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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4. 2022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귀족 가문으로 인정받았음에도

옳지 않은 권력에 대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 1편

형제는 유서 깊은 평민 귀족인 셈프로니아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어머니 코르넬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름을 명기한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로마사에 있어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the Elder)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개선식을 두 번이나 올린 유명한 장군으로, 공화정 시대의 최고 관직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consul)도 두 번이나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카이사르 편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당시 로마는 정원 2명의 집정관을 두었는데, 집정관은 행정 및 군사의 장(長)으로 1년의 임기 동안 거의 무제한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집정관을 선출하는 권한은 원로원에 있었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대개 유력 가문의 사람들만이 이 직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 아버지는 귀족 신분도 아닌 평민의 입장에서 아무리 유명한 장군이었다고 하더라도 두 번이나 집정관에 뽑혔다는 점에서 얼마나 그가 귀족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어 인정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가 집정관을 지냈던 시기가 기원전 177년과 163년으로 연이어 연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한번 집정관을 하여 인정받지 못한 이를 다시 불러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에서 집정관을 배출한 가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귀족 가문과 같은 대접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미 형제의 아버지가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라쿠스 가문은 귀족 가문으로 올라갔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코르넬리아와 그 자녀들

어머니 코르넬리아(Cornelia Africana)는 그녀 자신도 나중에 이집트 왕에게까지 청혼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거부할 정도의 형제들의 양육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그 이전에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형제들의 외할아버지 덕분에 훨씬 더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저 유명한 한니발 장군을 물리쳐 로마를 구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였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형제의 아버지 그라쿠스와 외할아버지 스키피오는 서로 정적 관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라쿠스의 탁월한 군인으로서나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해서 결혼시켰다고 한다. 이후 형제의 누나인 셈프로니아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라쿠스 가문이 스키피오 가문과 겹사돈 관계를 맺은 셈이다.


이 결혼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아프리카누스와 그의 양손자 아이밀리아누스는 당시 로마의 일인자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 집안과 겹사돈 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라쿠스 가문이 평민 출신에서 출발하였지만, 아주 강력한 배경을 갖추게 되면서 로마 최고 가문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 배경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형제의 부모는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매우 좋아 형제를 포함하여 무려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고 전술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막내 가이우스가 태어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일반적인 로마 여성들과 달리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어머니 코르넬리아와 두 형제

코르넬리아는 자녀들에게 최고의 그리스 출신의 교육자를 붙여주었고 형제는 이 가정교사들로부터 웅변술과 정치학을 배운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체계를 배우고 공화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기본적인 사상을 익히게 되는데 이것이 그들이 정치에 대한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또 이들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필수적이었던 군사 훈련에 준하는 교육도 받게 되는데 승마, 무술 등을 배웠고 재능과 노력이 탁월하여 함께 배운 젊은이들 중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평민을 위한 사회개혁을 꿈꾼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형제.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와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의 이야기이다.

 

형제는 기원전 2세기 호민관을 역임하였다. 원로원 계급의 대농장 경영에 밀려나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영농 계급을 위해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을 발의한 뒤 시행하려 하였고, 초기에 성공을 거두는 듯하였으나 결국 원로원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들 형제의 개혁 시도는, 고대 역사에서 귀족 층에 맞서 평민들에게 부의 분배를 시도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당시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후대의 사회주의와 대중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기원전 163년경에 태어났다. 당시의 관습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역시 아버지와 같은 티베리우스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지만 어머니인 코르넬리아의 전폭적이 지원과 인격적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성년이 되자 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나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보고 신의 뜻을 점치는 점복관(占卜官)을 맡게 되었다. 당시 신관과 관련된 이 직책은 상당히 중요한 직위로 그가 젊은 나이에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원로원 의장을 맡았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장래성을 보고, 그를 사위로 삼고자 했다.


일화에는 아피우스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아내에게 딸의 남편감을 정하고 오는 길이라고 소리치자 아내가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 왜 그렇게 서두르셨어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사위로 삼는다면 모르지만요!”


