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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5. 2022

무엇을 위하여 삼가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잘못하고서도 사과할 줄 모르는 자를 목회자라 하는가?

子之所愼, 齊·戰·疾.
공자께서 조심하신 것은, 재계(齋戒)와 전쟁과 질병이다.

이번 장(章)은 아주 짧다. 공자가 무엇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여겼는지에 대한 대상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나중에 주석을 통해 설명하고 있듯이, 공자는 모든 것에 신중하고 삼갔음에도 굳이 이 세 가지를 대표적인 예로 들어서 말한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齊라는 말은 가지런히 한다는 말이다. 장차 제사 지내려 할 적에 가지런하지 못한 사려(思慮)를 가지런하게 하여 신명(神明)과 교류하는 것이다. 정성이 지극하고 지극하지 못함과, 귀신이 흠향하고 흠향하지 않음이 다 여기에서 판가름 난다. 전쟁은 여러 사람의 죽음과 삶이고,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것이요, 질병은 또 내 몸이 사느냐 죽느냐 보존되느냐 없어지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니, 모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처음 언급하고 있는 ‘재계(齋戒)’란, 제사를 지내기 전 神明(신명)과 交接(교접)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명한다. 공자시대 이후 정리된 <예기(禮記)>의 제사(祭祀)에 관한 내용에는, ' 3일간의 재계 기간 중에는 귀신과 교접하기 위한 기간으로 재계를 정성으로 행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귀신의 享(향)과 不享(불향)이 좌우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무슨 무당이 신을 자신의 몸에 불러들여 신접을 한다는 것인지 오해하기 딱 좋은 설명이긴 한데, 제대로 제사를 지내는 과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제사라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찾아오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처럼 경건하고 모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제사를 정성껏 모신다는 의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제로 있는 것처럼 모시는 것을 가장 정성스러운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그저 형식적으로 음식을 차리고 옷을 예스럽게 차려입는 껍데기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이 첫 번째의 삼간다는 것은 결국 귀신에 대한 것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예(禮)’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언급한 두 개념은 생사의 개념과 매우 유관하다. 사람의 생명과 연관이 있는 일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언급에서 방점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음에 있다.


두 번째 언급한 전쟁의 경우, 전쟁의 군사는 백성이다. 즉, 백성의 목숨과 관련이 되었기에, 가능하면 戰爭(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이었고, 불가피하게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백성을 충분히 가르친 다음에 전쟁에 내보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다.

‘자로(子路) 편’의 30장에서 ‘以不敎民戰, 是謂棄之.(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전쟁에 내보내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의 목적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그 전쟁이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배경과 의미를 모두 알게 하여 그저 전쟁의 병사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명분이 있는 전쟁임을 깨달아 자신이 전쟁에 참여하는 의의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병사로서의 훈련을 시키지도 않고 그저 머릿수로 동원하기만 하는 전쟁은 결국 백성을 사지로 모는 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병사화하는 제대로 된 훈련 없이 사지에 내모는 행위에 대해서 경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질병 역시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당시 전염성 질병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뒤에 공부할 향당(鄕黨)편에 보면,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여 먹지 않은 12가지의 음식에 관한 기록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이 부분이 단순히 건강을 염려하는 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통상 고문에서는 현대어에서처럼 ‘병(病)’이라 쓰지 않고 ‘질(疾)’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서 말했던 전염병(傳染病)을 대표적인 것으로 든다.

 

전염병을 이야기하고 질병을 이야기하니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역병 코로나가 이제 2020년 1월에 본격적으로 창궐하여 만으로 2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자가 삼갔다고 하는 의미를 위에서 풀었던 것처럼 내 건강을 챙기라는 이기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 건강과 위생을 챙기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임에 있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첫 번째 항목으로 제시된 제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 개신교와 역병에 대한 의식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장이다.

