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26. 2022

마흔여덟이 되면서 뚱뚱하다고 이혼을 당하고서

새벽을 달리면서 삶을 재정립하여 전설의 정치인으로 기억되다.

1948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게라브론에서 정육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헝가리에 원래 배경을 두었으나, 1946년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수많은 독일인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1965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진가로서 도제살이를 시작했지만, 이듬해 그만두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채 시력이 안 좋다는 이유로 의무적이던 당시 군복무도 하지 못하였다.

 

1967년 그는 독일 학생 운동과 진보 정치 운동의 활동가로 변신하여, 1968년에 먼저 주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활동하다가, 몇 달 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이하 프랑크푸르트)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당시 그는 칼 마르크스, 마오쩌둥, 게오르크 헤겔 등의 저작을 공부하여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제4강의실의 단골 토론 논객이자 무장단체 ‘슈폰티(Suponti;혁명적 투쟁’의 멤버로 프랑크푸르트의 만성적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빈집 투쟁 도중 경찰과의 다툼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시기 동안에 대학에서 주도되었던 좌익 행사들에 참석하였다. 1971년 자동차 제조회사 오펠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겠다며 동료들을 모으기 시작하지만, 6개월 만에 파업 주동자로 낙인찍혀서 해고를 당했고, 그 후 책방 주인과 미숙련 노동직 등을 전전하다가,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택시 운전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군파 등 극좌 그룹의 유혈투쟁에 염증을 느낀 뒤, 1977년 극좌파와 결별했으며, 몇 번의 거절을 당한 끝에 1981년 당시 서독의 신생 환경 정당 녹색당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밑바닥부터 출발한 인생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한다.

독일의 정치인으로, 헤센주의 환경부 장관(1985~87, 1991~94, 적녹연정), 독일 연방 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1998~2005)을 역임하면서 1991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 녹색당을 이끈 지도자(실질적 당수)였던 요제프 마틴 피셔(Joseph Martin Fischer)의 이야기이다.

 

통칭 요슈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게 된 이유는, 요제프의 헝가리식 애칭, 요스카(Jóska)에 유래한 것이다. 당 내 그리고 독일과 유럽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인정받는 정치인이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의 세계 최초 적녹 연립정부에서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5년에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직을 거쳐 올브라이트 그룹 수석 전략 고문을 하고서 Joschka Fischer and Company를 공동 설립하였다.

 

사실 그가 한국인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그가 낸 책, 《나는 달린다》(Mein langer Lauf zu mir selbst) 때문이다. 독일 외무장관 시절 정치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고도비만, 이혼, 자기 절망감 등 개인적으로는 큰 시련을 겪다가 달리기를 통해 근본적인 자기 개혁을 통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2000년대 초, 한국 마라톤 열풍의 계기를 가져올 정도의 붐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정계에 투신한 피셔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녹색당 소속 독일 연방하원 의원을 2년간 역임하게 된다. 1984년 10월 18일 헤센 주의회의 부의장 리하르트 슈튁클렌에게 욕설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5년에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주정부 단위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하고 녹색당이 연립정부를 꾸려 협력하는 적녹연정이 출범하면서, 헤센 주 환경부 장관으로 취임하게 된다. 취임식 당시의 의상이 매우 파격적이어서 그때부터 그의 이미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 즈음(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태가 터지는데, 사민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다가 결국 이 사태로 헤센 주정부가 붕괴하여 야당인 기민당과 자민당에게 잠시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잠시나마 장관직을 수행했던 그는, 독일 녹색당 강경파와의 당내 내전에서 집권 가능한 준비들을 착실히 해나가야 한다는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치열하게 당내 정적들과 싸웠다.

