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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4. 2022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귀가 멀었어도

수석 궁중화가의 자리에 올라 세기의 화가로 인정받고야 말다.

1746년에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라곤의 주도 사라고사로 이주해 가톨릭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여기서 사귄 친구 사파테르(M. Zapater)와 주고받은 편지가 그를 삶을 추적하는 가장 주요한 일차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752년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한 마드리드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그림에 있어서만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던 그는 스승인 호세 루산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명화를 복제하는 훈련을 거듭하며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겠다는 목표에 조금씩 다가갔다.

 

17살이 되던 해, 그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그는 곧장 마드리드로 향했다. 1763년, 치렀던 미술 아카데미의 첫 번째 입학시험에서 그는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고 만다. 심사위원 전원이 부적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지원자들 중에서도 만장일치의 최하위 수준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비아냥거림과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연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에 이유를 돌리고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3년이 지난 시험일. 다시 시험장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3년 전에 비해 여지없이 그림실력을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시험 결과는 3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3년 전과 3년이 지나 합격한 이들의 그림을 보고 그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합격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다. 불합격의 원인은, 그의 그림실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궁정에 가지고 있던 연줄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자화상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미술학사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우리에게는 프란시스코 고야로 익숙한 풀네임,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치엔테스(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의 이야기이다.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정화가였으며, 로코코 양식으로 귀족층의 화려한 초상화를 그렸다. 바로크 양식의 풍자적 에칭 판화집을 출판하였고, 난청과 국가의 정치적 난국에 대한 고통으로 말년에는 지극히 어두운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약 60년 동안 화가로 활동하며, 로코코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적 변화를 보여주는 회화 7백여 점, 드로잉 9백여 점, 판화 3백여 점을 남겼다.

<자화상> (1783년)

결국, 시험에 실패하고 그 원인에 분노한 고야는 이탈리아로 유학의 발길을 돌린다. 고야가 이탈리아로 발길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가 고대 문화와 르네상스 고전기의 대가들이 활동했던 주무대이자 명실상부한 미술의 메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탈리아에 도착한 고야는 이탈리아 유수의 미술 아카데미들 가운데 하나였던 ‘파르마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두 번이나 마드리드에서 당한 일이 있었던 지라 이번엔 준비에 만전을 기하면서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익혔다. 그들이 선호하는 화풍에 대한 조사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이미 두 차례 쓰라린 고배를 마셨는데 이탈리아까지 와서 또다시 실패할 수는 없었다.


고야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제출해서 일단 합격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드디어 그가 원하는 대로 훌륭한 평가와 함께 최종 합격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조국을 떠나서야 난생처음 합격 소식을 들은 고야는 합격의 기쁨을 드디어 만끽할 수 있었다.

 

고야는 이탈리아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한 후, 고대와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모사한 스케치북을 들고서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왔다. 때마침 고향 친구 프란시스코 바예우(Bayeu)가 마드리드의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입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예우의 여동생 호세파(Josefa)는 고야와 동갑내기여서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지내던 막역한 사이였다. 1773년에 고야는 호세파와 결혼을 결정하게 되는데, 갑자기 사랑이 불타서 소꿉친구와 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처남이 된 바예우를 든든한 발판으로 삼아 장차 마드리드 궁정 진출에 진출하겠다는 큰 그림의 첫 발이었다.

<파라솔(The Parasol)>,(1777년)

이듬해에 드디어 그의 계획대로,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처남 바예우의 추천으로 궁정의 벽걸이 양탄자(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이는 궁정의 전속 화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작업의 난이도나 수준을 따질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고야의 데생을 밑그림 삼아 완성된 벽걸이 양탄자를 본 국왕 부처는 그의 그림 실력에 감탄하며 그 자리에서 추가로 20여 점의 양탄자 데생을 주문하게 된다.

 

마드리드의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물을 먹은 그가 드디어 그 나라의 최고 상위 권력자인 국왕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고야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모든 계획이 완성되었다고 환호했다. 온 세상이 모두 자기의 손안에 들어온 것은 만족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그의 그림실력에 왕에게 인정까지 받았으니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궁중화가였던 처음 바예우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화가들의 그림이 하찮게 보였고, 이제야 자신의 그림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한껏 우쭐해있었다.

