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18. 2022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내내 견제당하고 죽음을 위협당하고도

‘황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전설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다.- 1편

B.C 100년, 로마 공화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로마를 대표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유년기를 보내던 10대 즈음의 로마는 원로원 귀족파(옵티마테스)의 거두 술라의 살생부로 대표되는 독재정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소년가장이 되었고(기원전 85년) 16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 디알레스(Flamen Dialis)’로 선출되었다(기원전 85년). 그리고 원래 기사 계급의 ‘코수티아’라는 여성과의 약혼을 깨버리고 당시 반 술라파의 수장이던 루키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장인인 루키우스 킨나가 B.C 84년에 급작스럽게 죽고 2년 뒤에 고모부와 장인과 대립하던 술라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술라는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마리우스(그의 고모부) 일파의 대숙청을 시작한다. 그 역시 계보상으로는 고모부를 중심으로 했던 장인이 주축으로 움직인 마리우스 일파에 속했지만, 술라는 여러 사람의 만류로 아직 10대(19세)였던 그를 처음부터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고,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는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절하고 잠적해버린다. 살생부에 다시 오르게 된 카이사르는 우선 모든 재산과 아내의 지참금이 몰수당하고 플라멘 디알레스 직위도 박탈당한다.


그렇게 숨어 지내던 와중에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와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탄원, 그리고 로마에서 존경의 대상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성 신관들이 로마를 대표하는 율리우스 가문의 대를 끊을 작정이냐고 협박성 항의를 하는 바람에 결국 다시 그를 사면해준다. 결정적인 그의 사면에 힘을 썼던 것은 원로원의 유력 가문이었던 외가의 강력한 영향력 덕분이었다.


당장 그의 외할아버지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만 하더라도 집정관 출신에, 옵티마테스의 핵심 멤버로 한때 옵티마테스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포풀라레스의 영수 마리우스에게 당당히 저항할 만큼 강단이 있던 인물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군인, 성직자, 저술가. 황제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황제 개념을 최초로 확립시킨 인물로 자신은 정작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황제로 불리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3두 동맹을 맺고 콘술이 되어 민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방장관으로서는 갈리아를 정벌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이야기이다.


정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켜 1인 통치시대를 열어 각종 사회정책, 역서의 개정 등의 개혁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브루투스 등에게 원로원에서 암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공화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해 로마 제국이 되었다.

 

정작 본인은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이름 자체가, 양자이자 정치적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어지며,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네로 이후 오토 때부터 로마 황제 제호 기본 틀로 정착되면서 황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독일어권에서 황제를 이르는 ‘카이저’라는 단어와 슬라브어권의 ‘차르’라는 단어 자체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비록 술라가 사면해주었지만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때 사제직 박탈이 전화위복이 된다. 로마의 플라멘 디알레스는 로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서 군인 같은 직업을 맡을 수 없었는데 플라멘 직위가 박탈된 카이사르는 일반인의 신분으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B.C 81년부터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던 마르쿠스 테르무스의 부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평생을 따라다닌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게이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소문의 배경은 카이사르가 함대 차출을 위해 동맹국 비티니아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니코메데스의 궁전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당시 로마인들이 혐오하던 그리스 동성애 문화에 맞춰 카이사르가 몸을 팔았다는 것이다.


훗날 니코메데스 4세가 죽으면서 비티니아 국토 전체를 유증의 형태로 공화국 로마 정부에 넘겨준 것도 카이사르가 늙은 니코메데스 4세를 홀렸다는 지저분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게 군인 시절 게이 루머에 시달리던 카이사르는 미틸레네(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에 인접한 섬) 전투에서 동료의 목숨을 구해 오크나무 시민관을 받으면서 이미지를 회복하고 킬리키아 전투 등 아시아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로마에서 현직 집정관인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킬 때 동참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했고, 레피두스의 반란이 진압된 뒤 변호사로 나서서 전직 집정관이자 마케도니아 총독이던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총독 시절 비리 혐의로 고발한다. 비록 재판은 흐지부지됐지만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재판 때 보여준 변호사로서의 그의 웅변 능력 등은 상당했다고 한다.


당시 부패나 비리를 저지른 전직 총독 등 높은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거리낌없이 비판을 가하고 고소를 날려대면서 그는 대중적 인지도와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이 당시 그의 능력과 기개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대강 다음과 같다.


