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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0. 2022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내내 견제당하고 죽음을 위협당하고도

‘황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전설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다.- 3편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702


하지만 전면전을 결정하고서도 폼페이우스는 노련한 장군 출신답게 필승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만만의 준비를 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과 자기 쪽 보병이 정면으로 붙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용하여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공격하는 필승의 전략을 구상하고 맞붙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장에서 떠나온 지 오래된 인물이었고, 카이사르는 이미 7년간의 기나긴 원정 전쟁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현역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전략을 모두 예상하고서는 폼페이우스 기병의 예상 이동경로에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로마 군단의 장창병을 집중 포진시켰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낙엽처럼 우수수 장창병의 창에 스러져갔다. 오히여 그들을 모두 쓸어버린 장창 부대는 역으로 폼페이우스 보병의 좌익을 공격한다.

이후 플루타르코스는 비교 열전 <카이사르전>의 기록을 통해, 장창이 아니라 필룸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원래 로마군이 돌격 직전에 날려댔던 필룸을 이날 전투에서만큼은 그저 날리지 말고 들어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원들의 얼굴을 겨냥하도록 카이사르가 전략을 바꿨고, 당연히 필룸을 던지는 줄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가 날까 봐 얼굴을 가리며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 패배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당시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전쟁에 참여해서 자신이 목격했던 사실에 대해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었을 확률이 높아 신빙성에 없는 진술이라고 전쟁사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장창이 아닌 필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혹여 로마 군단이 장창을 사용한 부분에 대한 이해는 아닐 수도 있다는 문제제기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폼페이우스 군은 카이사르 군에 대패하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까지 쳐들어간다. 강력한 기세를 자랑하던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폼페이우스를 잡아 처참하게 살해하고 카이사르에게 바친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리며 권력의 무상함과 배신한 옛 동료의 죽음에 서글퍼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저서인 <내전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라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에서였을까? 최초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도와 새로운 로마를 건립하자고 동의했던 의리 때문일까?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로마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를 기념하는 조각들을 곳곳에 제작하여 전시하도록 명령한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들어가게 되면서 또 새로운 역사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권력 싸움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상당히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게 되게 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과 반목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우스를 죽여가면서까지 잘 보이려 했는데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카이사르를 공격하게 된다. 이 전쟁이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다. 본토와 너무 멀리 나와 있어 적지에서 소수 병력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핀치에 몰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지는 고생을 하지만 결국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를 뒤집어 승리하게 된다.

그 뒤 소아시아의 젤라 전투에서 그의 상징처럼 된 명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을 남기며 승리하게 되면서 이 지역을 평정하게 된다.


그렇게 다시 로마로 귀국하여 그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까지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원로원파 잔당을 직접 소탕하러 가서 탑수스 전투에서 이들을 깨끗이 정리해버리고 개선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는 물론 상징적으로 불만 세력을 모두 징벌하는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그 역시 이 상황을 마지막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인지, 갈리아와 이집트 사건 때 하지 못했던 개선식을 대대적으로 열며 대중들에게도 이 의미를 인식시키게 된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 잔당을 정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대한 개혁의 기치를 들게 된다.

 

먼저, 기존에 사용하던 구 로마력의 오차가 갖는 문제점을 분석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두어 실질적으로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만들어 선포한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겨우 1년에 11분 14초였으며, 16세기에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무려 1,500년이 넘게 사용되었다. 다만, 율리우스력을 도입하면서 기존 달력의 오차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기원전 46년은 불가피하게 445일이 되었다.

한편, 다양한 새로운 건설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새롭게 다졌다.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으며,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쿠리아 율리아를 세웠다. 또 바실리카 율리아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기존에 도시의 경계로 세워져 있던 세르비우스 성벽을 모두 부수고 도시를 확장하였다.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술라 시대에 600명으로 증원되었던 정원 수를 900명으로 늘려 버렸다. 기사 계급에게 의석을 주어 원로원 강화를 꾀했던 술라의 정책과는 달리 의석을 대부분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웠고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도 그 자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약화와 자신의 지지를 강화하는 방식 모두를 성공시켰다.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난 로마 영토에 따라 속주도 재편성하게 되는데 카이사르가 직접 정벌했던 갈리아와 누미디아,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비티니아, 시리아를 추가하여 18개의 속주가 추가 편성되었다. 속주가 늘어나면 이에 군사 지휘권이 부여된 총독이 임명되었어야 했는데 카이사르는 행정 개혁을 통해 이 문제도 해결했다. 공화정 시절 집정관 바로 아래 해당하던 관직이었던 법무관을 8명에서 16명으로 늘리고, 재무관을 20명에서 40명으로 2배나 늘렸다.

