 원래 그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힌트를 얻어서, 은하 제국의 쇠퇴와 부흥을 묘사한 중편 분량의 소설을 써보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캠벨의 제안에 따라 시리즈로 늘어났으며, 단행본으로는 <파운데이션>(1951), <파운데이션과 제국>(1952), <제2파운데이션>(1953)을 시작으로 해서, 무려 40여 년 뒤인 1992년에야 모두 7권으로 완간되었다.

 

심지어 그는 1977년부터 사망 때인 1992년까지는 자기 이름을 딴 <아이작 아시모프 SF 매거진>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이쯤 되면 아시모프는 사실상 그 자신이라는 하나의 브랜드, 또는 장르를 만든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6년의 어느 토론회에서 그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란 명칭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고자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명칭을 건의했던 동료 작가 할란 엘리슨에게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SF 작가이지만 싸구려 대접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명칭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


사실 이후, 그의 말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그의 지적에 대한 엘리슨의 다음 답변이었다.


“당신은 SF 작가가 아니죠. 무려 ‘아이작 아시모프’잖아요.”

듀이의 도서 분류법의 10개 분야 가운데 ‘철학/심리학’을 제외한 9개 분야에 모두 작품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분야의 공부를 하고 그와 관련된 저작을 남겼는지 알법하다. (사실 다른 사람의 ‘철학/심리학’분야 저서에 쓴 서문 등이 워낙 유명해서 사실상 10개 분야에 모두 작품을 남겼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이는 단순히 천재성뿐만 아니라 근면성에서 비롯된 위업이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서도 집필을 계속했으며, 만약 6개월 시한부 생명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의 질문에 “타자기 두들기는 손을 더 빨리 움직여야 하겠지.”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전성기의 아시모프는 집필 속도가 매우 빨라서 심지어 두 시간 만에 단편 하나를 뚝딱 쓰기도 했다. 대신 그는 퇴고를 하는 법이 없었으며, 따라서 아이디어의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문체는 진부하다는 지적을 종종 받았다. 아시모프도 이런 자신의 문학적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글쓰기에 있어서 나는 ‘원시인’이다 (...) 제대로 된 창작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강의를 듣지도 않았다. 작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비록 정통파 유대인 가문 출신이지만, 아시모프는 평생 무신론자이며 합리주의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다. 대신 ‘인본주의자(휴머니스트)’ 자처하여 인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절친한 친구인 칼 세이건처럼 대중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그가 은인이며 친구였던 캠벨과 말년에 소원해지게 된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캠벨이 L. 론 허바드(훗날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가 된다)의 ‘다이어네틱스’ 관련 기고문을 잡지에 수록하자, ‘사이비 과학’을 지원한다며 통렬한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다.

사이언톨로지 본당과 피해입었던 할리우드 스타들

앞서 그가 전업작가를 선언하고는 정작 1950년대 말부터 SF분야에 집필하지 않았던 이유가 젊어서 이미 쓸 만큼 써서 관심을 잃었다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일설에는 이미 유행이 바뀌어서 자신은 더 이상 SF를 쓸 수 없다고 자책하며 슬럼프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한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격려를 받는다.


“아시모프, 당신이 쓰면 그게 바로 SF예요.”

 

이 조언에 감동을 받고 깨달음이 있었던 아시모프는 이후로 글을 쓸 때마다 자신감을 얻기 위해 이 말을 스스로 반복했다고 한다. 우스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유년기의 한 즈음을 그의 책을 모두 읽을 기세로 읽어나가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가진 SF에 대한 상식과 SF소설의 기법들은 모두 그와 그의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받은 작가들에게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는 서른이 되면서 SF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때까지 쓴 소설로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SF자체 브랜드로 불린다. 그 이후 그가 그렇게 다작을 하며 쓴 다양한 분야의 글들 역시 그의 관심사와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집필된 작품들이다.

