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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5. 2022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귀족 가문으로 인정받았음에도

옳지 않은 권력에 대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 2편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720


현직 호민관이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 포럼 한복판에서 살해당하는 참극은 로마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본래 호민관은 고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법률로써 신체 불가침권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사회 지도층이라는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대놓고 어긴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급한 대로 민중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원로원은 나시카를 추방형에 처한 뒤 티베리우스가 제안했던 농지법의 시행을 약속한다. 하지만 뒤이어 발족된 농지 분배 책임을 맡은 농지법 위원회는 원로원으로 구성되어, 시간을 끌며 시행에 대한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방해 공작과 로비로 인해 농지 배분을 실행하더라도 유명무실한 상태의 답보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상태로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다시 죽어가는 줄 알았던 개혁에는 불길이 되살아난다.

티베리우스 보다 9살 어렸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는 형을 살해한 정적들이 두려워서였는지 아니면 역으로 정적들에 대한 민중들의 미움을 더욱 자극할 요량이었는지, 집에서 나오지 않은 채 칩거로 일관했다. 그는 게으름과 사치를 피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그는 21살이었는데 형의 죽음은 그라쿠스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슬픔이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오히려 그의 형에 비해 더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하였을 거라고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한 추정이 합리적이라고 점을 뒷받침해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베티우스라는 고발을 당해 친구였던 가이우스가 변호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는 조리 있는 변론과 재치 있는 웅변술로 방청객들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형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제대로 된 집안에서 어머니의 교육과 형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터라 그저 이름 없는 인간으로 일생을 마치려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다른 웅변가들의 연설은 가이우스에 비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의 탁월함으로 금세 세간에 이름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귀족들과 부유층에서는 티베리우스에게 호되게 당한 과거를 기억해내고서는 그가 절대 호민관이 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며 수군거리며, 그에 대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농지법 작성 당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티베리우스가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의 장인과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여기에 참여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농지법에 대한 방해공작으로 고생했을 때나 결국 그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때 이미 21살이었던 가이우스가 그 사실이나 그 개혁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형 티베리우스의 죽음 이후 그는 조용히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나가며 칼을 가는 모습을 보인다. 28세에 가이우스는 집정관 오레스테스의 재무관이 되어 사르디니아 섬으로 떠나게 되었다. 정적들은 매우 기뻐했고, 가이우스 자신도 그것을 꺼리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어려서부터 전술에 대한 훈련을 쌓아왔고 무술 실력 역시 뛰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때까지도 정치에 뛰어들기를 주저하고 있었지만, 시민과 친구들의 계속되는 권유를 받으며 곤란한 입장이었다. 가이우스는 사르디니아 섬에 도착하자 곧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그의 용맹함을 두려워했고, 주민들은 그의 정의로움에 감사했다.

 

특히, 당시 한파가 몰아쳤을 때 병사들의 추위를 덜어주기 위해 직접 각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시민들로부터 옷을 보급받도록 한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는 다른 어느 장교에 대한 것보다 커져만 갔다. 이 무렵 가이우스는 정치에 나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키케로(Cicero)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원래 관직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정치와는 가능하면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형이 꿈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날 이후 정계 진출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야! 왜 그러고 있느냐?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와 나는 똑같은 일생을 살아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란 말이다.”

 

그렇게 재무관의 임기가 종료된 32세에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이우스는 로마로 일찍 돌아왔고 곧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 귀족과 부자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평민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가이우스는 4등으로 당선되었다. 형의 죽음 10년 만에 같은 위치의 직위를 맡게 된 것이다.

