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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7. 2022

도저히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전략으로..

전 세계가 두려워하던 로마 군단을 공포에 떨게 한 전설의 장군이 되다.1

B.C 247년에,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9살에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히스파니아에서 사망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우이자 소년의 매형이었던 하스드루발이 히스파니아의 사령관이 되었다. 소년은 그렇게 청년이 되어 매형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게 된다.

리비우스의 사료에 따르면, 조금 다른 역사적 기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소년은 아버지와 떨어져 카르타고 본토에서 생활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 식민 전쟁 때문에 히스파니아에 머물며 떨어져 지냈다는 것이다. 그가 히스파니아로 향하게 된 것은 이후 매형 하스드루발로부터 초청을 받게 된 이후의 일이라는 기록이다.

 

이 초청 서신은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다. 이때 한노는 지역 사령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군대를 세습한다며 소년의 파견에 반대했다. 그는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다른 의원들이 그의 반대에 대해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주제넘은 오지랖이라고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예정대로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군 경험을 쌓았다.

 

그런데 전술한 리비우스의 기록은 다소 과장되고 꾸민 이야기라고 비난받는다. 그 이유는, 소년이 장성하여 장군이 되어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올 때 했던 말의 기록 때문이다.

“내가 도시를 떠날 때가 (아버지 하밀카르가 살아있었던) 아홉 살이었는데, 서른여섯 해가 지나서야 돌아오게 되었구나”

 

즉, 그의 직접적인 발언에 대한 기록에 의거하여, 그는 B.C 237년 아버지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떠난 후 B.C 203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는 사실관계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군인으로서 경험을 쌓은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주둔군의 사령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는 사령관이던 그의 매형 하스드루발이 켈트족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는 사령관이자 매형인 하스드루발의 직위를 세습하는 형태로 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실 세습의 형태라고는 했지만, 이미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군대에서 잔뼈가 굵어왔기 때문에 전우로서 함께 싸워왔던 병사들부터 인망이 높았던 터였다. 용맹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성실성까지 갖췄던 그는 무엇보다 모든 병사들이 그리워하고 존경했던 그의 아버지 하밀카르와 너무도 빼닮은 청년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 로마 원정에서 한 눈을 잃으면서 애꾸눈의 카리스마로 상징되는 우리가 한니발 장군이라고 기억하는 풀네임,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Ἀννίβας Βάρκας)의 이야기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하면서 유명해졌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를 공격한 파격적인 전략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거기에 더해 전설적인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 군단을 궁지로까지 몰아넣었다. 그러나 끝내 로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로마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자마 전투에서 패배했다.

 

카르타고는 패전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명장으로 칭송받는다. 전쟁의 결과와는 별개로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전설적인 전과는 전쟁사에 있어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의 적국이던 로마에서조차 그를 명장의 대명사로 칭송한 기록이 전한다.

그는 지휘력 이전에 자신이 훌륭한 한 명의 전사였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그가 늘 전선의 앞에서 앞장섰기 때문에 그의 지휘 하에 있던 병사들은 항상 사기가 충천했다.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며 모든 전투에 앞장섰던 한니발은 지휘관이 되면서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 어떤 병사들과 비교하더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신체의 활력을 유지할 최소한의 정도로만 먹고 마시는 극한의 생활을 유지했다. 말 위에서든 지상에서든, 전사로서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공격할 때는 항상 앞장섰으며, 전장을 떠날 때는 가장 마지막에 떠났다. 물론 그가 모든 것에서 뛰어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단점들도 장점들에 못지않게 많았다고 한다. 비인간적인 잔인함, ‘카르타고적 배신’을 넘어서는 배신 행위, 그리고 진실과 명예, 종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서약의 신성성과 다른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오만함 등이 그러하였다.

 

사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모든 역사적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으나 그것은 후일 <다시 읽는 전쟁사 이야기> 시리즈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본 시리즈의 특성에 맞춰 한니발의 등장에서부터 간략하게 기술하기로 한다.

 

한니발은 지휘관이 되고 나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주도하였고, 전쟁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이유로 전쟁사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을 시작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이 개전하게 된다. 한니발은 총사령관에 오르면서 이미 바로 로마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사군툼은 당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로마의 동맹 도시였다.


공격을 받게 되자, 사군툼은 바로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로마의 대외정책은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여 동맹 도시를 늘리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동맹 도시인 사군툼이 함락당하면 로마의 대외적 위신이 크게 훼손될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감퇴하고 동맹 도시들이 그 연합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바로 전면전으로 응하기보다 우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이때 로마의 입장에서 사군툼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던 이유가 컸다. 대부분의 병력이 갈리아인들을 견제하느라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보낼만한 병력이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머리가 좋고, 전체 흐름을 읽는 한니발이 이 모든 판세를 예상하고 계획적으로 로마의 허를 찌르는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따라서 로마는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을 한니발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장의 상황이 한시가 급해 여유 있게 외교사절을 응대할 틈이 없다며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어차피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터라 굳이 협상하는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지만, 당장 전쟁의 첫 성과를 올려야 할 상황에 여유 있게 그들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젊은 날의 그의 오만함과 당당함의 표현이었다.