 

며칠 전에 같잖은 댓글에, 누군가에게 과찬을 옛다 던지며, 지금이라도 맘만 먹으면 소설 한 권은 뚝딱 쓸 수 있을 거라며 침을 발라주는 글을 읽다가 마시던 차를 모니터에 뿜었다. 상투 어구처럼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책이 몇 권이 나올 거야’라고.

소설이 그들에게는 그리 만만한 장르인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써보긴 하고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당신이 같잖은 일기의 연장선상에서 싸질러놓는 그 일상의 낙서가 글이라고 생각하고 플랫폼에서 ‘작가’라고 이름을 붙여주니까 정말 그래 보이나? 그렇다면, 카카오는 마케팅에 아주 크게 성공한 것이라며 자축하겠구나. 하지만 당신처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착각하는 사람, 글을 ‘제대로’ 써보겠다고 하는 소위 작가 지망생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중량 시리즈(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내 글을 좀 꼼꼼히 읽어보도록.)로 <중국 10대 명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언급했더랬다. 이 중량 시리즈의 글은, 정작 이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글들이 아니라, 내 소설을 쓰기 위한 밑 작업 공부로 진행된 것들이라고. 결국 조사와 공부 과정에서 모으고 정리한 그 시리즈들 분량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훌쩍 넘어가면서, 그것들도 나름의 자료로서 읽을 재미가 있으니 풀어보는 것이라고. 더불어 이렇게 많은 분량도 결국 소설에서는 한 두 페이지로 사용되고 말 뿐이라고.

 

그랬더니 어떤 정신 나간 무식한 아낙들이 내가 사전적 인터넷 자료들을 복붙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며 저격 같지도 않은 돌팔매질을 해왔다. 온전한 자기 글은커녕, 남이 쓴 글의 뜻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식한 아낙들의 헛소리에 일대일 개인지도를 해줄 만큼 내 강의료가 싸구려가 아니라 부러 설명하진 않았지만, 이 글을 훔쳐 읽으며 또 뭐 오독할 거 없는지 찾는 그 아낙을 비롯하여, 자신이 쓰는 잡문이 ''이라 착각하는 이들에게, 평생 500여 권이 넘는 서적을 출간한 대작가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 뻔뻔한 면상에 들이밀고 싶어 가지고 왔다.

이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시리즈에서 다룬 인물들이 벌써 150명이 었다. 내가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 격인 머리글에도 적었지만, 이 시리즈는 원래 내가 20여년전 상담했던 환자이자 제자였던 녀석에게 실패한 위인들의 사례를 찾아서 정리해보라며 일종의 심리치료법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실패한 위인에 대해 자료를 정리하려면 면밀히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것이 당연한 선행작업이기 때문에, 응당 찾는 인물들대한 자료를 정리하며 자신의 삶과 비교하게 될 테고, 그렇게 마음공부가 될 것이라는 의도였다.


복붙?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 무식한 눈으로 다시 한번 촘촘히 이 글들을 읽어봐라, 이게 너희들의 수준 낮은 눈에그저 자료의 복붙일 뿐인지.


그들의 생각에는 내가 이 모든 위인들의 속속들이 내용들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기억한 내용을 적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환상을 품고 있었거나 내가 참고한 그 모든 문헌들을 이 글의 뒤에 두툼하게 나열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누차 여러 시리즈의 글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인터넷의 정보들이란, 지식인의 70% 이상이 초등학생들인 실정을 감안컨대, 옥석을 가리는 지식과 안목갖추못하였다면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그저 쓰레기의 바다일 수밖에 없다고. 그중에서도 제대로 된 독해를 통해, 일일이 읽어 옥석을 가려 정리하고 정선(精選)하고 그렇게 정리된 자료를 통해 다시 자기 공부를 하는 것이 제대로된 글쓰기의 시작이다.