 

4등으로 당선되었지만, 호민관의 직무를 시작하자 누가 가장 능력 있는 호민관인지 시민들을 금세 체감하게 된다. 가이우스가 특히 정성을 쏟았던 것은 도로 건설로, 그의 설계와 공사 지도에 의해 로마 특유의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들이 도시 곳곳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웅변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웅변은 힘이 넘쳐서 마치 불을 토하는 듯 열렬했고,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단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어깨에 걸친 가운을 벗어던진 퍼포먼스를 시연한 사람도 다름 아닌 그가 최초였다. 그러나 그가 시민들에게 가장 인정받았던 것은 그런 퍼포먼스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온화한 인격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냈지만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독재를 한다거나 교만하다고 공격하는 루머들이 모두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연설하는 키케로

가이우스는 호민관이 되자마자 자신이,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처럼 원로원의 친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그의 동료들을 재판한 당시 집정관이었던 파필리우스를 공격하는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법엔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재판은 반드시 평민 집회를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파필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일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이를 어기고 재판을 열어 그들을 사형시키는 일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이에 대한 위법성을 가이우스는 10년 만에 지적하였고 이 때문에 파필리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가이우스는 농지법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추진했었던 125 헥타르의 제한이 원로원의 토지 소유와 충돌했었기 때문인데 가이우스는 이를 피하려고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것을 로마 시민들에게 배분하려 하였다.


사실 이 내용은 원로원의 재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또한 원로원이 이미 평민들에게 농지법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한 사실도 있었기 때문에 가이우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 법안을 통과시킨다.

 

가이우스는 여러 가지 개혁 법안을 마련했다. 먼저 형의 뜻을 이어 평민 특히 빈민들에게 국유지를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했고, 그들을 위해 곡식의 가격을 낮췄다. 또한 병사들이 무료로 군복을 공급받도록 했으며, 17세 이하의 복역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여러 속주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선거권을 주는 법안을 제안한다.


하지만 속주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은 기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다른 속주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른 법안을 뒤이어 제출하였다. 300명의 원로원 의원뿐만이 아니라 기사 계급 중 300명을 택하여 그들 역시 법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시민들은 가이우스의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특히 기사 계급의 법관을 선출하는 권리를 그에게 맡겼다. 이렇게 되자 가이우스의 권력은 급격히 커졌다.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도 성공한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큰 두려움이 휩싸였다. 그래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그의 형 때와 똑같이 다른 호민관인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포섭했다.

리비우스는 원로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속히 가이우스의 경쟁자로 부상했다.


원로원은 리비우스가 제안한 시민들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법안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쉽게 통과시켜 주는 방식으로 그를 키워주었다. 대신 리비우스는 자신이 정치계에 뛰어들어 시민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원로원 덕분이라며 열심히 선전해댔다.

문제는 이 빤한 전략이 시민들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리비우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제안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여, 그야말로 진심으로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리비우스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상대적으로 가이우스의 인기는 원로원의 의도대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다른 호민관인 루브리우스가 완전히 파괴된 카르타고를 다시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제비를 뽑은 결과 가이우스가 이 일을 맡게 되었고 곧 카르타고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70일 만에 카르타고 복구를 위한 기초 사업들을 모두 마무리해낸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비운 사이 정적들은 더욱 활개를 치며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가이우스와 가까운 친구인 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풀비우스와 가까운 친구였던 가이우스의 인기는 소문의 영향을 받으며 하락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원로원은 과거 가이우스가 다른 사람을 집정관 후보로 추대하면서 자신을 떨어뜨린 것 때문에 가이우스를 증오하고 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고 결국 집정관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로마로 돌아온 가이우스는 곧 세 번째로 호민관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절대다수의 표를 얻었지만, 그의 동료들이 표를 속여서 발표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그의 표가 무효처리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원로원뿐만 아니라 다른 호민관들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이우스의 정적들은 카르타고에서 이뤄낸 그의 성과 역시 모두 없던 일처럼 비난했고, 오피미우스 주도로 가이우스가 만들었던 법을 전부 폐기할 것을 계획했다.