한창 변호사로 잘 나가던 카이사르는 수사학 공부를 하러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 몰론에게 유학을 결정한다. 에게해를 건너던 중에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해적 두목이 카이사르에게 몸값으로 20 탤런트를 요구하자, 대뜸 화를 내며 “내 몸값이 고작 은 20 탤런트냐? 나는 못해도 은 50 탤런트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꾸짖고서 하인을 시켜 돈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이에 해적 두목은 오히려 그를 후대했고, 해적들에게 잡혀 몸값이 도착하기 전까지 매우 당당하게 큰소리를 쳤고, 그 와중에 자신의 자작 시를 낭독하는데 그걸 듣다가 잠들어버린 해적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하는 패기를 내뿜는가 하면, 나중에 해적들을 싹 잡아들여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몸값을 주고 풀려나자마자, 아시아 속주에서 함대를 모아 와서 해적들을 깡그리 체포하여 노예로 팔자는 총독의 제안을 거부하고 공언한 대로 모두를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B.C 74년 카이사르가 로도스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폰투스 왕국이 소아시아를 다시 침략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비를 들여 군대를 모아 소아시아 도시들을 도왔고, 그동안 로마에서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폰투스 왕국을 물리친다.

 

B.C 73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고, BC 72년에는 선거를 통해서 대대장(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된다. 실제 정부 공직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돈이 없어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의 빌라에서 사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B.C 69년 카이사르는 안찰관(Aedilis)에 선출된다. 동시에, 이 덕분에 원로원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절에 아내인 코르넬리아와,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였던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죽게 된다. 카이사르는 아내와 고모의 장례식을 주관하며 로스트라(공공연단)에서 추모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자신이 확고한 마리우스파임을 천명하며, 자신은 베누스 여신과 고대 로마 왕가의 후손이지만 마리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일종의 출사표에 다름 아니었다. 그때부터 술라파와의 전면전을 그는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술라파 의원이자 현직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에 동참하라고 권유받지만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불안해하는 술라파 정치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카이사르는 술라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정치적으로는 폼페이우스파였으며, 안찰관으로서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서 그를 위해서 법안을 발의하기도 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절 카이사르가 스페인의 도시인 가데스(카디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고 알렉산더는 나와 같은 33세에 세계를 정벌했지만 나는 아직 역사가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B.C 65년, 재무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온갖 축제와 이벤트들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파격적인 정치활동을 재개하는데, 문제는 이 비용의 일부를 사비로 대는 바람에 빚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빚의 대부분은 크라수스에게 빌린 돈이었다.

 

B.C 63년, 카이사르는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사제직)’ 선거에 출마한다.

선거자금이 많이 드는 선거였고,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한 인사들이 선거에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두 후보들이 싸우는 과정의 어부지리를 통해 그는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 로마 종교 최고 사제직을 통해 그는 로마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결정권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지게 된다.


예컨대, 키케로에 앙심을 품고 호민관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평민의 양자가 된 클로디우스 같은 경우, 스스로 평민으로 강등되기 위해서 종교적 절차가 필요했는데, 카이사르가 최고 사제로서 이를 승인해주어 법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

 

B.C 62년 카이사르는 법무관(Praetor)으로 선출된다. 이미 마리우스 파임을 공공연히 커밍아웃해서 술라파에 견제를 받던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터진 카틸리나 음모에 카이사르가 관련되었다는 강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 인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카이사르를 실각시키려 시도한다.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그들의 공격은 실패했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법무관직을 수행하고 난 뒤,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현재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쌓는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B.C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41세의 나이에 드디어 집정관에 지원하게 된다. 원로원은 반체제 인물로 낙인찍힌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출을 방해하기 위해 그에게 개선식과 집정관 후보 등록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당시 규정에는 집정관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직접 로마 시내에 들어와 입후보 지원서를 내야 했는데, 개선식 이전엔 로마 시내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불가능한 상황을 그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과감하게 개선식을 할 권리를 포기했고, 이것이 못내 아쉬워, 로마 시내에 들어올 때 백마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집정관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는 우선 폼페이우스와 접촉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창궐하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최고의 정치적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폰투스, 유다, 시리아를 정복해 조국의 영토를 넓힌 승전 장군이었으며, 전쟁이 끝나 백수신세가 된 휘하의 부하들 수만 명에게 생계를 위한 농토를 지급해달라는 요청을 원로원이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원로원에서, 부패한 정치가들이 늘 그렇듯이 전쟁영웅 폼페이우스가 군사적으로 무능하던 원로원을 위협하는 것에 상당히 껄끄러운 반감을 보였고, 동시에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국유지를 반납하기 싫다는 고약한 심사가 깔려 있어 강짜를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손을 잡게 되고, 여기에 당시 로마 최고의 거부(巨富)였던 크라수스가 합류하면서 이른바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여기서 이들이 맺은 협정의 내용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서 카이사르에게 필요한 득표 수와 무력을, 크라수스는 선거 운동과 당선 후 막후 공작에 필요한 거액의 정치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카이사르는 당선된 후 집정관의 자격으로 이들이 원하는 정책을 발의해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삼두 협정의 힘을 이용하여 집정관에 무난히 당선되었고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저 유명한 ‘율리우스 농지법’을 민회에서 통과시킨다.

