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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1. 2022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내내 견제당하고 죽음을 위협당하고도

‘황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전설로 세계인에게 각인되다.- 4편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706


음모의 주동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카이사르는 자식과 같이 진심으로 아꼈다. 그의 유서에서 2순위 상속자로 지정한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브루투스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카이사르가 애인의 자식이라며 그렇게 아꼈던 브루투스는 외삼촌이자, 카이사르의 숙적이던 카토(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 스스로 배를 갈라 인생을 마감했다.)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내전 당시에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마르쿠스 브루투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브루투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붙었던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주모자인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처남이고, 독재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심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가 투항한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암살자 중에는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중심으로 트레보니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와 술피키우스 갈바가 모두 그의 암살에 동의하고 적극 가담했다. 이 중 카이사르의 최측근임에도 암살의 선두에 섰던 사람은 바로 데키무스와 트레보니우스였다.

 

데키무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해군을 지휘하던 장교로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제2상속자로 지정했을 정도로 아꼈던 인물이었다.(물론 그는 그러한 사실조차 몰랐고, 나중에 유언장이 공개되자 그 유언장을 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심지어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기원전 42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시키려 했다.

 

트레보니우스 역시 기원전 45년 보궐 집정관이었으며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곁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면서 측근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챙겨주고 의리가 돈독했던 심복들이 그의 암살에 동의하고 반대편에 섰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많은 가설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적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받는 가설은, 바로 그를 믿고 따랐던 심복들이 왕정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가고 있는 듯한 카이사르의 독재 시스템에 크게 실망했다는 설이다.


거기에 더해, 전쟁과 내전을 통해 적들이 확실할 때와는 달리 정치가 안정되고 공을 나누게 되면서 측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정리되지 못했다는 가능성도 더해졌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당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경계하라는 누군가의 조언에 카이사르가 “나는 비쩍 마른 그 두 사람보다 뚱뚱한 둘(안토니우스, 돌라벨라)이 더 무섭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까지 있어, 그러한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암살에 직접 가담한 부하들 중 중앙 간부에 해당하는 집정관급 인사는 트레보니우스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모른 척하며 사태를 방관했다는 점과 실제로 카이사르 사후 빠르게 대권을 장악했다는 점 때문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리 좋게 해석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명했던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누나의 외손자였고,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으나, 유언장을 통해 양자로 지명받으면서 가문을 이은 정치적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부각된다.

 

카이사르의 암살사건 이후, 소위 ‘공화파’와 1차로 내전을 치르고 나서 카이사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벌인 2차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의 제정은 그야말로 편법과 제도면에서 모순의 극치로 치닫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맡아오던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만 원로원에게 얻어낸 다음 이것만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희한한 계승 방식을 썼으며, 대외적인 호칭으로는 공화정기부터 원로원 내 우선 발언권자에게 불려진 칭호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공화정에 익숙하고 왕정에 불안감과 혐오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직위도 없이 권리만을 애매하게 짜 맞추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탓에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임시직과도 같은 자리였고, 이 때문에 혈연에 집착하게 되면서 결국 왕정과 다름없는 체제로 직행하게 된다.

 

본래 카이사르가 꿈꾸며 구상했던 체제는,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아우구스투스가 형태만 만들게 되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킨 프린키파투스(원수정)라는 이름으로 실체화되어 버린다. 카이사르의 양자로 정권을 잡은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 조정 헌법 아래 만들어진 ‘새로운 공화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로마식의 입헌군주정 내지 세습이 가능한 종신 황제 체제의 양두 정체를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그가 뭔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제대로 뭔가 해보겠다고 완성시킨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원수정(프린키파투스)라는 시스템은,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전례를 통해 얻은 교훈 아래, 본인의 업적을 내세우며 늘 떠들었던 문구처럼 “나는 어떠한 새로운 관직을 만들거나, 조상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모든 명예 수여, 권한 수여까지 공화정스럽게 원로원의 손을 빌려 다 통과시키며 진보와 개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집권 후 40년 넘게 천수를 누리며 상황에 맞게 그저 적당히 모양만 바꾸는 형태로 원수정(프린키파투스)로 부르는 그 체제를 만들어낸 뒤,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공화정 시기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종신 특권을 상속시키는 방법 그대로 물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프린키파투스’라는 시스템은, 공화정 체제에 프린켑스가 로마 시민과 민회를 대표하는 형태로, 당시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나투스 로마누스와 함께 양두정으로 이끄는 방법이었을 뿐, 왕정이라고 부르기는 도저히 어려운 형태의 로마 공화정의 신체제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이 구태의연한 시스템은 태생부터, 서기 4세기 도미나투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까지 ‘공화정과 전제정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라는 애매모호함으로 결코 카이사르가 꿈꾸던, 더 나아간 개혁의 결과물이라고는 결코 인정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나이 55세에 그는 그렇게 참혹한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작 자기 집으로 도망쳐서 피신했던 안토니우스는 하루가 지나서야 나타나 그의 유해를 발견했고 이 현장에서 ‘피소’라는 원로원 의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사망하기 6개월 전에 작성하여 여제사장에게 맡겨두었다는 사실을 알려줘 그것을 알게 된다.


