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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7. 2022

제대로 스승에게 배운 적도 없고 아이가 일곱이어도

일류 여성 예술가로 한국 여성 최초로 화폐권에 새겨지다.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신명화(申命和)는 본관이 평산으로 고려 태조 때의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손이다. 신명화의 부친인 신숙권은 영월군수로 재임한 적이 있고, 이때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을 지은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신명화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진사(進士)가 되었을 뿐 관직이 나가지 못하고, 그저 자기 공부만 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16세가 되던 1519년, 신명화가 44세 되던 해에,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되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으나,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던 덕에 참화를 면했다.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어머니를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는 바람에, 그녀도 외가에서 태어나 내내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던 아버지와는 16년간이나 떨어져 살았고, 가끔 강릉에 아버지가 찾아와야만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독특한 가정상황에 대해서는 의아해할 사람들이 많은데 약간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어머니 이 씨 부인은 본관이 용인이며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손녀이다. 이 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인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최치운은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인물로 강릉에서는 나름 유명한 가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이 씨 부인의 어머니를 친정에 지내게 하면서 어머니도 자연스레 강릉에 살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구축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인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는,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가 여성의 거주지 중심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시대적 배경과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던 전통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인 이 씨 부인이 친정에서 거주했던 상황은 지금의 기준이나 조선 후기에 가부장적 사회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상한 것이지, 당시에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화가. 호는 사임(師任)으로 13살 때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처럼 되겠다는 포부로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다. 성이 신 씨이고, 호가 사임이며, 워낙 유명하게 언급되는데, 주로 남자들만 호칭하던 조선시대에 여성임을 표기하기 위해, 영어의 ‘Mrs.’처럼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이던 ‘당(堂)’을 붙여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라고 부르게 된, 사임 신 씨의 이야기이다.

 

저 유명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고, 대한민국 지폐의 모델들 중 유일하게 홍일점으로 만장일치로 선정되어 오만원권 지폐의 모델로 지정되었다. 이름이 신인선 또는 신선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문헌에 나온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성명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도 없이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모방하여 그리며 그림실력을 키워나갔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 씨와 할머니 최 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시와 그림, 글씨 등을 모두 외가에서 공부하게 된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16년간이나 아버지 신명화는 내내 서울살이를 하며 가끔씩 강릉에 들르는 방식으로 아버지와는 떨어져 지냈다.

 

사임당은 1522년, 19세에 덕수 이 씨 가문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친정어머니인 용인 이 씨와 살았다.


용인 이 씨가 아들만 없이 딸만 다섯을 낳았던 탓에, 딸인 신사임당이 아들처럼 어머니를 모신 것으로, 앞서 설명했던 어머니와 똑같은 전통을 셋째 딸인 그녀가 했던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워낙 친정인 강릉에 자주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완전히 서울로 오게 되는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청진동)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다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자주 몸이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상태가 워낙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다가 눈을 감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한창 민감할 즈음이던 10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이이는 금강산에 들어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을 정도로 심한 방황기를 거쳤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하여 외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정 때문에 안정을 찾고, 어머니에 대한 효도도 외할머니에게 지극정성을 보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고, 그와 관련하여 탄생지인 오죽헌이 유적으로 등재되었고, 묘소는 조운산에 모셔져 있다.

오죽헌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산수도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류 화가로서 서울 양반가에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소세양(蘇世讓)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 신 씨의 그림 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또, 율곡의 스승이던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그녀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해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한 뒤, 그녀를 안견(安堅) 다음가는 화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충도(草蟲圖)>

그녀의 그림에는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신사임당의 글씨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면 그녀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까지 적었다. 그 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이 신사임당의 글씨를 평가한다.

“정성 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각된 원본이 되는 글씨는, <신사임당 초서 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이라 불리는 여섯 폭짜리 초서인데, 이것도 오늘날까지 전해진 사연을 살펴보면 기구하기 그지없다.

신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 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 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산동 최씨가에서 보관하던 이 초서는 1971년 강릉시에 인계되어 율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당대의 재능 있는 여류화가로 유명세를 떨치던 사임당이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훌쩍 지난 17세기 중엽이다.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을 극찬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아들인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이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한 과정으로 인해서였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성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150여 명의 넘어가는 이 즈음에 뒤늦게나마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만 인식되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려운 기본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워킹맘을 자처하는 철딱서니없는 이들이 이 시대에는 넘쳐흐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침이 되기도 하겠으나 그녀가 당당히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몇 안 되는 일류 여성 예술가로서 제대로 된 예능 교육을 받거나 수련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 정점에 오를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소개하고 싶어 그녀의 일생을 들고 왔다.