 

‘율리우스 농지법’이란, 로마의 국유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자는 법안으로 당시 정계에선 일종의 금기와도 같았던 것으로 이 농지법을 주도한  B.C140년대의 그라쿠스 형제와, B.C 100년대의 사투르니누스 같은 호민관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첫 업적으로 이것을 무난히 이뤄낸 것이었다.


다만, 그라쿠스의 농지법과는 목적과 법안 내용에서 차이가 조금 있는데, 그라쿠스는 원로원에게 국유지 한계치 이상의 양은 소유할 수 없게 규정하고 빈민들에게 임대시켜 정착시키게 하는 급진적인 내용이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정착시키는 땅을 주는 목적만이 담긴 법안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그렇게 첫 성공적으로 통과시킨 법안을 통해 국유지 임대권의 매매가 인정되었고(임대 20년 이후), 원로원 귀족들이 장악했던 캄파니아의 옥토는 제외되었으며, 몰수된 자에게는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전리품을 팔아 보상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방해하려던 원로원의 세력에 대해, 폼페이우스의 무력과 크라수스의 재력, 그리고 카이사르의 정치력이 합쳐지면서 삼두정치는 압도적으로 그들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비공개였던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게 한 것도 이때의 성과였다. ‘디우르나(diurna)’는 ‘매일’이라는 의미로, 후일 언론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저널(journal)의 어원이 되었다.

 

동료 집정관이자 정치 성향상 정적이었던 비불루스는 정치적, 개인적 이유에서 카이사르를 방해하기 위해서라도 카이사르의 독단적 행보에 저항했으나 민회에서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전직 군인들에게 맞아 죽을 뻔하다가 도망친 이후, 종교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태업 상태에 돌입했고,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는 한동안 원로원파에게 극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이 꽉 잡고 있던 민회나 개혁을 원했던 일반 시민들, 그리고 무산자(無産者)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다. 결국 카이사르를 포함한 삼두는 성공적인 집정관 임기를 보내는 데 성공하고, 덕분에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집정관에 취임했던 기원전 59년은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던 해’라는 웃픈 농담이 회자될 정도로, 방해자 비불루스는 무시되었다.


그야말로 민중의 승리였다. 로마군이 포에니 전쟁 등에서 엄청난 영토를 얻었는데 그걸 원로원 의원들이 죄다 빼돌려서 자기 농장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정작 고생한 로마의 평민 군인들이 굶어 죽게 생겼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이미 정치적 명분과 대중의 지지까지 카이사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점점 만료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한직(산림과 도로 관할)으로 보내버리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삼두정의 배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임지를 갈리아로 바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임지를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헬베티 족(지금의 스위스 안팎에 거주)이 민족 대이동을 하려고 준비 중인 사실을 파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헬베티 족은 민족 이동을 위해 3년간의 준비를 하였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을 때는 이들이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헬베티 족이 갈리아 내부로 침입한다면 갈리아 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집정관 임기 이후 군사적 업적을 세울 기회를 노렸던 카이사르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가 헬베티 족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그가 저술한 <갈리아 전기>에서 단 보름 만에 헬베티 족에 맞서기 위한 5개 군단을 소집했고, 이 중 3개 군단을 새로 뽑았다고 서술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카이사르는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갈리아 제패라는 업적을 이뤄내기 위해 그곳을 향한다.

 

카이사르가 부임하던 해, 헬베티 족이 고향 땅을 떠나 갈리아 내부로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헬베티 족은 전(前) 갈리아의 풍요로운 영토를 힘으로 빼앗은 뒤 전(前)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 원정을 위해 이들은 3년의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준비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3년간의 준비가 끝나자 헬베티 족은 마을을 전부 불사르고 자신의 영토를 지나 갈리아로 쳐들어간다. 우선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신을 보내 이들이 로마 속주 통과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만일 이들이 통과를 무리하게 시도한다면 무력으로 저지하겠다는 경고를 확실하게 한다. 할 수 없이 이들은 기회를 엿보았으나 카이사르가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서둘러 건설해놓은 강(江)의 방책을 보고 단념하였다.