그 정도로 티베리우스의 당시 인기와 유명세는 로마에서 1순위 신랑감이었다고 전한다.

티베리우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 종군했던 젊은 장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며 그의 유명세를 더했다. 그는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돌파한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또한 스페인에서 발발한 누만티아 전쟁에서는 뛰어난 외교술로 2만에 이르는 병력의 목숨을 구해내는 등의 다양한 활약상을 통해 동년배는 물론이고 당시 젊은 층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재목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형제의 뛰어난 재능에 가문의 배경이 힘을 받쳐주기 시작하면서 원로원 귀족층의 눈에 당연히 도드라지게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이들 형제가 성장하면서 원로원 귀족들과의 교우는 다양한 형태로 돈독해져 갔다. 하지만 원로원은 정식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티베리우스의 누만티아 협상을 비판하면서 견제를 가하기도 했는데, 그 사건은 결국 원로원 귀족층들과의 갈등의 불씨를 촉발시키게 된다.

 

사실 이 사건은, B.C. 137년 티베리우스가 콰이스토르에 임명되어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루스 만키누스를 따라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능한 지휘관이었던 만키누스의 실책으로 로마군은 연이어 패배하게 된다. 이에 만키누스는 어느 날 밤 진지를 버리고 군대를 철수시키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누만티아 사람들이 철수하는 로마군을 곧바로 뒤쫓아 왔고 이내 전군을 포위하여 막다른 길에 몰아넣었다.


만키누스는 목숨만이라도 건지고자 대표를 보내 휴전을 제안했지만, 누만티아 사람들은 티베리우스가 대표로 오지 않는 한 상대도 하지 않겠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과거 누만티아와 휴전을 맺어 그 조건들을 잘 지킨 전례가 있었고, 아들인 티베리우스 역시 뛰어난 인격자로 로마 밖에까지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결국 티베리우스가 가이우스의 지시에 따라 휴전협상을 진행하여 휴전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포위되었던 2만 명의 로마군을 아무런 살상 피해 없이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로마로 귀환하자 원로원은 누만티아와의 휴전에 반대하며 본래의 전통에 따라 군대를 이끈 집정관과 티베리우스를 포함한 장교들을 누만티아에 본보기로 추방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하지만, 민중들은 성공적인 협상으로 군단병을 살려온 티베리우스의 결단과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해 휴전 폐지에 대한 책임을 집정관이던 가이우스에게 지게 하여 그를 추방하고 티베리우스 등 당시 실무를 맡았던 장교들은 그대로 면책하고 로마에 남도록 민회에서 표결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렇게 당시 로마의 여론은 티베리우스를 로마인들을 구한 인물로 칭송하였고 그의 덕망과 훌륭한 외교 솜씨를 찬양했다. 전쟁에 패하고 돌아왔지만 티베리우스는 일약 로마 전체의 유력인사가 되었고 곧 호민관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1년, 정원 10명의 호민관은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만장일치로 원로원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또한 국법과 동등한 구속력을 갖는 평민회의(민회)의 의장을 맡았다.

 

한편 이 시기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심각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동생 가이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누만티아로 가는 길에 에트루리아(Etruria) 지역에서 현지 자영농들이 모두 땅을 빼앗기듯 잃게 되었고, 그 자리를 노예들이 농사짓는 대농장으로 바꾸어 경영하여 귀족들만이 부유해져 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로마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빚어낸 현실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

 

당시의 로마는 100여 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고 할 만큼 속주를 늘리며 영토를 넓힌 상태였다. 하지만, 커진 경제 규모만큼이나 전쟁의 결과는 고스란히 민중들이 져야만 했다. 민중들은 잦은 참전으로 토지를 제대로 경작할 수 없어 농작지는 황폐화되었고, 수확물을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농지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이집트 등으로부터 주식량원이었던 밀이 싼 값으로 로마에 공급되자 겨우 농지를 개척하여 씨를 뿌린 자영농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소수의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던 자영농들은 밀농사를 포기하고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을 경작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일반 자영농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무작정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거나 아니면 스스로 노예가 되어 생계를 도모하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반복되었다.


