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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9. 2022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내내 견제당하고 죽음을 위협당하고도

‘황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전설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다.- 2편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698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를 공격하였으나 이곳 역시 아바리쿰못지 않는 천혜의 요새였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군이 직접 주둔한 본진이었기에 방비가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4개 군단을 다른 곳에 보내 공격력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므로 로마 군단의 공격도 아바리쿰때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음에도 정복은커녕 도저히 그 방어막을 뚫어보지도 못하고 군량만 모두 떨어져 버리고 만다. 결국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철수를 결정하기로 한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카이사르는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철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후회가 없을 정도의 거센 총공격을 통해, 최소한 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겠다는 미련한 계획을 세우고 만다. 과욕은 결국 더 큰 실패를 불렀다. 그는 로마 병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총공격을 명령했고, 병사들은 피해를 입히기 위한 마지막 때리기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총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적진 깊숙이까지 뛰어들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결과 선두 부대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채로, 많은 수가 몰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미련을 보였던 카이사르는 오히려 자신이 더 큰 피해만 입고 패주 하는 꼴이 되고 만다. 늘 승승장구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성공만을 이뤄왔던 카이사르가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처음으로 갈리아족에게 패배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를 갈리아에 불러들여 전쟁을 의뢰했던 장본인, 하이두이 족이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어 버리기까지 한다. 하이두이는 카이사르를 불러들여 그가 선전해줬던 덕분에 갈리아의 맹주 노릇을 할 수 있었는데 게르고비아 공방전의 패배로 카이사르에게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배를 얼른 갈아탄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의 땅에 대부분의 군수 자금과 군수물품,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에게서 잡아둔 볼모들까지 모두 놔두고 지키도록 했었는데, 하이두이 족은 그가 맡겨두고 지키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을 모조리 압수하고 남아있던 로마인들을 살해한 뒤 카이사르를 배반한다. 그 뒤 하이두이는 앞서 갈리아를 배신했던 잘못을 만회하겠다며,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하는 갈리아 연합군을 자신들이 지휘하겠다고 하였으나 갈리아 족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거부당한다.


그렇게 이도 저도 갈데없는 처지가 되어서야 하이두이 족은 카이사르를 배신한 것이 큰 잘못이었음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그들은 갈리아쪽에도 카이사르 쪽에도 붙을 수 박쥐 신세가 되어버린 후였다.

 

남아있던 군량과 볼모들까지 잃게 된 카이사르는 재빨리 군량이 있는 곳까지 철수해야만 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루아르 강까지 가서 군량을 확보한다. 때마침 카이사르에게서 4개 군단을 받아 다른 부족을 치러갔던 라비에누스는 승리한 뒤 돌아와 카이사르에게 합류한다.

 

사실, 이때 카이사르의 현지 상황만큼이나 로마 본토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평판이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안 좋아지고 있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달성했던 갈리아에서의 연이은 승리와 정벌로 세운 업적들에 대해 원로원은 시기하고 있었고 특히 삼두정의 동료이자, 자신 역시 장군 출신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유독 카이사르에 대한 질시가 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때문에 로마 본토로부터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카이사르가 멋대로 임지를 벗어나 무의미한 침략 활동만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탄핵하여 갈리아족에게 그냥 넘겨버리자는 정치적인 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나오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연장까지 했던 갈리아 총독의 임기가 거의 다 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대로 밀린 상태에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의 계획과 너무도 큰 격차가 있었다.