 

결국 하이두이 족의 유력자 둠노릭스의 중재를 통해 이들은 세콰니족 영토를 거쳐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과는 달리 세콰니, 하이두이 족 영토를 지나면서 다시 본능을 발휘하여 약탈을 시도했고 하이두이 족의 지원 요청으로 자연스럽게(?) 개입한 카이사르가 이들을 쳐부수게 된다.

 

그 뒤 카이사르의 예상(?)대로, 갈리아인들은 족장회의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게르만족을 무찔러달라는 요청을 정식으로 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까지 올라온 뒤 당시 네르비 족 영토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게르만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결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시켜버린다.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사비스 전투에서 로마 세력이 들어온 것에 반발하는 갈리아 북부인들을 상대로도 큰 승리를 거둔다. 그 뒤 4년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의 여러 형태의 항거와 도발을 진압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 영토에 침입하거나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등의 알렉산더를 꿈꾸며 상상했던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에서 자신의 총독 임기를 연장시키는 데도 성공하며 군사적 업적과 경험을 단단히 다지는 기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임기 7년째가 되던 해엔,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도한 갈리아 전체 민족의 반란의 진압에 나섰지만, 이들의 초토화 작전에 난항을 겪게 된다. 갈리아족은 카이사르군의 진격로에 있는 마을들을 완전히 불사르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그야말로 완벽한 청야(淸野) 전술을 구사하며 카이사르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젊은 데다 당시 힘이 없던 부족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은 일사분란한 로마군 같지 않았다. 특히 아바리쿰에 있던 부족들은 그의 명령에 자주 불복하였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의 공격에도 자신들이 견뎌낼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그들이 자신만만해할 만도 했던 것이, 이들의 도시는 강과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이미 7년 차에 접어든 전투라면 이골이 났던 우수한 지휘관, 카이사르와 그간의 다양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무적 로마 군단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학살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야(淸野) 전술을 주장했던 베르킨게토릭스의 발언권은 그들 군대 내에서 매우 강해졌으며, 그 결과 갈리아인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력을 인정하게 된다.

특히 12만에 달하던 아바리쿰 거주민들의 몰살은 갈리아인들이 마을과 터전을 자신들의 손으로 불사르는 게 더 낫다고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 결과 베르킨게토릭스는 거의 완벽한 수준의 청야(淸野)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현지 조달밖에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은 보급이 끊기며 난항에 처하게 된다.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그를 생포하겠다는 무리한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게르고비아로 진군한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결정적인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자신의 10개 군단에서 4개 군단을 떼어 부관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부족을 동시에 공략토록 한 작전을 펼친 것이다. 때문에 그의 병력은 아바리쿰을 정면 공격할 때 전체 전력의 60%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였는가 하면, 아바리쿰도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점령했을 정도의 전력이라는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베르킨게토릭스가 직접 주둔하며 지키고 있던 게르고비아를 6개 군단만으로 점령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즉, 카이사르는 보급로가 막히고 원활한 보급이 이뤄지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전력과 적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오판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702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한 편에 끝내지 않은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최초로 방대해진 글 분량 탓에, 나눠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방대한 양과는 별개로 쭉 고민을 좀 해왔었습니다. 이 시리즈 안에 '로마인 시리즈'가 서랍에서 아주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로마인들을 깔끔하게 사전식으로 정리해주고 더불어 그들에 대한 논평을 해준다면 역사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여러 가지 의미로 재미있게 읽을 텐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도의 로마인 시리즈를 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그러면 다른 나라의 위인들이 형평성을 주장하며 서운해할 것이 뻔하여 나중에 이 시리즈를 직업군별 나라 군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이 안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계속 서랍 안에 두고 만지작거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황당한 '복붙 논쟁'의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서머리를 통해, 먹기 좋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만만한 일이 아닌지, 사례화 작업을 할 필요도 있겠다 싶어 '로마인'들을 이 참에 무대에 데리고 왔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로마제국을 주물렀던 그들이 쭈욱 무대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기존 이 시리즈의 방식처럼 간략하게 정리할까를 고민하다가 이 시리즈에서 그들의 생애를 돋보기로 보여주고 정리하는 것이 단순한 복붙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삼고자 촘촘한 일생을 조근조근 풀어가는 방식으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사전을 들춰보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평전을 시작합니다.

 

로마 관련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는 적지 않은 브런치의 작가들을 보면서, 굳이 나까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그렇게 흔하고 많이 다뤘다고 하지만 제대로 정리하고 다룬 책도 글도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함께 공부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합니다.


본 시리즈의 기존 방식과 달라 조금 생경하더라도 재미있게 공부해보기로 하지요. ^^*

매거진의 이전글 제대로 스승에게 배운 적도 없고 아이가 일곱이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