곡물을 국가에서 매입하여 전체 관리를 법제화하고 곡물 수령자를 공식적으로 정하는 복지 정책도 시행하였다. 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프로빈키아와 트리나크리아(시칠리아)의 속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속주민 융화 정책을 통해 카이사르는 자신이 정복했던 속주의 대중들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 그간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무기로 사용되던, 원로원의 계엄령, ‘원로원 최종 권고’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원로원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 비상계엄을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 없이 처분할 수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이 이상한 비상결의 방식에 대해 불합리성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터라 가장 먼저 제거된 것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던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이 비상결의는 그 대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폐지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술라 때와는 달리 정적을 숙청하지 않았는데 이 차별성에 대해 스스로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관용을 정책으로 내세웠는데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며 반발했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대도시였던 로마는 교통이 매우 혼잡했기에 카이사르는 수송차를 낮에 다니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내린다. 낮에 다니지 못하게 한 탓에, 밤에만 다니게 하자,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배심원단을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했던 제도를 폐지해버렸다. 원로원 귀족들로 구성된 기존 배심원단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늘 자신들의 이익과 연관된 쪽이나 뇌물을 받고 힘을 가진 이들을 위한 편향된 판결을 내기 쉬워서 공정한 판결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을 카이사르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이사르는 배심원단을 로마 시민 중에서 중산층에 해당하는 평범한 이들로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사법개혁을 실시했다.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의료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사와 교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했다. 군대에서만 12년 가까이 보낸 경험을 한 카이사르는 군인에 대한 대우 역시 개선하기 위해 70데나리우스였던 봉급을 140데나리우스로 2배나 늘려 현실적으로 대중들에게 공평한 사회가 이루어짐을 알렸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공정에 두고 재구축하면서 로마가 가졌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어느 정도 일단락한 뒤,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imperator, 최고사령관)’라는 호칭으로 부르도록 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부터가 사실상 로마의 제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밟는 첫 단계로 본다.

하지만, 전술했던 바와 같이 카이사르는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위치는 사실상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나 다름없긴 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황제’라는 개념은 물론, 호칭 자체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황제의 개념이 만들어져가고 있었을 뿐이다.


즉,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기 전에 그 개념에 대한 구체화 작업이 모두 카이사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황제라는 개념은 그가 죽고, 아우구스투스를 거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의 제도화가 시작되면서 현대의 개념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황제의 시초를 카이사르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전이 모두 끝난 후, 카이사르는 본격적으로 1인 통치 시스템을 다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왕들의 조각상들 옆에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하는 등, 신격화 직전의 단계까지 자신의 우상화에 치중하는 듯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파격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로마인들에게는 가히 그 모든 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정서를 그 역시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더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여론 떠보기였는지는 모르나 이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리던 당시 대중 앞에서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그에게 왕관을 바치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카이사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왕관을 조용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날의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그가 야심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려 했다는 견해와 왕관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통해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엇갈리는 편이다.

 

겉으로만 보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디까지나 집정관이 왕관을 바치려는 행동을 돌발적(?)으로 보였던 것뿐이고 카이사르는 로마에는 왕이 필요 없다는 말까지 곁들이면서 왕관을 되돌려주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카이사르의 지시 혹은 묵인 없이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만의 독단으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오히려 논란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간의 행보로 보건대, 카이사르가 왕정으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그들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카이사르의 이런 말년의 행보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역사가들은 이 퍼포먼스가 말 그대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후 실제 암살이라는 끔찍한 결과가 보여주듯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었고, 실익은 전혀 없는 기분 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굳이 그런 정치적인 의도를 담았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카이사르가 그때까지 보여주었던 인성을 감안하면 항상 자기 절제와 경계가 철저한 인물이었다는 것만 봐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이 오래 멈춰있으면 썩는 법이고, 카이사르는 이미 나이가 들어 노쇠해가면서 전만 같지 않았을 것이라며 결국 다른 권력자들의 전철을 밟으며 쇠락의 수순을 밟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결국, 그런 상황 속에서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던 중, 원정을 떠나기 불과 사흘 전 원로원에서 잔인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암살자들은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카이사르의 반대파가 주류였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도 가담했었다.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으면서 보였던 제정으로 가는 과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보수의 반발심과 카이사르에게만 명예가 집중되어가는 현실이 자신들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그의 심복들이 가진 불만이었다.