수습된 카이사르의 시신은 포로 로마노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되었다. 화장 당일,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작성한 유언장을 낭독하며 새로운 계승자가 공개된 것도 바로 그 자리에서 선포되듯이 민중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무려 3회 차가 넘는 긴 분량을 할애하며, <인생에 실패했던 대가들의 이야기> 최초로 분할 연재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인생을 모두 들여다보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인생은 그 자체가 로마 제국사의 문을 여는 역할과 동시에, 로마제국이 정점에 어떻게 올라가 전성기를 누렸으며 어떻게 당대의 화려한 로마제국을 이뤄냈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통해, 그리고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무엇이 우리의 현재와 닮아있고 또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본 이들이 있는가를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이를 만나기 어렵다.

 

과거의 문헌을 통해, 역사와 그 인물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저 재미있으니까 읽는 것이 아니다. 그 공부를 통해 우리의 현실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그 부분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이 진리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가버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을, 이 글을 통해 3일 동안이나 읽으며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던가?


작금의 우리의 현실과 당시의 로마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민주주의적으로 정치를 한답시고 공화정 시대를 열었던 로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민주적으로 체제를 운영한 것인 양 여러 시스템을 구축했었다. 다양한 관리제도와 견제 시스템을 두었원로원이라는 절대적인 기관을 두어 현직은 물론이고 전관까지 모두 상호보완적인 견제를 통해, 더 나은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사람을 주요한 자리에 앉히려고 안간 힘을 썼으며, 불공정한 문제가 생겨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이 열릴 때도 결국 철저하게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더 늘리기 위한 싸움에 활용될 뿐이었다. 결국 정벌을 통해 통치할 수 있는 땅이 늘어나도 농민들을 비롯한 민중들은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악순환의 고리가 완벽하게 구동하는 모양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돌아온 이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땅을 다시 개간하기 힘들었고, 늘어난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사를 짓는 것 자체가 손해를 부를 뿐이었다. 그렇게 결국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땅을 팔아야만 했고, 귀족들은 그 땅을 착착 사들이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잡아온 수많은 노예를 노동력으로 바꾸어 그 땅을 개간하고 자신들의 부를 늘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

생각이 있는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민중들에 의해 선발되었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부자들의 땅을 농민에게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 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주장을 하는 형제를 귀족들은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렇게 형제들을 죽이고 민중들의 입을 막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겠다고 절대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출생부터가 전통적인 명문 가문 출신으로 누구보다 기득권층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미 철이 들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강제로 마칠 때까지도 끝까지 민중의 편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고모부이자 민중파의 상징이었던 마리우스의 장례식, 그것도 술라의 지배하인 로마 한가운데서 10대의 나이에 민중파를 지지하는 조문을 읽으며 커밍아웃하는 배짱과 신념은 그의 정치인생 전반을 보여주는 데뷔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민중들의 대표였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도 죽임을 당하면서 실패했던 개혁을, 이후 '독재자'라고 불리는 카이사르가 해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술라에 의해 침탈당한 공적 소유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성장과 팽창에서 분배를 지향해 막대한 부를 지닌 귀족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평민과의 양극화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그가 제정의 수립을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수백 년간 대립해온 평민-귀족 간의 대결과 로마의 모순을 깔끔하게 해결했던 세기의 인물이었다는 점에선 이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미 썩어 있는 기득권층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을 뿌리째 뽑기에는 민중파를 이끌던 그의 고모부 마리우스도, 민중들을 대표했던 그라쿠스도 시작도 해보기 전에 죽음으로써 제거되는 것을 보았던 그의 결단은 자신을 중심으로 단일화된 힘의 개혁이었다. 누구나가 만족하는 개혁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사회의 불합리함을 뜯어고치는 것이다.


지금 현실에서 만족해하며 부와 명예를 쌓으며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결코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손에 쥐었을 때 그들이 과연 변질되지 않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그것이 어찌 보면 카이사르가 개인적인 정치적 욕망을 드러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고 그로 인해 앞서 이루었던 개혁과 업적까지도 비난받는 것이 아닌가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자.