귀족들과 부자들은 주인을 잃은 토지는 서류를 조작하여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욕심나는 땅이 있다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이후 그들은 전쟁 포로나 노예를 활용하여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고 하는 대규모 농장 운영체계를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빈부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B.C 134년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에 당선되자마자 로마의 농지 강탈 문제를 1차적으로 당시 본질적인 토지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대사제 크라수스와, 집정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장인 압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등과 상의해 기존 법에 따라 불법 토지를 반환하는 농지법을 입안하고, 불법 토지 강탈의 피해자들이던 대다수의 민중들이 지지하게 되면서 토지개혁을 통한 목소리는 로마를 뒤덮게 된다.

 

사실 첫 번째 개혁안은 굉장히 완곡한 것이었다. 당시 한 사람이 5백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가질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은 이미 있었지만, 부자들은 꾀를 내어 편법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땅을 공공연하게 소유하고 있었다. 대토지 소유주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들의 보호민(클레엔테스)인 로마 시민들의 명의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상당히 완곡한 농지법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새로 재정한 법안은 전쟁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에 대한 관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법은 5백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소유했을 경우, 그 나머지 부분은 정부가 몰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편법을 농지법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거의 대농장 소유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 티베리우스는 새 농지법에서, 그들이 불법으로 소유하는 영토를 정부로부터 임대받는 형태로 소유를 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이렇게 형식적으로 몰수한 것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러나 큰 반발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해당 법안으로 내놓은 티베리우스의 예상과 달리, 부자들은 법안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티베리우스가 나라를 뒤흔들어 혁명을 일으키고자 이러한 법안을 만든 것이니 그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을 만들어내며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부자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시민들에게 부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 지휘관들은 조상들의 무덤과 제단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워야 한다고 부하들에게 요구하지만 그것은 모두 헛된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많은 로마 사람들 중에 조상의 무덤과 제단을 갖추어 놓고 자신의 집과 가정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들의 재산과 호강을 지켜주기 위해 싸웠고 또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손바닥만 한 땅도 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열변이 로마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진실이 공유되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새로운 방법을 통해 역전을 노리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토론과 웅변을 통해 설득하는 대신 또 다른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뒤에서 매수하여 자기들의 편에 끌어들여 조정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 제도상 호민관들의 결정은 만장일치가 되어야만 효력을 갖기 때문에 옥타비우스가 반대표를 던지자 티베리우스의 법안은 바로 무효로 기각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첫 번째 냈던 토지 개혁안을 모두 찢어 버리고, 새로운 법안을 제출한다. 이 새 법안은 그간 법률을 편법으로 어기고 토지를 사유화시킨 귀족들을 그 고장에서 쫓아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환수제도로, 귀족이나 부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강경 법안이었다.

 

티베리우스와 옥타비우스는 이 법안을 사이에 두고 날마다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그 과정 중에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가 현행 법률을 어기고 많은 재산을 사유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옥타비우스의 땅값으로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옥타비우스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에 의해 여러 번 개혁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의 권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며 비판하고 그의 해임을 제안한다. 하지만 옥타비우스는 이러한 투표가 전례에 없으며 또한 이런 것이 로마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음을 들으며 호민관 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그의 해임안에 대한 투표를 강행하였는데 이는 호민관에 대한 신성불가침 권한을 위배할 여지가 있어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조차 우려하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호민관으로써 갖고 있는 거부권을 활용해 로마 시내의 모든 축제와 시장이 열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이로써 로마 시내의 모든 상업과 행사를 중단케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농지법이 통과되어야만 자신의 거부권을 철회하였다고 승부를 걸며 버텼다. 이러는 동안 티베리우스의 신변을 우려한 민중들은 그가 이동할 때마다 그를 에워싸며 보호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 해임안을 관철시키게 된다.