<꼭두각시>

그렇게 한껏 고양된 고야는 사라고사의 필라르 대성당의 천장 벽화를 그리는 작업을 맡게 된다. 고야는 이 작업에서, 당시 미술 아카데미에서 추구하던 조화롭고 균형 잡힌 구성과는 거리가 먼, 자기 특유의 생생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처남 바예우는 고야의 그림이 성스러운 교회의 천장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예우와 의견이 부딪쳐 갈등하게 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고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드리드로 돌아가버렸는데, 불행히도 마드리드에서는 벽걸이 양탄자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로 인해 고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 몰리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얻었다고 착각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져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착잡한 심경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고야에게 다시 부활의 전조를 알리는 기회가 찾아왔다. 왕세자 부부가 이전에 그렸던 고야의 양탄자 데생을 썩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식이 지인들을 통해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왕세자 부부의 주문이 정말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1785년에는 고관 귀족들이 너도나도 고야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겠다고 줄을 서기 시작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고야의 그림이 다른 화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던 데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초상화의 대상이 된 귀족들이 당시 파리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온 고급 레이스와 외국산 옷감을 붓으로 그럴듯하게 부각시켜 그려내는 재주였고, 또 하나는 은빛 반바지나 분홍색 허리띠의 매끈한 광채를 기존의 그림과 달리 근사하게 그대로 그림에 그려내는 탁월한 묘사 기술이었다.

고야의 붓이 스치면 목이나 가슴팍이 훤히 비치는 얇디얇은 비단의 하늘거리는 촉감이 거짓말같이 살아난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고야는 먼저 우아한 의상을 모두 완성한 다음에, 귀족 남녀의 무표정하고 멍청한 얼굴을 붙여놓으면 초상화가 완성되는 방식을 추구했다.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들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실제와 가깝게 묘사되었는가 보다는 외국에서 사 온 값비싼 옷이 제대로 표현되었는지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에 고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 사람을 읽는 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고야의 어려운 고난의 시절은 모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왕세자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1789년에 왕위를 계승한 카를로스 4세의 전속 화가가 된 고야는 경제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유혈 참상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스페인은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고야는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초상화와 활기 넘치는 시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나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한 양탄자 벽걸이 데생을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새로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고야를 다시 궁정 화가로 임명했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정작 그 과정으로 인해, 유명해지고 지금의 위치에 올랐지만, 이제는 그 밑그림 작업을 진행하느라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런 스트레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하필 그 시기 혁명을 거친 프랑스에서 스페인에 대해 선전포고가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179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고야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친구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이 페레스와 함께,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로 여행을 하게 된다.


카디스에 머무는 동안 고야는 심한 병을 앓게 된다. 그것은 1792년의 일이었다. 고야는 당시 거의 죽을 뻔하는 위기에 처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울리고 심한 어지럼증이 나타났다. 고열로 인해 귀가 완전히 먹어버려 옆에서 벼락이 쳐도 들리지 않았다. 어렵사리 죽을 고비는 넘겼고 건강을 다시 회복했지만 양쪽 귀는 영원히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야의 그림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림이 사라지고 섬뜩하고 공포감을 자아내는 그림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산적 떼의 습격, 난파선, 대화재, 정신 병동 등이 청력을 잃은 이후로 그가 즐겨 그리는 그림의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병마에서 가까스로 헤어난 고야는 카디스와 세비야에 들러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즈음에 고야에게 다시 그의 운명을 바꿀 사건이 일어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만하고 매력적인 알바 백작 부인 카에타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알바 백작의 초상화

그녀는 스페인 유수의 전통 있는 귀족 중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히는 최고의 가문 출신이었다. 알바 백작 부인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언행으로 이미 유명인사였다. 법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절대 권력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도 왕가에 필적할만한 위치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털끝 하나까지 관능으로 충만한 요녀, 알바 백작 부인과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고야의 스캔들은 스페인 전체를 들썩거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고야는 알바 백작 부인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림에서 당돌한 모습의 부인은 흙바닥에 쓴 ‘나에게는 고야뿐(Solo Goya)’이라는 글씨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알바 백작 부인의 초상화

그림에서는 알바 백작 부인이 고야와의 뜨거운 사랑을 자랑스레 고백하고 있지만, 오만한 바람둥이 귀족부인이 늘 그렇듯이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관심이 식어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작 부인이 그와의 관계에 소원해져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을 확대한 사진

갑자기 애정이 식어버린 듯 등을 돌린 그녀의 행동에 고야는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상심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상처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히며 따라다녔다.