코로나 정국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그간 암암리에 비난받던 그 흉측한 민낯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그 이름도 생소한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라는 종교단체였다. 마치 사이비 종교급으로 교주가 있는 그 종교단체는 집단감염의 주원인을 제공하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후 경기도 용인시의 교회에 설교를 다녀온 뒤, 코로나에 확진 판정을 받은 목사와 그의 배우자가 제주도내 온천을 방문한 사실이 밝혀지는 사건도 있었다. 그들은 보건소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뒤에도 자신들이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역학조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여 뉴스를 보는 이들에게 어이상실을 자아냈다. 

특히나 목사의 배우자라는 사람은 제주도내에서 자신의 동선을 숨기거나 거짓 진술하는 방식으로 방역당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쇼까지 벌였다.

온천이라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가는, 그것도 현지의 노령자들은 물론이고 지병이 있는 노령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시설을 사용하고서도 온천에 다녀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방역당국과 당시 온천을 다녀온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나는 전에도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를 학문으로 인식하여, 불가지론자인 탓에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특정 종교를 폄하하거나 공격하자는 의도가 아님을 알 것이다.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사태는 또 어떠했는가?

그것이 그들이 과연 목회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고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경건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단계의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광화문에 나와 호가호위하며 정치색을 드러낸 그 정신 나간 목사는 자신과 자신의 신도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며 헛소리를 하다가 확진 판정을 받고서도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낄낄거리며 핸드폰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연말이던 2주 전 그의 주치의였던 정형외과 원장이 66세의 나이로 코로나에 확진되어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 소식이 나왔다.(물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중요한 뉴스도 아니라 묻혔다.)


오미크론이라는 신종 변이가 한국에 최초 상륙했을 때는 또 어떠했는가?

또 목사부부였다. 그들이 얼마나 학술적으로 대단한 이들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와중에 나이지리아에 학술세미나를 참석하였고, 에티오피아를 거쳐오면서 오미크론을 몸속에 담아왔다. 초기 역학조사에서는 공항에서 자택으로 이동할 때 방역 택시를 탔다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들을 데리러 나왔던 외국인 운전자는 그렇게 자신의 가족과 그 교회 관련자들과 예배를 치르면서 급속도로 오미크론을 퍼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 담당 목회자라는 목사의 아내는 한국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뻔뻔하게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이지리아에서는 마스크를 아무도 하지 않았고 마스크를 하는 자신들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닐 수 없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이지리아는 백신 접종률이 10%도 안 되는 것을 알고서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무지와 후안무치가 오미크론보다 더 무서운 이유였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들의 이 연이은 후안무치에 대해 어떤 사죄나 사과를 공식적으로 보였나? 

아니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길어지는 예배 금지를 통한 거리두기를 참지 못하겠다며 그 어떤 종교계에서도 취하지 않는 스탠스를 보이며 추한 민낯을 드러냈고, 정부에 대한 궐기까지 서슴지 않았다 예배를 왜 하는 것인지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그들과 맞짱을 뜨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나 이 귀한 공간에 그런 쓸데없는 논의를 하기 위해 지면을 할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 부분은 접기로 한다.

코로나 때문에 힘겨운 것은 방역 당국도 내 이웃들도 모두 같다. 아무리 치사율이 낮다고 하지만, 분명히 확진되어 기저 질병이 있거나 노령인 분들의 사망이 일어나는 것은 그 역병에 확진되지 않았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노력하여 그 부분을 막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야 한다. 

미국에서 개념 없는 젊은이들이 치사율이 높지 않고 그저 아플 뿐이라며 마스크를 벗고 파티를 하고, 코로나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 여럿이 모이는 실험을 한다는 둥, 까불다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에서는 멀쩡한 국회의원마저 죽음을 맞이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내 건강을 챙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역병 같은 전염병 상황에서 내 건강과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건강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건강을, 목숨을 위협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삼가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이었다.


한국교회는 과연 그러하였는가?

당신들은 당신들의 자녀에게 잘못하면 사과하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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