 

실패한 대가들의 인생인데 그녀가 무엇을 실패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가장 큰 전제는 그녀가 어떤 스승에게도 전문적으로 그림이나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16년간이나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배우거나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었다. 물론, 외할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것들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여성 중심이라고 하여도 여성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이 분석한 신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자양분은 크게 두 가지로 꼽는다. 첫째로는 현명하고 다재다능했던 어머니의 훈조를 통해 제대로 된 교육과 환경을 제공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그렇게 자유롭게 자란 성품과 성향을 받아줄 자상하고 포용력이 깊은 남편을 만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반대로 유교 사회에 보이는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문화를 강조하는 허세나 부리는 허울뿐인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먼저 결혼 전 19살이 되기 전까지의 그녀가 자라온 환경을 살펴보면,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 이가온의 학문을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그대로 전수받았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외가가 중심이 된 교육은, 모두 강릉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다와 산이 모두 갖춰졌던 강릉은 서울과 달리 그녀의 배포를 크게 키워준 호연지기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른바 양반가 사대부의 여식이 갖춰야 할 허례허식에 갇혀 그녀가 꼼짝달싹 못하게 할 만한 분위기가 그녀의 집안에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조선시대 중기라고는 하지만, 열 살도 되기 전에 자신의 호를 주 나라 문왕의 어머니의 호로 자임하는 것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대 양반가 규수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도 딸만 있는 집안에서 자랐고 자신 역시 딸만 다섯을 낳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 교육을 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딸만 있는 집안에서 언니와 동생과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이 지냈던 19년이 그녀의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준 것이다.

자신 역시 어머니와 같이, 결혼하고 나서도 20여 년을 강릉에서 지냈던 것은 당시 전통에서도 용인이 된 것이었지만, 아마도 자신이 자란 환경에 대해 선험적 긍정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기도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38살이 되던 해에,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신사임당의 효심이 얼마나 깊고 절절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 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기본적인 테크닉을 배우는 성장기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원숙하게 완성시키는 시기가 더 중요하다. 그 시기는 그녀에게 있어 결혼과 함께 닫혀버릴 수도 있었다. 나중에 다루게 될 그녀보다 60년 후에 태어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180도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신사임당은 남편복도 컸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그녀가 가진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남자였다. 특히, 그녀가 가진 예술적 재능과 예술성을 지지하고 더 원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물론, 남편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도량이 넓은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편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당시 문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그만한 식견을 갖춘 아내와의 대화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아 대화를 통해 그녀의 탁견(卓見)을 늘 배울 것이 있고, 받아들일 것이 있다며 받아들였다. 그러한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신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 그 문하에 가서 교류를 하며 지냈었다. 참고로 이기는 1545년(인종 원년)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선비들 간에 모해(謀害)를 주도하고 오직 권세만을 탐내는 당숙의 승승장구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하며 당장 그 집에 발길을 끊고 홀로 학문에 정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권하였다. 아내의 조리 있는 조언에 이원수는 바로 당숙의 집에 하던 발길을 끊고 홀로 학문에 정진하였고, 뒷날 사화를 통해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할 때 그 재난으로부터 자신과 집안을 보호할 수 있었다.

 

오천원권에 새겨진 율곡 이이의 초상

흔히 말하는, 가문에 대학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3代 전부터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율곡 이이라는 위인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이러한 3대 이상에 걸친 교육과 가풍, 그리고 올바른 부모의 본보기 되는 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낳은 자녀 7명 중에서도 그녀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이 바로 셋째 아들 이이(李珥)였다.


비록 그가 16살이 되던 해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긴 했지만, 이이가 이후에 저술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기를 보게 되면 셋째 아들이 어머니와 얼마나 가깝게 지내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역으로 추적해볼 수 있다. 이이는 이 기록을 통해 어머니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에 대해 굉장히 세심한 부분까지 면밀히 기록하는 듯이 서술하며 자신의 절절한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셋째 아들이 워낙 큰 대학자여서 다른 형제들에 대해 주목받지 못한 듯 하지만, 그녀의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그녀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당대에 이름을 높였다.

 

물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편 이원수는 아내가 죽으면 재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장남 이선과 연배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자 권 씨를 신사임당 생전부터 첩으로 삼았고, 신사임당이 죽자 권 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이후 맏아들 이선과 새어머니 권 씨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싸웠을 정도였고, 셋째 아들 이이는 질풍노도의 16세에 어머니의 탈상 이 끝나고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가출 아닌 가출도 한 것이다.


물론 부부의 일이고, 남녀 사이의 일이라 언제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그리고 왜 이원수가 뒤에 그런 일탈을 벌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식들이 어머니의 교육적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바르게 자랐고, 어머니에게 지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시비 구분만큼은 명확하다 할 수 있겠다.