 

1799년에 카를로스 4세는 고야를 마침내 ‘수석’ 궁정 화가로 임명했다. 그 후 고야는 카를로스 4세 시대의 퇴폐적인 궁정 인물들을 그렸는데, 망나니 기질과 천부적 재능을 겸비했던 고야는 대범하고 아주 정확하게 왕가의 구성원들을 묘사했다.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 〈카를로스 4세의 초상〉,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모든 것이 안정되었나 싶었던 순간, 그의 운명에 다시 파문이 일어나게 된다. 무엇보다도 고야의 내면에 상처를 준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에 들어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모습을 귀도 들리지 않던 그가 목도하게 된 것이다.

〈1808년 5월 3일(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 3rd May, 1808)>

고야는 그 무자비한 살상을 귀가 들렸던 이들보다 더 강렬하고 잊을 수가 상처로 영혼에 새기게 된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그런 그가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혔던 전쟁의 참혹한 장면들을 기록하듯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고야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원을 풀어보겠다는 굳은 의지와 억압받는 인간성에 대한 저항의 외침을 표현했다. 고야는 참혹한 전쟁과 잔인한 살육을 다룬 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제작했다. 1819년에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이른바 ‘귀머거리의 집’을 구입하고, 집 안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리는 14점의 대형벽화를 그렸다.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과 외국 군대의 침략과 그에 따른 참상들을 온몸으로 겪었던 그는 1824년에 스페인을 떠나 망명했던 프랑스 보르도에서 1828년, 82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여담이긴 한데, 그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대표작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에 대한 오해를 몇 가지 풀어줄 필요가 있어 설명하고자 한다. 왜 ‘마야’라고 쓰지 않고 ‘마하’라고 썼는지부터 아는 척하며 지적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그림의 제목은 <La maja vestida>와 <La maja desnuda>로, 여기서 ‘maja’의 정확한 발음은 ‘마야’가 아니라 는 ‘마하’라고 발음해야 한다. 아마도 처음 화집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잘못된 발음을 그대로 한국어로 바꾸면서 발생한 웃지 못할 해프닝인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maja(마하)’는 그림 모델의 이름이 아니고 스페인어로 ‘멋쟁이’에 해당하는 남성 명사 ‘majo’의 여성형 명사로, ‘스타일 있게 옷을 잘 입는 여성’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 작품은 모델이 누구인지부터 상당히 많은 뒷이야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작품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했던 당시 부유한 남자들을 꼬셔서 정복(?)하고 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알바 공작부인이 고야의 작업실에 화장을 받으러 출입하게 되면서 내연의 관계로 발전하여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는 설과 알바의 공작부인을 연모했던 고야가 얼굴은 공작부인의 얼굴을, 몸은 윤락녀의 몸을 그려 합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림이 공개되고 난 후, 당시 누드화를 엄격하게 금했던 교황청의 소환으로 재판정에도 회부되었으나 워낙 고야가 유명한 화가였고 이 그림 자체가,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고도이 총리의 의뢰를 받아서 만들어진 후 총리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벌은 면하고 원래 있던 누드화에 옷을 덧칠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누드화를 자신이 소장하고 싶었던 고야는 꼼수를 써서 <옷을 입은 마하>를 그리게 된 것이다. 이후 누드화는 창고에 갇혀 세상에 나오지 못하다가 1900년에 와서야 간신히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의 대표작 중에 어두운 후기 화풍을 드러내는 작품에는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가 있다. 자신의 지배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한 사투르누스가 공황에 빠진 채로 아들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그린 상상화로, 그가 집에 칩거하며 그려놓은 벽화를 캔버스에 옮긴 것이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를 라틴어로 부르는 이름이다. 사실 그림에서의 모습과 달리, 로마 신화에서, 사투르누스는 제우스에게 쫓겨난 후에도, 도시를 세우고 그 시대를 ‘황금의 시대’로 이끌었던 덕 있는 군주로 설명된다.