 

로마 사절단은 그의 무례함에 분노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 바로 건너가서 항의했지만, 이는 오히려 긁어 부스럼의 역효과를 일으켰다. 카르타고 원로원도 로마의 원로원과 비교하여 오만하기로는 만만치 않아서 로마의 위법 행위를 역으로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의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사군툼과 동맹을 맺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국의 세력권을 정한 뒤 이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던 내용의 서명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사실을 그들은 반박했다. 로마 사절단의 입장에서는 궁색하게 과거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있었다고 맞서 보았지만, 공식적으로 그것은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쳐 비준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로마사절단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의를 하러 본국에 들어갔던 로마사절단은 오히려 카르타고의 원로원에 집중 비난을 받으며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의외로 강경한 카르타고 본국의 대응에 로마 사절단은 결코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로마 사절단은 전면전을 치를 것인지 사군툼에서 철수할 것인지를 양자택일하라며 반협박성 강요를 하게 된다. 이는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의 추궁에 궁색해진 탓에 어설픈 해명으로 굽히기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대 로마제국을 내세우며 전쟁을 협박으로 무마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로마의 태도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카르타고 원로원 측은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라고 강경하게 답변하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기술에 따르면, 로마의 사신이던 파비우스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라고 호령했는데, 카르타고 원로회 측에서 “그대가 주고 싶은 것을 줘라!”라며 받아치자 파비우스가 “좋다, 전쟁을 주겠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로마와 카르타고가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니발과 사군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안 사군툼 시민들은 더 이상 전쟁을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굴욕적인 강화 요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젊고 오만함으로 가득 찼던 한니발은 이렇게 대답한다.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그대로 성 안에 두고 옷 두 벌씩을 가지고 나오시오.”

 

사군툼이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임을 감안해보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사군툼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재산을 모두 불태운 다음 결사 항전을 벌였다. 그들의 자존심에 그들은 목숨을 걸었지만, 한니발의 군대에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사군툼은 함락당했고, 모든 성인들은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로마는 선전포고 후 빠르게 카르타고와의 전쟁태세에 돌입한다. 먼저 신속하게 정예 군단을 시칠리아와 프랑스 남부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로마는 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밑에서 외교적인 술책도 동시에 사용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 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대로 원활한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군툼의 함락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변 국가와 도시들에 로마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로마 사절단을 쫓아냈다.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를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던 터라 더욱 비협조적이었다. 당시 로마가 북이탈리아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갈리아와 로마의 갈등은 더욱 악화일로로 고조되어만 갔다.

 

한니발은 아예 본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시할 준비를 했다. 그는 9만 이상의 카르타고 정예 병력 중 절반을 로마 원정을 위해 징발했다. 이는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코끼리 37마리에 해당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한니발의 북상 소식은 로마 본토에 바로 알려졌고, 로마 정부는 급박한 상황 전개에 놀라, 즉시 두 집정관인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각각 갈리아와 시칠리아로 보냈다. 스키피오는 바로 첩자를 보내 한니발의 북상 경로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미 로마군의 움직임을 읽고서 갈리아 내부로 본 부대를 깊숙이 이동시키며 스키피오의 추적을 피했다.

 

이때, 저 유명한 한니발의 알프스 산맥 행군이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감행할 수 없을 정도의 무모하고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사방으로 고립된 적진에서 대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다는 것 자체가 군사전략상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언덕 정도의 산도 아닌, 험준하기로 유명한 알프스 산맥이었고, 무엇보다 당시는 혹한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초겨울이었다.

산맥을 넘는 동안 추위는 더 매서워질 것이 너무도 명확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알프스 산맥에 살던 원주민들도 카르타고군을 당연스레 적대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진군을 감행하다 보니 한니발은 산맥을 그냥 넘는 것도 아니고 그곳의 비우호적인 부족들과도 일일이 싸워나가는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갈리아족은 론 강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해왔고, 한니발은 이들을 어렵사리 격파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알프스 산맥에 퍼져있던 갈리아족들은 한니발의 군대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수백 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댔다. 갈리아족을 맞아 카르타고군은 끊임없이 그들을 격파했으나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험난한 원정으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과 만나기도 전부터 이미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알프스를 관통하겠다는 무모한 전략으로 인해 한니발은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 기는 6천 기로 줄어있었으며 밧줄로 묶어 끌어올리는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끌고 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사망하는 불운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남아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코끼리로는 제대로 된 전술적 운용조차 힘든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에 오르기 시작한 지 코끼리를 이끌며 9일 만에 정상에 올랐고, 이틀 정도 군사들을 휴식시킨 뒤 반대편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등산은 하산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도 그들은 그때서야 깨달아야만 했다. 산을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산행을 하여 내려오는 데만 15일이 걸려서 겨우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한니발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다.