남아있던 임기가 고작 1년만 남겨두고 있었고, 이미 삼두정치의 끈끈함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마무리하겠다고 한번 연장했던 총독 임기 연장을 다시 연장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장에서는 무사히 그 해를 넘긴 뒤, 카이사르의 마지막 1년 남은 임기만 버티게 되면,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갈리아 정복은 말 그대로 그저 계획으로 끝날 공산이 큰 상황이었다. 원로원과 베르킨게토릭스의 계획대로라면 카이사르의 정치생명은 물론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은 결코 없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빌붙어 아부하고 의지하던 모든 갈리아 부족은 그를 배반했고, 특히 하이두이 족의 배신으로, 모아두었던 상당한 군량 물자와 볼모들 마저 다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로마에서 달려왔던 원점에서 다시 돌아가 있는 입장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서 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상황에서 그를 지지할 세력도 없고, 기운찬 군대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된 타지 생활에서 오는 힘겨움과 외로움 등이 카이사르를 비롯한 로마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읽고 있던 카이사르도 한번 게르고비아에서 졌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접고 로마로 돌아가는 없다고 다시금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우선 머물고 있던 루아르 강과 속주 사이에 있던 세콰니 족을 공격하여 속주의 물자를 확보하고 그들이 사용하던 루트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늘은 결코 카이사르가 쉽게 재기할 수 있도록 가만 놔두질 않았다. 갑자기 본진에서 방어만 하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가 대군을 이끌고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을 전멸시켜버리겠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군사적 전략과 흐름을 읽는 안목이 탁월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청야 전술 따위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갈리아를 삼키려는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을 전멸시켜 버리겠다고 칼을 뽑았다.

 

만일 베르킨게토릭스가 청야 전술을 계속 쓸 계획이었다면, 카이사르가 향하고 있던 세콰니 족을 이주시킨 뒤 그 영토와 남아 있던 모든 물자들을 불살라야 버리는 전략을 택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카이사르가 속주의 루아르 강의 루트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까지는 방해할 수 없었겠지만, 어차피 카이사르는 사방이 갈리아군에게 몰려 있어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보급을 꾸준히 교란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면 카이사르에게는 승산이라고는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 군단에게 대승을 거뒀다는 자신감에 고무되어 냉정한 판단력을 잃었다. 또 어떤 전쟁사 연구자들은 이미 사기가 고양될 대로 고양된 부족들의 압력 때문에 연합군의 특성상 그가 통제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총공세를 취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유가 어떤 것이든지 결국 갈리아 연합군은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의 앞에 그때까지 모았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끝장을 보자고 전장으로 달려 나왔다.


갈리아 연합군의 가장 큰 패착은 카이사르가 했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패배했을 때의 6개 사단이 아닌 4개 사단이 모두 돌아와 로마 군단은 100%의 전투력을 충전한 상태였다. 본래의 군진을 모두 갖춰진 상태의 로마 군단에게 전면전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패착이 아닐 수 없었다.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기는커녕 감사한 마음으로 이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족을 살육하다시피 쓸어버리고 겨우 살겠다고, 자신만 빠져나가 도망가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알레시아로 돌아가 성문을 닫아버린다. 이에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은 이 도시를 겹겹이 봉쇄해버린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그 많던 갈리아 연합군이 이렇게 쉽게 박살날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고, 자신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알레시아로 올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고작 보름 남짓 먹을 식량만으로 성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식량을 아끼고 아껴 먹어가며 30일간은 버틸 것으로 예상하고 외부의 지원을 기다린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출하겠다고 뒤늦게 달려온 갈리아족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도 이에 호응해 성 밖으로 나와 안팎으로 로마 군단을 공격한다.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싸워야 했으나, 미리 방벽과 참호를 만들어둔 데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워낙 갈리아 족보다 뛰어났었기 때문에 전면전에서 갈리아족에게는 숫자 따위라던가 자신들의 영토라던가 하는 이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당시 로마군의 전략과 전투력을 전면전에서 이겨낼 수 있는 민족은 전쟁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수준 격차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갈리아 연합군만 몰랐다.

리오넬 로예르,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결국,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날 대패하게 되면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나마 구심점이 되어줬던 베르킨게토릭스가 무너져버리자, 두 차례의 패배로 인해 로마 군단의 무서움을 경험했던 갈리아족은 인구가 줄어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카이사르에게 완전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갈리아는 완전히 평정된다.

 

그 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 만에 완전히 제패해버린 카이사르의 업적은, 로마 본토에 충격 그 자체를 안기게 된다. 범갈리아 연합군을 이끌고 봉기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알레시아 전투에서 물리치고 갈리아를 로마에서 통치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확정했다는 소식이 로마 본토로 전해지자, 모두가 카이사르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정치력에 엄청난 군사력까지 갖추게 된 카이사르에게 루비콘 강 앞에서 모든 군대를 해산한 뒤 로마로 들어와야 한다는 최종 권고를 요구받는다.