 

가이우스가 통과시킨 법을 폐기하기로 결정하는 날, 오피미우스의 하인인 안틸리우스가 풀비우스 일파를 향해 “귀한 분께서 행차하시니, 어서 길을 비켜라, 이 악한 무리들아!”라고 외쳤다가 분노한 사람 중 한 명이 던진 철로 만들어진 펜에 맞아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오피미우스는 기다리고 있던 기회를 만난 듯이 부하의 죽음을 이용하기로 작정하곤 기뻐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고 자신의 하인을 죽인 사람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이처럼 무섭고 끔찍한 일을 그냥 넘길 수 없다며 분개했다. 원로원은 오피미우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반역자를 잡아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오피미우스는 사람들에게 무장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모이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듣자 풀비우스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사람들을 집결시켰으며, 당일 무장한 채 전통적인 평민의 아성이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무장을 하지 않은 채, 마치 평민 회의에 나가는 평상복 차림으로 허리에 작은 칼 하나를 차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가 막 집을 나서자 아내인 리키니아가 뛰어나와 이렇게 말했다.

 

“가이우스, 오늘의 이 작별은 당신이 평민들 앞에 연설을 하러 나갈 때와는 다르며 또한 영광스러운 전쟁을 위해 출정을 하는 길도 아닙니다...(중략)... 당신은 무장도 안 하고 남을 해치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상처를 입겠다는 뜻이니 참으로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나라에 아무 이로움도 없는 죽음을 당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악이 승리하고, 힘과 칼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눈물을 흘리는 부인의 팔을 뿌리치고는 친구들과 묵묵히 걸어갔다. 리키니아는 다시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다가 놓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풀비우스는 자신의 어린 막내아들을 전령으로 보내 화해를 제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오피미우스가 반대했고, 곧이어 수많은 병사들과 크레타 섬에서 데려온 궁수들을 이끌고 나와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풀비우스는 도망치다 그의 큰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Death of Gaius Gracchus)>, 장 밥티스트 토피노_레브룬(Jean Baptiste Topino-Lebrun), 1792.

가이우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단지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대된 것을 몹시 슬퍼하며 디아나 신전으로 들어가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인 폼포니우스와 리키니우스가 그를 말리면서 칼을 빼앗아 버렸다. 이후 나무다리를 지났을 때 두 친구는 아무도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게 자신들이 다리 입구를 지키겠다고 말하고는 가이우스에게 몸을 잘 숨기라는 부탁을 했다.


결국 두 친구는 죽음을 당했고 가이우스는 필로크라테스라는 하인과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이때 시민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달리기 선수라도 응원하듯 격려해 주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도와주지는 않았다. 말을 빌려달라고 해도 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가이우스는 어느 숲에 도달한 후 필로크라테스의 손을 빌어 목숨을 끊었고, 그가 죽자 필로크라테스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두 사람이 사로잡혔는데, 하인이 주인을 안고 떨어지지를 않아서 먼저 하인을 죽인 다음 가이우스를 죽였다고도 한다.

가이우스와 풀비우스 일파들의 시체는 모두 티베르강에 던져졌는데,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오피미우스는 곧이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절대적 권력을 장악했고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 무슨 큰 명예라도 되는 듯 자신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신전까지 세웠다.


그러나 곧 누미디아와 한판 붙은 유구르타 전쟁 직전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디라키움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아 모든 명예를 잃은 것은 물론 평생을 증오와 모욕 속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원로원은 가이우스가 발의했던 모든 법안을 폐기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한다.

 