군부독재의 폐해를 통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면 항거했던 이들, 공부도 잘해서 일류대에 들어가서 똑똑한 머리로 인지한 사회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독재자들의 검은 속내를 알고 배운 그들은 항거했다. 배운 것을 실천하려면 민중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소위 ‘운동권’이라는 낙인 아닌 낙인을 찍혔다. 그들은 그 낙인을 훈장으로 여겨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며 여의도로 향해 하나둘 배지를 달았다.


그런 그들이 어찌 변했던가? 자기 자식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겪지 않게 하겠다며 스펙을 쌓아주고, 다들 그러는 것 아니라며 이전에 군부 독재로 잔치를 벌이던 이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짓거리들을 해댔다.

노동운동을 합네 맨 앞줄에서 설치다가 적당히 거래하여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는 자신이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하더니 자기가 다니던 회사에 으름장을 놓아 능력도 안 되는 딸을 뒷줄로 넣어달라고 하질 않나, 정의를 위한 검사 짓을 했다며 포장해서 떠들다가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는 추악한 구세대 이미지를 기억하는 동세대들이 버젓이 있음에도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고 마치 자신이 2030 세대를 대체재인 양 빨간 넥타이를 매고 히죽거리며 웃고 다닌다.

 

원로원이 썩었던 가장 심각한 이유는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하는 자들이 돈 있는 기득권들의 권리에 합승하면서 벌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작금 사태에는 그 둘이 한 몸인 경우가 많다. 그저 뒷돈을 받고 돈 있는 추악한 귀족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자신들이 부정의 분신으로 거듭나고 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신나서 그들을 후려치기가 좋았는가? 로마제국이 그 꼴이 나고 크게 변화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민중들의 우매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돈이 돌아오고 콜로세움에서 쇼만 보여주면 열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정말로 그들이 단지 무식하고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들은 배운 거 없고 전쟁의 군사로 끌려다니고 가진 것이 없이 혜택을 받지 못해서 그랬다고 포장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도 알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알고 있다. 그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측에 있었을 뿐, 결국 그 썩은 기득권층의 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예들을 대한 그들의 태도만 보더라도 그들의 시민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잡하기 그지없는 수준까지 타락했는지 우리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 교사들의 이익집단이 교원 노총이 그러하고 허구한 날 정치권과 딜을 하는 민주노총이 그러하며, 최근에 벌어진 일로 추잡함이 적나라에 드러나 의사 집단이 그러하다. 썩은 여의도의 쓰레기들을 욕할 때나 청와대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데에도 침실에 있던 그녀를 욕하며 촛불을 드네 뭐하네 하는 그것들이, 정작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사회정의고 뭐고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혈안이 되어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고 더 올라서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체적인 난국이 수천 년 전의 로마와 어찌 이리 닮아 있을 수 있을까 한심하고 한심해하던 차에 그 총체적 난국을 정리하려고 자신의 인생을 바친 파란만장한 남자의 인생을 당신의 눈앞에 가지고 왔다.

 

자신이 그 속에서 적당히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가 결국 더 큰 것을 혼자서 누리기 위해 노력한 것 아니냐고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반문한다. 그가 독재라는 형태를 취해서라도 자기가 먹을 것을 민중들에게 나눠주고 기득권 측이라고 지들이 헤게모니를 쥐고서 나라를 흔들던 것을 모두 빼앗아 정작 그간 누리지 못했던 이들에게 정당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다면, 과연 그에게 독재자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독재자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그 행위를 통해 얻은 이익을 자기가 독식하느냐, 혹은 누구와 나누느냐의 차이로 구별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박정희가 기업을 겁박하고 나라의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쌓은 돈은 결코 사회를 위해서도 민중을 위해서도 돌아가지 않고서 그와 그의 측근들에게 돌아갔다.

이후 군부독재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들서부터 건설업자에서 대통령이 된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자신과 자기 식구, 측근들을 위해 돈을 긁어모았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내의 이름으로 자식의 이름으로 바꾸고 숨겼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황제의 이름과 권력을 모두 만들고 정작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그가 최초의 황제로 인정받는 이유이다. 대부분 악을 처단하고 규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작 권력을 잡고서 개혁을 시행하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결국 자신이 기득권층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수천 년 전에 이룬 사법개혁조차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썩은 원로원의 의원과 기득권층이라는 귀족들의 탈을 쓴 것들이 그것을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들은 로마의 시민들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당신들 조직에 협조적인 정치인이라면 언제든지 지지하고 그 이익을 나눠갖자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짐승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잊었을까 봐 다시 한번 강조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난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배우고 익혀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교재로 삼기 위함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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