그들의 무장해제 요구를 선선히 들어줄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결하기 위해 여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은,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총독 지위를 유지한 상태로 집정관 직위에 출마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권을 그들에게 반납하는 순간 원로원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그야말로 무방비로 노출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와 반대 입장인 원로원 측에서는 그가 군사력까지 갖추고 로마 본토로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

 

사실 카이사르가 이런 밀당을 계속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이자 원로원과 첨예한 갈등을 빚게 된 배경에는 그간 카이사르를 지지하고 비호하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삼두 결속이 깨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극도의 무능력함을 보인 끝에 자기 아들(젊은 크라수스)을 데리고 나갔던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해버렸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죽음을 맞이하며, 장군 출신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폼페이우스마저 원로원파로 기울어져 그의 아군에서 라이벌로 등을 지게 된 것이었다.

전투에서 살해당하는 크라수스

이러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원로원과의 갈등을 빚게 되었고 정치적인 지지세력을 모두 잃고 고립하게 된다. 반대로 원로원파는 그간 자신들을 압박하던 폼페이우스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후원자를 등에 업게 되면서 카이사르에게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막상막하의 두 큰 힘 간의 갈등은 충돌 일보직전까지 치닫게 된다.

 

원로원은 후보의 부재중 입후보를 규정으로 금지했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반납하고서 민간인 신분으로 집정관에 입후보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하는 모험을 할 수 없었기에, 먼저 부재중 입후보 출마를 허락하면 군대를 해산하고 입후보하겠다고 응답한다. 원로원은 토의 끝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며 버티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불가피하게 군사력을 끌고 본토로 쳐들어가는 내전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이것을 단순한 쿠데타로 분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군대를 해산하는 순간, 싸움을 해보기도 전에 비무장 상태로 전쟁에 들어가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었다.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춘 아군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민간인 신분이 되어 정치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집정관을 하며 쌓은 정치적 능력 이외에 군인으로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보낸 7년간의 준비를 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외길 수순인 셈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본토로 들어온다. 여기서 강을 건너며 했던 그의 유명한 말이 이후에 전해진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ALEA IACTA EST)

 

당시의 로마는 뚜렷한 지도자랄 것이 없었다.

명문대가의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집단 지도자 체계라고 고착화한 상태였다. 때문에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씩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서 다시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 정치에 영향력을 행세하는 방식이었다.


집단 지도자 체계라고는 했지만, 정치에 관여한 인물들이 모두 같은 지위나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집정관과 재무관의 차이가 있었고, 같은 원로원 의원들끼리도 전직 집정관 출신인가 아닌가, 본래 그 집안의 돈이 많냐 적냐, 가문이 얼마나 전통적으로 유명하고 오래된 명문가이냐, 출신이 어디냐 등 갖은 조건 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등급 차이가 분명했다. 심지어 같은 기사 계급인데도 가문이 원로원에 진출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서 신참자(Novus Homo)인지 아닌지까지 구분을 두어 신분상의 높고 낮음이 있었다.


그 등급을 가장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등급 순으로 발언권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마의 집단 지도체계 시스템에서는 저마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높이는데만 필사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로마 공화정에서는 특정 정당이나 올바른 이념보다 그저 자신과 자기 가문을 위해서, 그리고 보호민-피보호민 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렇게 쌓아 올린 명예(?)를 ‘Dignitas(‘명예’정도로 번역하는데 적확한 개념으로 대치할 개념어가 명확히 없다.)’라고 부르는데, 이는 로마 공화정의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카이사르는 이후에 자신의 저술을 통해, 목숨보다 이 Dignitas 때문에 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 Dignitas를 너무 독점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Dignitas가 절정에 달했을 때 결국 그것을 질시한 정치 세력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한편, 삼두정치로 정치권에 화려하게 힘을 자랑했던 카이사르는 3개의 속주와 6만 명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던 자리를 카이사르 혼자 차지했다는 수치가 나온다. 거기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역시 마찬가지로 공화정 정무관에게는 결코 인정되지 않는 지휘권을 보유했었다.