시민들은 한동안 억압에 눌려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쿠스 형제를 그리워하며 몹시 슬퍼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광장에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고, 두 사람이 죽은 자리를 신성한 땅이라고 공포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철마다 햇과일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으며, 신전에 들어온 것처럼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라쿠스 형제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추진했던 토지개혁법은 약 60년 뒤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손에 의해 드디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여담이긴 한데,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머리를 들고 오는 자에게 그 머리의 무게에 상응하는 금을 줄 것을 약속했는데, 자살한 가이우스의 목을 잘라 머리를 들고 온 셉티물레이우스(Septimuleius)라는 자가 가이우스의 뇌를 빼내고 녹인 납을 부어 머리의 무게를 늘리려는 얕은 꾀가 들통나는 바람에 약속을 취소하고 그대로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들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로마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뛰어난 교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무기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법안은 원로원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이 법안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이에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고 이들은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원로원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도전은 원로원은 공화정 설립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은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다. 집정관이 공식적으론 최고 권력자지만, 원로원의 여우들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들에게 집정관을 맡기는 식으로 자신들이 정치를 주도했다. 그 증거로,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 우글거리는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은 이미 원로원 의원에 한 발 담근 상태였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거의 모든 문제를 원로원과 상의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원로원의 의사는 곧 로마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구태(舊態)에 처음으로 개혁이라는 메스를 들이대며 도전한 것이다. 호민관들 중 그라쿠스 형제처럼 호민관이 갖는 권한을 제대로 요구하고 구사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제도상으로만 보면, 호민관의 권력도 집정관과는 다른 의미에서 막강한 것이었다. 행정권과 군단 지휘권을 제외하고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 두 개만으로 황제의 직위를 획득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단 한 가지, 호민관의 1년 임기였던 것을 없애고 종신으로 호민관 권한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것 만으로 황제 노릇이 가능했을 정도이니 호민관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삼두정치에서 군사력을 맡았던 폼페이우스가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배후에서 원로원에 불리하고 민중파에 유리한 법들을 잇따라 제정하게 했는데도 원로원이 아무 조치도 못 취했다는 점에서 그 강력한 권한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호민관이 가진 막강한 권한은 이들이 입법권, 사법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원로원의 허락 없이 자신의 재량만으로 재판을 열 수 있었고 또한 법률을 민회에 회부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런 권력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로원인데, 이는 원로원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없애라는 개혁을 요구하는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법 때문에 호민관이 이런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로 하여금 평민 집회를 따로 갖게 하였고 이들이 호민관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정부 체제를 완전히 고수하는 한편 평민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케 한다. 그리고 이 평민들의 정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평민들의 요구 수용’과 ‘귀족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다. 평민들의 정부가 완전히 원로원의 통제를 받았다. 호민관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자들은 평민 귀족들 뿐이었고, 이들은 원로원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맞는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금까지 2천 년도 더 전의 대한민국의 저 반대쪽 이탈리아 로마제국에서 있었던 실패한 개혁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2천 년도 더 지난 대한민국의 이야기라고 해도 믿길 만큼 똑같이 닮아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평민 귀족이라는 명문가로 인정받던 기득권층이었다. 그들 이전의 호민관 출신들이 원로원의 눈치를 보며 그들과 같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기 위해 지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던 출중한 젊은이들의 개혁이 왜 실패로 돌아갔을까? 그들의 두뇌가 부족했던 것일까? 결국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던 가장 큰 이유는 로마 시민들의 의식이고 실천하지 않는 안일함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이중적인 삐뚤어짐에 있었다.

앞서 자세히 상술하였다시피 제대로 된 자유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속주(식민지)의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줘야 한다고 평등을 주장하자, 다른 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에 부합한다면서 찬성했던 로마 시민들은 그것은 자신들의 특권인데 나누고 싶지 않다며 반대하여 기각시켰다. 반대파의 무장 린치에 죽지 못해 도피하던 동생 가이아스와 그 하인을 보며 로마 시민들은 힘내라며 입으로는 응원하면서 아무도 나서서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말을 빌려주는 것조차 꺼렸다.

 

멀쩡하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가 짐승보다 못한 부모를 만나 버려지고, 자신들의 과시욕을 채우고자 입양을 해놓고 학대하고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심지어 자신을 나아준 부모가 다른 내연남, 내연녀와 결혼하면서 그들의 손에 아이가 죽어가는 반인륜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때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며 SNS에 사진을 올리고 해당 경찰서 앞에서 제대로 수사하지 못했다며 규탄집회를 열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본다. 그들의 마음을 비난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에서 그라쿠스 형제가 죽고 난 뒤 형제의 동상을 세우고 그 동상 앞에 꽃을 가져다 바치는 로마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내 시선이 삐뚤어졌다 탓할 것인가?