 

결국 1990년 통일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정당득표 5% 봉쇄 조항에 걸려 의회 진출이 좌절되었고, 그는 이 충격적인 사태 이후 더욱 격렬하고 처절하게 근본파와 일전을 벌인 끝에, 1991년 전당대회에서 녹색당을 이끄는 일인자로서 온건파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헤센주 적록연정에서 확대 개칭된 환경에너지부 장관으로서 재취임하면서 성공적으로 직무를 수행하였고, 1990년대 중반까지 거듭된 패배 속에 무기력에 가까운 정치력을 선보인 사민당 정치인들보다 훨씬 인지도를 높여가며,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를 확보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는 녹색당을 독일 정치의 중도 및 개혁파로 폭넓게 옮기며 인구 8천만을 넘는 독일이라는 대국의 연방정부 참여를 위한 길을 닦으면서, 정치적 성공가도를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1998년 9월에 치러진 제14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녹색당은 6.7%(49석)을 얻었고, 298석(40.9%)을 확보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7대 총리와 더불어, 새 정부 출범일인 10월 27일, 세계 최초의 적록연정 부총리이자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68 혁명’의 주역들이 당시 혁명 이론가, 루디 두취케의 호소처럼 ‘제도를 통한 행진’을 강조하는데, 그때 많은 온건한 이들이 사민당 혹은 녹색당에 참여하였고, 언론과 학교 등 일상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피셔처럼 밑바닥에서부터 착실히 과거사 적폐 청산 및 개혁에 동참해왔기에, 결국 이 세계 최초 연방정부 적록연정은 68세대의 승리라고도 역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99년 피셔는 코소보 전쟁 조기종식을 위한 독일의 참전안을 전당대회에서 신임안과 연계시켜 처리하려 했는데, 그의 정책에 반발한 어느 녹색당원이 물감 폭탄 테러를 그에게 안겨, 얼굴과 어깨 등이 엉망이 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상황에 휘둘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호소력을 담은 연설을 성공시키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게 되었고, 참전안은 과반을 넘기며 통과되었다.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 등과의 협력에 힘입어, 끔찍했던 전쟁은 결국 밀로셰비치 기소와 더불어 공습중지라는 결과를 얻어내며 상황을 종료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 행위가 발생한 후, 호전적으로 변화된 국제정세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아들 부시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콜린 파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 등과의 협력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파병하였다.

 

하지만 대량살상 무기(WMD) 존재가 불명확했던 이라크전에는 독일 여론의 격렬한 전쟁 반대 속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등과 함께 참전하지 아니하였다. 이와 함께 이 해 여름에 터진 대규모 홍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민심을 얻은 적록연정은, 2002년 9월 22일 제15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기적 같은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2기 적록연정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독일의 하르츠 개혁안들에 대한 여론의 악화와 이로 인한 사민당 내의 분당(分黨)및 지방선거 연전연패, 특히 2005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총 선거에서의 충격적 참패로 인해 상원 의석마저 위험에 처하자, 도저히 국정을 이끌 돌파구를 찾지 못한 슈뢰더와 피셔는 결국 2005년 9월 18일 제16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조기 선거)를 실시하였다.


언론과 세간의 예측을 뚫고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 기사 연합에 35.2%(226석) 대 사민당 슈뢰더 34.2%(222석), 불과 (4석)1% 차이로 석패하였으나 사실상 대선전하여, 기민기사-사민 대연정을 출범시키는데, 결과와는 상관없이 패배를 인정하며 슈뢰더와 피셔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5년 10월 13일 외무부 장관직을 사임하면서 30여 년을 달려왔던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피셔는 현직에서 일하는 녹색당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녹색당의 대원로로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2006년 9월부터 2007년까지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국제 대학원에서 방문교수로서 외교와 국제관계를 강의하였으며, 2007년에는 아랍 민주 재단에 그 신탁 통치부의 설립원으로서 가입, 활동하였다.

 

2008년 이래로 워싱턴 D.C.에서 절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주도하는 ‘올브라이트 그룹’ 컨설팅 사무소에서 자문을 하였다. 2009년 리스본 조약이 천신만고 끝에 통과된 이후인 2010년 9월 15일, 피셔는 유럽 연합의 연방화를 위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하여 설립된 스피넬리 그룹(Spinelli Group)을 후원하였다.