북이탈리아에 당도하자 그곳의 갈리아 부족들은 알프스 산맥에서 죽도록 싸움을 걸어왔던 갈리아 부족들과 달리 한니발과 그의 부대를 환영해주었다. 이들은 산의 반대편과는 달리, 로마의 정복전쟁에 맞서 싸우고 있는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외부세력이던 한니발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포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니발의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해서 결코 압도적인 군대라고는 볼 수 없었고, 과연 동맹을 맺을 만큼 강한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움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읽은 한니발은 이 지역의 부족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집정관 스키피오

그들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나와 있던 집정관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나섰으나 실패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음을 뒤늦게서야 눈치채고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북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급하게 돌아온 그는 타키누스에서 한니발과 기병전을 벌였다. 이는 로마 정규군과 한니발군의 공식적인 첫 번째 전투였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로마군 기병대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에 처참하게 완패하고 스키피오 본인마저 중상까지 입고 물러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완전히 포위되어 죽을 뻔했으나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겨우 구출받을 정도로 첫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고 한다.

 

한니발과 그의 부대가 무적의 로마군단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자, 갈리아인들은 그간의 의심을 거두고 바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겠다고 나선다. 이후 한니발은 갈리아족들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진용을 꾸리게 된다. 반면, 로마의 스키피오는 전투에서 패전하고 중상까지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한니발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진영에 틀어박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점령과 약탈 활동을 공격적으로 늘리게 된다. 북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고 로마의 세력은 상당 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로마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와 그의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원로원의 훈령을 받아 급히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상황이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 군과 연합하여 한니발을 조속히 격파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셈프로니우스가 집정관 임기 말기여서 빨리 군공(軍功)을 세워 당당히 개선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번 한니발과 그의 부대에 호되게 당했던 스키피오는 그 겨울을 싸움 없이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특히 스키피오는 현지의 갈리아인들이 변덕이 심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한니발과 갈리아족의 동맹이 자연히 와해될 수도 있다는 나름 근거 있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버리게 되면 군공(軍功)이고 뭐고 자신이 업적을 챙길 수 없다고 조바심 내던 셈프로니우스의 입장에서는 스키피오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니발과 그의 부대에 대한 무서움을 계산하지 못했던 셈프로니우스 군대는 트레비아 전투에 나섰다가 소위 발려버리고 만다. 한니발은 두 번째 나섰던 집정관의 부대에게서도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그나마 주저하던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으로 확고하게 지지세를 보였고, 로마군은 북이탈리아에서 완전히 후퇴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그나마 포 강에 있던 로마 식민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는 종전까지 함락되지 않고 존속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셈프로니우스는 트레비아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집정관 자리를 잃었다. 그는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재한 후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러 다시 한번 진용을 꾸리게 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실린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당시 한니발은 병사들이 승리에 취해 기강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해 무기 점검을 불시에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들이 몇몇 발생하자 한니발은 이들을 모아 두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죽은 자가 먹을 필요는 없다.”라고 호되게 야단치며 그들에게 식량을 배급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사흘을 내리 굶어 다급해진 병사들은 동료의 무기를 훔치려 들었는데, 동료 병사들은 자신의 것을 도둑맞지 않도록 잘 때도 아예 창과 검을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계속해서 굶던 병사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병도 끼어 있었는데, 한니발이 그 병사에게 어쩌다 무기를 잃어버렸냐고 묻자 병사는 “평소에는 창을 안고 자는데, 눈보라가 심해서 막사로 들어가서 고향생각을 하다가 그만 창을 잊어버렸다.”라고 대답했고, 한니발은 “앞으로는 고향 생각을 할 때도 창을 안고 있으라.”라고 말하며 무기고로 병사를 데려고 가서 무기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무기고의 벽 한쪽이 부서졌는데, 덕분에 무기를 분실한 병사들이 자기 무기를 발견하고는 찾아가서 급식을 받았다고 한다. 즉, 한니발이 순찰 중에 무기 관리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몰래 빼돌려서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려고 무기를 감춰두었던 연극을 벌였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한니발 장군의 렌더링 복원 이미지

한편, 로마는 한니발의 부대가 로마 본토로 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 기세를 막기 위해 플라미니우스와 게미누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병한다. 이 둘은 당시 원로원에서도 상당한 인재로 불리던 이른바 에이스였다. 그중에서도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인 감찰관까지 맡았었으며, 평민들의 지지까지 받았던 인물이었다.

 

한니발은 이듬해 봄에 드디어 철저한 준비 끝에 로마 본토를 향해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자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맞섰다. 그들은 로마 본토에서 물량을 앞세운 방어전을 계획했다. 따라서 둘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두 가도를 봉쇄한 채 한니발을 기다렸다.

 

자신이 지형상 불리하다는 점을 확인한 한니발은 새로운 주둔지를 찾다가 로마 군단에 발각되지 않으면서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늪지대로 진군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선택한다. 그 늪지대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 킬로미터나 뻗은 험난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타고군은 휴식은커녕 잠도 자지 않은 채 3박 4일에 걸친 강행군을 감행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면 한니발의 행군이 로마군에 들통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의 많은 병사들이 과로사하거나 풍토병에 시달렸고 한니발 본인도 이때 눈병을 얻게 되어 애꾸눈이 되었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할 때도 그래지만,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성공적(?)으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꿀 같은 사흘간의 휴식을 가지며 전투에 대비한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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