정말로, 그 수사를 덮었던 경찰관들은 자기 자식들이 없어 그 일을 그저 뭉개고 덮었을 거라 생각하나? 경찰에 핑계를 대놓고 경찰서 앞에서만 궐기집회를 하는 대중을 개돼지라고 비웃는 검찰의 쓰레기들은, 경찰에서 불기소 의견으로 올려도 그들이 제정신을 가지고 검토했다면 얼마든지 진작에 아동학대죄로 처벌하여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은 예비 법비 검찰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부직이라며 검찰공무원이라며 그 사무실에서 계장이며 검찰 수사관이며 검찰직 하위 공무원을 하는 당신들의 친구, 조카, 동생, 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서 같이 SNS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따위의 사진을 올리나?

 

로마의 원로원은 결국 자신들을 포함한 기득권층이 부정하게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지키고 그것을 대를 물려 이어가겠다는 욕망에서 출발했다. 그들을 욕하고 자신들에게 더 많은 땅과 권리를 주지 않는다고 새로운 토지법에 열광하던 로마 시민들은 정작 원로원 측에서 허수아비 하나를 내세워 시선을 돌리자 금세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원로원이 의도한 쪽으로 열광을 보냈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나는 그들이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숨겨진 지저분한 욕망을 동류이던 원로원에서 가장 잘 읽어냈다고 본다.

늙어서 노느니 용돈이라도 받고 점심 도시락이라도 받으며 시원하게 소리도 지르고 스트레스도 풀린다며 광화문에 모여 민중 코스프레를 하는 철없는 어른들을 보면 로마 시민들이 떠오른다.


전관이라는 이유로 능력도 안 되는 자기 자식들의 이름으로 50억을 받아 챙기는 법비(法匪) 들을 보면서 원로원이 생각난다. 빨간당이 법비들을 중심으로 법비를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며 설치는 것을 보며 원로원에서 허수아비 집정관과 호민관을 내세워 자신들의 부정부패 왕국을 지속하려고 했던 모습을 그대로 본다.

 

썩은 로마의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과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밥그릇이 깨질 위기에 필사적으로 대응했던 모습을 지금의 빨간당과 아주 오래된 법비들, 그리고 그들을 제대로 수사했다가는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며 적당히 눈치 보며 덮을 준비를 하고 있는 현역 법비들을 본다. 물론 그 사이에 현재 여당이라며 그 안에서 적당히 법비나 빨간당과 물밑으로 연결되어 똑같은 짓을 했을 파란당의 썩은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천 년 전 로마에서도 그랬다. 개혁파 측이라고 하는 쪽에서 자신이 해먹은 부정부패가 걸릴까 봐 속으로는 원로원 측을 동조하는 이들은 있었고, 진정한 개혁을 지지한다며 박수를 치다가도 당장 자신들의 이익에 뭔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지를 철회하던 정신 나간 시민들은 늘 하나 가득 있어왔다.

개혁이란, 나를 위해 상대를 제거하거나 상대의 이익을 나에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각하는 미토콘드리아 수준의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학습하고 더 강한 개혁은 결국 힘 있는 독재의 형태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고 결정 내린 카이사르가 그라쿠스 형제가 죽고서 60년이나 지나 개혁의 칼을 들어 로마를 바꾸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변화를 이뤄내는 듯했지만 역시 원로원 세력과 자신들의 잇속을 밝히는 것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는,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다시 한번 당신의 양심에 대고 확성기를 외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하찮은 사익을 우선하지 않고 진정 올바른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기득권층을, 지금보다 더 많은 부정부패를 통해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뉴스만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는데도 무엇 때문에 당신이 주저하고 있느냐고.


원로원 측에 내세운  법비의 아내가 당당히 기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들이 말하는 ‘우리’인가?

개혁의 성공은 사회를 이루는 대다수의 민중이 진정으로 깨어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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