 

공영방송 ZDF(독일 제2 텔레비전 방송)에서 2003년에 ‘위대한 독일인(Unsere Besten)’을 전문가들과 여론 투표에 의해 선정했는데, 정치인으로서 꽤 높은 52위에 올랐다. 그의 절친이자 상관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7대 총리는 82위. 그러나, 2014년 조사에서는 은퇴를 하 ㄴ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순위가 상승하여 37위까지 올라간다. (제7대 슈뢰더 총리는 23위)

 

자아, 오늘 당신에게 피셔의 인생을 소개해준 이유는 당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독일의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잠시 퀴즈를 하나 내도록 할 테니 신중하게 위의 글을 보면서 답해주길 바란다. 피셔는 자신의 인생이 최악으로 치달았다고 회고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가 과연 언제였다고 당신은 판단하는가? 위에 촘촘히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최악이라고 여겨졌던 시기가 언제인지 맞출 수 있겠는가?

 

그가 말하는 자기 인생에 있어 최악의 인생 시기는 '1996년'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많은 생각을 해보고, 다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이런저런 경험을 겪은 지금 생각해보면, 112킬로그램이나 되었던 나의 몸은 나쁜 습관의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거의 20년 이상 나 자신과 내 정력을 쓸데없는 데 낭비해왔다. 나는 1996년 갑자기 개인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거의 파국의 상태라고 느꼈다. 나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파멸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말 그대로 공산주의에 빠져 젊음을 탕진했을 시기도 아니고,  주 환경부 장관을 연임까지 하고 장관직을 마치고 이제 중앙으로 진출하여 녹색당의 일인자로서 녹색당을 독일의 중앙정치로 끌어올리는 그 시기가 바로 1996년였다. 그런데 그는 왜 당시에 그렇게 힘겨웠을까?

앞서도 설명했지만 1990년대 중반의 피셔는 당시 메인이라고 불리던 사민당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인기를 끌며 인지도는 물론이고, 헤센 주의 환경에너지부 장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중앙 정치인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왜 체중이 그렇게 많이 불어갔고, 스스로 20년 이상이나 자신의 정력과 자신을 쓸데없는 데 낭비했다고 자조했을까?

 

그는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열심히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은 알았다. 본질이 없이 그저 멍하니 반복되는 일상과 그저 타성에 젖어 흘러가는 흐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체중이 부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의 그런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그는 이후 22살 연하의 네 번째 결혼을 했고, 현재 다섯 번째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당시 세 번째 부인은 그의 변화와 그의 무기력한 삶과 태도에 실망해서 그를 떠나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장관을 두 번씩이나 연임하고 이제 중앙 정치계로 더 큰 날갯짓을 하려던 피셔는 앞서 자신이 회고했던 것처럼 그러한 파국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 결심한다. 그는 모든 일과를 마친 자정이 가까워온 시각에 자신의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을 절박함에서 나온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내가 떠나버린 후 터질듯한 돼지 같은 몸에 맞는 옷이 없어 또 옷을 맞춰야 할 상황에 터져버린 옷을 여미던 그는 거울 앞에서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회상한다.

 

결혼 생활이 깨진 것 말고도, 개인적인 생활 태도, 나의 외모, 생각까지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나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50살의 문 턱에서 나는 지금까지처럼 되는대로 살든가, 아니면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위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완벽한 변화를 시도하든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당신이라면, 만약 당신이라면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누구든 좌절로 쓰러질 수 있고, 힘겨워할 수 있다. 그 순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피셔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 위기는 아주 포괄적이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위기였다. 그러므로 체중을 줄이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 삶을 재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나는 예전 방식대로 살려고 하는 내 생활 스타일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래,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야만 했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수는 없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그는 자정이 다된 시간 새벽을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달리기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1년간 매일같이 마인강을 달리는 코스를 통해 그는 무려 35킬로그램을 감량하고 1년 후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낸다.