당연히 그들이 독점한 만큼 기존 명문 귀족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와 기회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으니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있던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부와 명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여긴 귀족들에게는 원흉에 다름없었다.

 

삼두정치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보호 민들을 차례로 공직에 진출시켜 이른바 자신들의 파벌을 키웠다. 물론 이것은 이들이 처음 벌인 행위가 아닌 로마에 있던 보호자-피보호민 체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정치행위의 일환이었다. 보호자는 이렇게 피보호민이 많고 그들의 지위가 높아져 자신의 세를 불릴수록 Dignitas가 더 올라갔다.


다만, 카이사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된 다음에, 술라가 했던 것과 똑같이, 혼자서만 Dignitas를 거의 독차지하고 따른 야망이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자신의 Dignitas를 넘볼 수 없도록 횡포를 부렸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카이사르는 술라와는 달리 정적이었던 귀족들도 사실상 자신의 피보호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관용을 베풀어 품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죽이지 않고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주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앞에서는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그들은 그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 카이사르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된 것이다. 술라가 정권을 잡았을 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여 미연에 문제를 제거했던 것과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어설픈 관용으로 그들에게 더 큰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중에 그들이 복수를 위해 카이사르의 암살을 획책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카이사르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다는 소식이 원로원에 퍼지자 반응이 갈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원로원에 속해있던 의원들은, 혼자서 Dignitas를 독점하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고 싫어했지만,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포르키우스 카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소수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술라-마리우스 내전 때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르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원로원의 많은 현역 의원들이 카이사르처럼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봤거나 공포정치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당시 정치상황에서 다시 다른 독재자가 로마로 진격해서 내전이 일어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카이사르의 다음 순번으로 자신의 몫을 누릴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던 고명한 명문가 귀족들의 입장은, 카이사르의 두 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전을 치르고야 말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원로원이 최종 권고를 통해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지정한 것이 먼저였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측으로부터 카이사르와 맞설 군대의 지휘권을 정식으로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을 역이용해 도리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법적으로 불합리했음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하여 로마 진군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가 했던 주장의 요지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갈리아를 제패하여 지금 로마의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 바로 자신인데 이렇게 업적을 세우고 금의환향하려는 국가적 영웅인 자신을 (애초부터 불법인) 최종 권고를 협박처럼 보내서는 죽이려 드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헌법에 입각하여 보더라도, 친카이사르 성향의 호민관들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원로원에서 쫓아낸 일이 있었는데, 이는 원로원이 호민관의 신체 불가침 권한을 명백하게 침해한 것으로 전임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에게 좋은 구실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후 카이사르 본인이 고백한 기록에 의하면, 개선식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죽음을 불사하고 겨우 갈리아를 제패한 자신의 Dignitas를 깎아내리려는 원로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진짜 이유였다고 기술한 바 있다.

 

7년간의 갈리아 전쟁에서 실전 전격전과 기동전에 익숙해진 카이사르 군단은 원로원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로마 본토로 진격해 들어왔고, 맞설 병력의 소집이 미처 끝나지 않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함께 그리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군단을 겨우 편성하게 된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결국 이들에게 치명적으로 정치적 불리함을 안겨주게 된다. 당시 상황에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가장 결정적인 오판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빠른 이탈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동맹 도시 전쟁의 여파로 인해서 동맹 도시들은 여전히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이들에게 더 많은 시민권과 권리를 약속해준 민중파 카이사르는 당연하게 그들에게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무혈입성하게 되면서 집정관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드디어 다시 집정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곳의 원로원 세력을 일레르다 전투에서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를 숫적 열세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포위하겠다고 무리를 하다가 맹렬한 반격을 받으면서 패배하고 만다. 이것이 그 유명한 디라키움 공방전이다. 폼페이우스는 군량 보급과 숫적인 우위, 그리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구전을 펼치며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폼페이우스는 시종일관 방어에 치중하며 수세 위주의 전법으로 일관했는데, 장기간의 군대 생활과 타국 생활에 싫증을 느꼈던 폼페이우스와 동행했던 원로원 의원들은 조속히 이 전쟁을 끝내버리라는 압박을 하게 된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 군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게 된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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