고야가 사투르누스를 이렇게 흉측한 괴물로 묘사하게 그린 이면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쳐들어오고, 그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무자비한 폭정을 행하면서 폭정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그가 죽기 5년 전에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고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한 것은 그러한 염증에 기인한 것이다. 들리지 않는 귀를 갖게 되면서 그는 시각적인 것에 더 큰 예민함을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잔인함을 보고 난 충격 이후, 전쟁에서 고문이나 총살, 그리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엔 편집증에 빠진 왕의 폭정으로 인해 다시 벌어지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그들의 광기를 화가로서 그대로 드러낸 것이 바로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림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예술가에게는 아주 큰 자산이다. 그는 젊고 재능 있었지만,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이유로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낙방한다. 처음은 시골에서 올라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3년이나 절치부심 준비하고서도 시험에 떨어지면서 세상을 알게 된다.


그의 일생을 돋보기로 들여다본 지금이라면 당신도 알겠지만 그는 머리가 없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3년이나 노력하고 준비해서 다시 도전한다. 그것은 그가 시험에 한번 떨어진 것으로 좌절하거나 기죽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그렇게 출세를 위한 안배를 치밀하게 짜고 소꿉친구와의 결혼을 통해 궁중화가가 되어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굴었지만, 그 오만함은 그를 다시 나락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얻어 수석 궁중화가에까지 오르게 되지만, 병으로 청력을 모두 잃는 고난을 맞게 되고, 요녀에게 휘둘려 농락당하고 버려지는 사랑의 시련까지 얻게 된다.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다시 독재자가 벌인 전쟁의 참상을 아무런 소리도 없이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 그의 영혼은 더없이 찢기고 손상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저 세상으로부터 숨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과 자신의 귀를 대신하여 들었던 영혼의 절규를 그림에 담아내며 독재자들과 전쟁의 참상이 남긴 모습들을 사진보다 더 적나라하게 벽화에 미친 듯이 그려냈고, 화폭에 담아냈다.

<감람동산의 그리스도(Le Christ au jardin des oliviers)>

당신이라면, 과연 당신이라면 어려서부터 원하고 꿈꾸던 대학에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인연이 없고 연줄이 없어 합격하지 못하다가 결국 인연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올라가게 되면 그 자리에 만족하겠는가?


내가 충분한 능력이 있고, 내 재능이 저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확인했음에도 그들만의 리그에 속하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나락까지 내팽개쳐지고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병을 얻어 죽다 살아났지만, 귀머거리가 되어 평생 들었던 것을 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오직 감각이 집중된 시각을 통해 아름다움이 아닌, 전쟁의 참상과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비명을 영혼으로 들으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렸고, 자신의 들리지 않는 귀에 외쳤던 그 영혼들의 목소리를 그림에 담아냈다. 결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들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을 통해 계속해서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당신이 정말 붙었으면 하는 시험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권력을 쥔 것들의 키득거림에 빼앗기고 피눈물을 쏟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모른다 하더라도 당신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리그에 속하지 못하고 치이고 배제되고 이용당하고 자의와는 상관없이 ‘아랫것들’로서의 삶으로 내쳐졌을지도 모른다.

<눈보라(겨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재능과 당신의 노력과 당신의 의지가 꺾인다고는,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은, 당신일 뿐, 다른 누구도 어떤 다른 존재도 아니다.


당신은 그간 묵묵히 노력으로 쌓아온 당신만의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것 같고 그들만의 리그인 듯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당신의 노력과 당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이와 세상이 온다.

 

그때까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고, 그 노력을 경주하려는 의지를 결코 꺾지 말라고 당신의 곁에서 지금 내가 외친다.


당신은 충분히 잘 살아왔고, 잘 견뎌왔다.


당신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여명일 뿐, 그 캄캄한 어둠은 결국 빛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의 빛나는 가치를 아무도 없는
그 어둠속에 혼자 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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