고도비만으로 제대로 걷는 것도 헐떡이던 그가 그저 정상체중으로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마라톤 풀코스를 1년 만에 해내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가 운동선수였거나 일이 없이 재활치료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치로 진출하기 위해 하루가 25시간이어도 부족한 일상을 소화해내며 새벽을 쪼개 달려가며 이룬 성과였다.

 

한국 사람들은 그의 책을 통해 마라톤 열풍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책에서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달리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책에서 쓴 것처럼 그는 자신을 다시 다져나가는 방식의 하나로 달리기라는 방식을 택했을 뿐, 그 시간과 육체를 단련하는 시간들은 그를 담금질하는 시간이었을 뿐, 그것이 꼭 달리기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가들의 전문 지식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결심을 실행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난 후에야 도움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내 자신의 의지가 이런 길을 실행하고 끝까지 어떤 결실을 볼 수 있게 만든 근본 힘이라는 것이다. 전문적인 조언이나 충고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심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리셋하고 자신감 있는 정치인으로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하고서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라는 자리에 1998년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인생 정점 직전은 바로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그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거리를 떠돈 사람이 독일 정치인중에서도 준비된 원고 없이 자신의 정견을 술술 연설해나갈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는 앞서 대학을 가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를 할 때, 기초부터 고급과정까지 달리기를 하듯 미친 듯이 고전을 읽어가며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제대로 된 전문지식이 없었을 거라고 착각과 편견을 버리길 바란다.

 

그는 이미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계에 뛰어들고 20여 년을 허비했다는 표현을 쓸 만큼 그저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고 깨닫자마자 다시 자신을 가장 잘 정련된 수준의 검이 되도록 담금질하고 끊임없이 두들긴 것이었다.

 

당신의 삶이 조금씩 잘 풀리고 이제 더 큰 물로 옮겨가야 할 시기라고 할 정도로 잘 나갈 때 당신은 피셔처럼 자신의 사람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깨닫고 다시 리셋하기 위해 새벽을 달리는 결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는 가족이 당신을 버리고 떠나가야만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체중은 폭탄처럼 어느 날 하루에 3킬로씩 찌는 것이 아니며, 사랑과 신뢰의 균열은 어느 날 한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씩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하지만 너무도 확실하게 저벅저벅 당신을 향해 잡아먹겠다고 오는데 당신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깨닫게 된 순간 이후이다. 50이 다 된 나이의 피셔는 그것이 늦었다고 포기하지도 않았고, 당장의 생활이 가진 리듬을 깨면서 뭔가 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들이 모두 잠들기 시작할 시각에 운동화 끈을 묶고 밖을 달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그렇게 달리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고,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목표의식을 확고하게 다졌고, 본래 자신이 가져야 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려갔다.


그 시간이 365일이라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정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더 이상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인간답게 사 수 있을 지에 대해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들여다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가는가?

앞으로 보고 달려 나가는 것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고 유명해지는 것도 좋다. 하지만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얻어지는 그 모든 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있지 않고서, 자기 자신이 올바로 서지 않고서 그 위에 쌓은 것은 어느 순간 와르륵 무너져 내리거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작은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큰 것은, 큰 성공을 이루지 않은 사람은 그나마 실패라고 부를만한 좌절을 겪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웃픈 이론을 성립시킨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 왜 그것을 지금까지 해왔는지를 차분히 생각하며 하나하나 올려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것도 아니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잘 나갈수록, 일이 잘 풀리고 더 올라가는 것 같을수록 삼가고 실패를 대비하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자만이 더 올라가고 지금의 위치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당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잠시 멈춰 서라.


계속 달리는 동안 흔들리고 맘만 바빠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지고 달려도 그리 늦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결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귀족 가문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