그것이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듀이의 분류법 10개 분야 중에서 무려 9개 분야를 섭렵한 아시모프의 집필 이론이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대개의 경우, 아시모프는 일반인들을 위한 해설자 역할을 자처했다. 자신이 그 분야를 공부하면서 정리하며 이해한 내용을 일반 독자들에게 편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저자로서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논어 읽기 시리즈>에 얼굴도 모르는 저 남쪽 지방에서 초등학교 꼬마들을 가르치는 한 구독자께서 너무도 감사하게 ‘공자님과 저 사이에 발검 무적님이라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오솔길을 걷습니다.’라며 댓글을 달아주셨다.

 

그 아낙들처럼 정신나가 똥오줌 못 가리는 사람들만 브런치에서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내 글을 읽는 수많은 교수들, 기자들, 경찰, 검사, 변호사들이 당신들보다 보는 안목이 떨어져서, 인터넷 복붙의 글 덩어리를 구독하고 아침 출근길에 고전을 읽고 마음을 다지며, 매일 밤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침대에 가만히 앉아 내 글을 정독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부족한 글을 늘 읽어주시던 박완서 선생은, 마흔이 넘어 등단하였음에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아주 조곤조곤, 소설로 또는 에세이로 풀어내는 탁월한 글솜씨를 자랑하셨다. 탁월한 글솜씨라고 평론가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던 이유는, 그저 수려한 수식이나 겉모양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만의 개성있는 글에는, 당신들처럼 선량한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중산층이라고 우기고싶어하는 '저층민'들의 불편함을 찔러대는 가시 달린 목소리가 있었고, 그 목소리로 당신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잠자는 척하는 양심을 깨우라끊임없이 소리쳐주셨다.


그 아낙네들의 글이 비문투성이에 기본적인 퇴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낙서라는 점별론으로 치더라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느냐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물으면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할 수준이면서 '복붙? 참글이 뭐가 어째?' 정신 차려라. 정 못하겠으면 접시에 물 가득 담아다 주마. 코가 많이 낮은 듯 하니, 접시에 가득 담아다주마.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에서 시작하여, 한 장르를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할 정도의 아이작 아시모프도 늘 부족하다며 그렇게 평생을 가열차고 겸허히 썼다. 소설? 그거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있는 거, 아니다.


지금 밤마다 연재하는 소설은 이미 원고지 5,000매를 넘어 달리고 있다. 장편소설을 20여권 이상 탈고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소설을 집필할 때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귀에다가 대고 자신들의 대사를 계속해서 떠들어대서 받아쓰기조차 힘든 지경이 된다. 사건과 배경이 영화처럼 원고지 앞에 펼쳐져서 그것을 그대로 담아 적기 바쁜 지경이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 경지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 아직도 착각하나? 지금 당신이 고 있는 일기 수준은 고사하고, 그저 일상의 감정 쓰레기통을 낙서하는 수준의 '것'을 써재끼면서 함께 공부하자고, 공부한 내용 나누자고 쓴 글에다가 뭐가 어쩌고 어째? '그게 활자인지? 글인지 모르겠습니까?' 술 끊고 정신 차려라.

 

당신들이 아이작 아시모프급의 대작가는 고사하고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릴려면 윤회를 3번 정도는 더하되, 그 인생에서 죽어라 밥 먹고 글만 쓰더라도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해주자면, 그런 쓰레기를 발행하면서 서로간의 자화자찬 댓글에 희희낙락하고 있을 정신상태라면 300번을 윤회하더라도 그런 감정 쓰레기만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는 축생(畜生)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어이없는 아낙들의 해프닝을, 같은 공간에서 지켜본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제대로 독해하고, 제대로 쓰고, 제대로 사유하고 있는가?


아시모프가 쓰면 SF가 된다.

당신이 쓰는 것은 무엇이 될 이라 생각하는가?


이제 당신의 반성과 노력을 통해, 그것이 무엇이 될지 결정해야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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