 

혹시나 오독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먼저 확실하게 정리해준다.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웠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지엽말단적인 것이다. 실제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준 것도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죽기 직전 그녀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거의 데릴사위와 같이 뼈대는 있으나 집안이 가난한 외아들을 딸의 남편으로 정해준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재능이 넘치고 발랄하기 그지없던 셋째 딸이 명문대가 서울 양반 가문에 보냈다가 얼마나 사그라들고 상처 입을까를 염려하여 데릴사위의 개념으로 이원수를 점찍어 시집보낸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풍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혼하면서도 상당히 부유한 가문이던 신사임당의 재산은 그대로 신사임당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즉, 친정아버지가 권력이나 부가 비슷하여 자기 딸이 종속되지 않도록 일부러 부족하고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명문가의 사위를 고르고 고른 것이 이원수였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알량한 돈 몇 푼 번답시고 워킹맘을 자처하며 아침마다 나가서 저녁에 힘들다며 가족들의 식사마저도 차리기를 우습게 보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 기사를 보곤 한숨이 나온다. 그녀들이 정말 대단한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들의 자식을 보면 안다. 그녀들은 내내 돈 때문에 일을 한다고 입에 불만을 달고 산다. 그것은 자아실현이나 자신의 꿈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키우고 생활을 하기 위한 생계비 때문에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버는 돈이 자녀 두 명 기준으로 얼마 정도 벌어야 손익이 맞는지는 그녀들도 안다.


간단한 집안 살림과 아이를 봐줘도 100만 원을 넘게 받는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않은 그 모든 가사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까지 하는 일이 과연 그녀들이 하는 그 알량한 월급보다 가치가 적을까? 결국 그녀들은 나가서도 변변치 못하고 집안에 있더라도 그녀의 역할을 조금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래저래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신성화된 과정은 앞서 설명했지만, 그녀가 죽고 나서 100년이나 흐르고 난 뒤 이념으로 활용하고자 우암이 율곡을 극찬하기 위해 끄집어낸 것 따위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인생이, 그 사실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신사임당은 50이 되기 전까지 결혼생활 30년 동안 자녀를 무려 7명이나 낳았고, 가정 살림부터 아이들을 챙기는 모든 교육과 옷가지를 챙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손을 거쳐서 했으며 자신의 예술활동에도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 된 동양화 작품을 게다가 산수화나 정밀묘사를 그녀의 작품만큼 해내려면 하루 이틀 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래도 그녀는 어느 하나 자신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에 소홀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에 ‘당’이 들어가면서까지 남성들 투성이인 유교사회에 그녀를 일류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근거이다. 당신은 그러한가? 당신이 여성이라서 당신이 능력이 있음에도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여성들만 일하는 사무실에 가면 동성 간에 당신만 린치 당하고 따돌림받는다고 또 투덜거리고?


아니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그런 자들과 불공평과 불합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서 48세까지 밖에 살지 않은 이가 일류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은 지금의 현실보다 수백수천 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워킹맘이라서 가사에 소홀하며 예술합네 집안일과 아이들을 내팽개쳐가며 지냈다면 그녀는 결코 ‘일류’로 우뚝 서지 못했을 것이다.

길게 구차하게 더 설명하는 것은 중언부언일 뿐일 듯하여, 자신의 삶이 여성이라서 어쩌구 하는 이들이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됨을 그녀의 삶을 반증한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다. 혼자만의 삶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까지 낳으며 사는 삶이 그리 쉬울 줄 알았나?


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멀쩡히 할머니에게 맡기고 몇 푼 안 되는 돈타령을 해가며 별다방에 가서 멋지게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다니며 코에 바람을 넣는 것이 워킹맘이라면, 정말로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고, 아이를 챙기며 자신의 꿈을 완성시키기 위해 쌍코피를 쏟아가며 스타킹이 터진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진짜 ‘워킹맘’이 억울해서 울 것이다. 그따위 것들과 한 줄에 세우지 말라고.

 

지금도 그 몇 푼의 돈 때문이 아닌, 자신의 꿈도 접고 내 아이를 내 사랑으로 키우겠다며 힘겹지만 아이들을 보듬으며 아픈 목을 만지며 아이들 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의 육아를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무시하지 마라. 대가를 이룬 자식들의 어머니가 워킹맘이 많았는지 아닌지는 굳이 통계를  따져보지 않아도 우리는 명백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꿈을 이뤄나가기 위해,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식들에게 당당한 엄마의 모습이고자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뛰고 있는 워킹맘에게 누가 되는 짓을 하며 그들의 곁에 슬쩍 묻어갈 생각일랑 하지도 마라.

 

돈도 못 벌면서 워킹맘 흉내며, 브런치에 글 같지 않은 방학 일기 같은 일정이나 쓰고, 커리어우먼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당신이 양심의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당신이 버는 월급은 지금 ‘제대로’ 당신 자식 봐줄 아줌마 월급에도 못 미친다. 적당히 용돈이랍시고 던져 주며 친정엄마나 시어머니에게 애들 맡기고 애들이 제대로 교육이 안되어 당신과 같은 어중간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나중에 한탄하지 마라.

 

당신에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하고 판단해라.

꿈을 이루는 모습을 내 아이와 자신을 위해 보여주고 말겠다며 아이가 보고 싶어도 이를 악물고 달리는 워킹맘을 모독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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