 

옥타비우스를 해임하자 티베리우스는 거리낌 없이 농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원로원은 농지법에 아주 적은 양의 예산을 설정하는 편법까지 사용해가며 끝까지 농지법의 통과를 방해한다. 그해 마침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자신의 왕국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되다. 이로써 로마는 그의 왕국과 그의 국고를 손에 넣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이 새로운 자금원을 농지법의 예산으로 사용하겠다고 마음먹고, 이를 위해 평민 집회에서 이 돈을 농지법의 자원으로 쓰는 법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그 법안의 내용은 간략히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아틸루스 왕의 재산은 농기구와 경장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데 사용하고, 둘째, 원로원은 이 유산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으니 평민 회의에서 이 문제를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전면적인 선전포고에 해당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로마 역사상 전통적으로 예산의 집행은 원로원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퀸투스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를 비난하며, 아탈루스 3세가 죽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왕의 인장과 가운을 주었고 이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왕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루머까지 퍼트리며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임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티베리우스가 옥타비우스를 해임시킨 것은 신체 불가침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으므로 원로원은 그의 임기가 끝나면 재판에 회부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이를 안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다시 출마하려고 하였고 이는 공직에 있는 한 기소당하지 않을 권리를 법령에서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노리는 정적들의 음모가 점점 뚜렷해져 가자 티베리우스는 선거공약의 차원과 아울러 시민들의 지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새 법안을 제안했다.

 

첫째, 전쟁 복무 기간을 단축시키고, 둘째, 재판 결과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평민 회의에서 다시 판결을 받을 수 있게 하며, 셋째, 원로원 의원들로만 구성하던 법관 자리에 같은 숫자만큼의 기사 계급 시민들을 참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로원의 권리를 견제하고 축소시키는 것으로써 격분한 귀족들은 여기저기에서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이 당시 최고 제사장이었던 스키피오 나시카였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사촌임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며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려는 짓을 가만둘 수 있느냐고 말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선동한다.

 

마침내 법안에 대해 투표하는 날이 되었다. 귀족들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가급적 투표 장소에 가기를 꺼려했지만, 귀족 가문 출신의 이름난 철학자인 블로시우스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라쿠스의 아들이며 스키피오 아푸리카누스의 외손자입니다. 로마 사람들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당신이 겁을 내어 민중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에 티베리우스는 투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다.

 

투표가 진행되는 대회장 주변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매우 시끄러웠다. 이 혼란 속에서 집정관 플라비우스 플라쿠스가 티베리우스의 곁으로 다가와 지금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귀족들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를 죽이고자 많은 노예와 부하들을 무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티베리우스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음모를 알려 주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그에게 묻자, 티베리우스는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안 들릴 것이므로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것을 본 반대파가 원로원으로 달려가 티베리우스가 자기 머리를 가리킨 것은 왕관을 달라는 뜻이 틀림없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원로원은 발칵 뒤집혔다.

 

나시카는 폭군을 없애야 한다고 집정관에게 호소했지만, 집정관이 상황을 더 두고 보아야 한다면서 이를 거절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자! 이제 집정관까지 나라를 배반했소, 그러니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나시카가 이끄는 무리들은 곧바로 대회장으로 들이닥쳤고 그들의 손에는 곤봉과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둘렀으며 이에 죽어 넘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티베리우스는 자리를 피해 급히 달아났으나 곧 땅에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 할 때 갑자기 둔중한 무기가 날아왔다. 자신과 함께 호민관을 지내고 있던 푸블리우스 사투레이우스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귀족들과 부자들은 티베리우스를 죽인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그의 시체를 모욕했고, 다른 300여 구의 시체들과 함께 티베르강에 던져 버렸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친구들을 재판도 없이 죽이거나 강제로 추방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퍼지게 되자, 티베리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은 오히려 더욱 커져 그의 죽음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나시카에 대한 시민들의 원한은 너무나 커서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얼마 뒤 페르가몬 근처에서 죽고 말았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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