암살이 벌어진 날짜인 3월 15일은 서양문학사에 있어 상당히 의미 있는 날로 각인된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정복을 원로원에 공표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지만, 훗날의 문학적 창작력으로 이 날짜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다양한 작품들에서 그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곤 한다. 


예컨대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월 보름을 조심해라!”라고 예언했다라든지, 그 전날 연회에서 누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선호하냐고 물었더니 카이사르 본인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고 대답했다든지, 암살된 당일 아내가 예지몽을 꾸고 극구 말렸는데 무시하고 그냥 갔다든지 하는 류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모든 표현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물론, 그가 숙적인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후 서양에서는 현대까지도 3월 15일을 불길한 날로 여기는 것으로 그의 죽음을 기억한다.

 

카이사르 한 명을 죽인다고 해서 수백 년 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은 암살을 진행했던 이들조차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만한 사실이었다. 오히려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적절한 개혁과 새로운 제도를 만들며 새 시대를 구가하던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공화정의 몰락은 급속한 가속화 현상을 겪게 된다.


카이사르 암살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고 실제로 원로원에 돌아온 결과는 마리우스 이후에 카이사르가 멈췄던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복고주의 세력(소위 공화파)은 이런 현실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채 마냥 시대를 낙관하다가 자멸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암살은 어떠한 대의명분도 갖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유독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영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움직여 다가갔다. 곧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카스카가 맨 먼저 그의 목을 찔렀지만 본능적으로 피하려던 카이사르의 반응과 떨고 있던 카스카의 어설픈 공격에 상처를 깊게 잊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한 카이사르는 칼을 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며 주변을 응시했다. 원래 있던 호위 병력은 불과 며칠 전 해산시켜 버렸던 터라 그는 호위 없이 혈혈단신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해할 뿐이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를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그 와중에 달려들어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여러 기록을 통한 당시의 묘사를 종합해보면, 사실 카이사르는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법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믿고 있던 브루투스가 단검을 가지고 달겨드는 것을 보고 체념한 듯 옷을 머리 위로 벗어던지고 주저앉아버렸다는 일설도 있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라이벌이던 폼페이우스의 흉상 쪽으로 밀어붙였다. 때문에 흉상은 카이사르의 몸에서 뿜어 나온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나 되는 자상을 입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저마다 단 한 번이라도 더 찔러 공적을 인정받기라도 하려는 듯 모두가 찔러댔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게도 어설픈 암살자들은 서로가 휘두르는 칼에 찔리거나 베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각색한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의 작품 <Tragedy of Julius Caesar>를 보면, 암살파의 대표격이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시민들 앞에 나서서 먼저 긴 연설을 한다. 하지만 그의 어설픈 대의명분과 변명 어린 연설은 카이사르의 이상을 꿈꾸며 지지했던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브루투스의 변명 어린 연설이 끝나자 원래 암살파들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제외해주었던 카이사르의 오른팔격이던 안토니우스가 연설에 나선다. 그는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을 표하는 듯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쪽으로 충격적인 반전을 보이며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극적인 연설을 시연한다.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통해, 마침내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는 지경에 이르게 만든다.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을 잃은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일당들을 끌어내 죽여라!’라고 외치며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놀라 도망쳐버리고 안토니우스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사실, 이 연설의 일화는 감정에 대한 호소가 논리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사람에게는 감정에 대한 호소가 논리적인 설득보다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온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명백히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희곡이었다. 물론 이 일화 자체만을 어디선가 보고 주워 들어 이것이 문학적으로 재구성된 픽션이 아니라, 실제 역사라고 착각하는 드라마에 몰입한 아줌마스러운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을 통해, 이 일화가 당시 왕권 사회에서 옛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재구성하는 것으로 탁월한 재주를 보였던 셰익스피어의 픽션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란다.

 

실제로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이며 선동적이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확인된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카이사르의 죽음 직후 그는 그저 자신의 집으로 도망쳤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완전한 셰익스피어의 픽션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는 근거는, 카이사르 장례식에 안토니우스가 참석하여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평범한 연설을 했고 민중들이 그 시점을 계기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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