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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4. 2022

현대 사회는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구조인가?

진정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富를 만일 구해서 될 수 있다면, 내 말채찍을 잡는 자의 짓이라도 내 또한 그것을 하겠다. 그러나 만일 구하여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이번 장(章)은 부(富)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일단 부(富)라는 것은 사회적 환경을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장 이 장에서 공자는, ‘부(富)를 구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는 구하겠다.’라는 극단적인 예로 가르침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당시는, 청동기 사회에서 철기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경제의 중심은 농경사회를 베이스로 이루어졌다. 그 말은 농사를 지을 토지가 얼마나 넓으냐에 따라 부(富)가 결정되었음을 말한다. 그 수확에 따른 부세가 많은 자일수록 부자인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제도에 의거하여, 신분에 따라 주어지는 봉토와 녹봉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맞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혹은 내가 뭘 어떻게 연구하고 모은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원문의 해석을, ‘부(富)를 구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명분론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다. 아니다. 부자가 되기 싫어한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형이상학적 이상론을 펴는 것은 공자식 원시 유학의 정신이 위배되며 실제로 공자는 그런 식의 의론을 펼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 해석은, ‘부(富)는 내가 노력한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 맞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에 대해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채찍을 잡는 것은 천한 사람의 일이다. 가설하여 말하기를, “富를 만일 구해서 될 수 있다면 내 몸소 천한 일을 해서 구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으나, 이것이 天命에 달려있어 구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義理에 편안할 뿐이니, 어찌 반드시 한갓 욕만 취하겠는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해석일 수 있다. 어차피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욕먹으며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겠다고 천명하는 모양새이다. 앞서 설명했던 당시 사회적인 제도적 특성 때문에라도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의(仁義)를 행하는 척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위정자가 백성들이 가뭄이나 홍수로 굶주릴 때 곡식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복지정책적인 차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 나라의 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늘 그렇지만,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 엉뚱한 상상으로만 머리가 발달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조금 위의 말을 비틀어서 보면,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공자는 의리(義理)가 아닌 부(富)를 취한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궤변을 던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엉뚱하고 바보 같은 자가 튀어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천재 시인 소동파(蘇軾)가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의미를 풀어준다.

 

“성인이 일찍이 富를 구함에 마음을 두신 적이 없는데, 무슨 가능함과 불가능함을 따지겠는가? 그런데도,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구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하셨을 뿐이다.”

 

공자가 한번 틀어서 이야기한 행간(行間)을 읽은 천재 시인의 주석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기 위해 말한 것이지, 어차피 성인은 부(富)를 구함에 뜻을 둔 적이 없다는 말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그것이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아닌지 굳이 논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가정한 것은, 그것을 결코 구해서 될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앞서 설명했던 ‘부(富)를 추구해서는 안될 것인다.’라는 1차원적인 해석을 한 이들의 뒤통수를 공자가 아닌 천재 시인 소동파가 후려친다. 그것을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공자식 어법이 아니라는 설명을 이 주석을 통해 해 준 것이다.

그래서 양 씨(楊時)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군자는 부귀를 싫어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에 달려있어서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또 오해하는 학도(學徒)가 있을까 싶어 재차 강조한다. 부(富)가 하늘에 달려 있어서 노력해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저 주석의 의미는 당시의 사회제도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신분제도였고, 그 제도에 맞춰 토지가 이미 부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앞의 문구에, ‘싫어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공자의 표면적 역설 표현을 그대로 받은 것임을 마음에 새기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깊이 있는 울림을 갖는 것은 2022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에는 아주 적확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강남까지는 가지도 말자,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사회초년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결혼 전에 자신의 힘으로 서울의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파트를 구매할 때도 사람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전은 고사하고 두 사람이 10년을 넘게 벌어도 그것은 산술적으로 어렵다고들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댄다.


그렇다면 신분제는 아니지만, 결국 아등바등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은 수천 년 전 공자의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닌가?


부모가 금수저이거나 비리를 저지르고서도 뻔뻔하게 장관직에 올라 성적도 안 되는 자식을 로스쿨이나 의전원, 혹은 치전원에 밀어 넣어줄 수 있어야 부자가 되고 그 부와 명예를 계승해나가고 하는 것을 보면, 새로운 신분제가 공고하게 된 이 대한민국은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자아, 사회는 똑같다는 전제를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 장의 방점이 찍힌 결론은 똑같은 지향점을 가질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부(富)를 노력해서 가질 수 없는 현실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사회적이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면, 노력해서 부(富)의 사회적 신분 격차를 줄일 수 없는 사회일수록 사회적 도덕성이 낙후되어 있는 사회인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최근 코로나때문에도 그러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선진국이라고 하는 것들이 더 심한 빈부의 격차를 신분의 격차로 만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가?


우리 주변을 보자. 차를 대기도 어려운 오래된 빌라 골목에 외제차부터 한 집에 차 한 대씩은 모두 세워져 매일같이 지옥 같은 주차 전쟁을 펼친다. 왜? 집은 월부로 살 수 없지만, 차는 월부로 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깜냥에서 살 수 있는 범위까지는 그들은 빚을 내서라도 중산층이고 싶어 하고, 그 이상으로 보이고 싶어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맛집이나 비싼 호텔을 들락거린다며 지나다니며 찍은 사진을 자신의 생활인 양 올린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그 보여지는 허상이 자신을 보는 이들의 평가를 구축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그러한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어떤 명품백을 들고 있는지, 어떤 차를 주차장에 대는지, 방송에 얼굴이라도 비춘 전문직인지 등등이 그가 상대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어떻게 하겠다고 결론지었던가?

여기서 공자가 직접 인의(仁義)나 의리(義理)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승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되새김한다는 것은 공부를 다시 되새긴다는 의미이고, 공부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나를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공부를 배우기 전의 내 모습과, 스승에게 제대로 배우고 깨달았다고 생각되는 나의 모습이, 그리고 지금 다시 스승이 일깨워주는 가르침을 곱씹게 하는 공자만이 펼칠 수 있는 최상위 임상심리학적 언어구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글 속에서는 이래야만 한다고 강요하거나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주입하는 방식의 말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 무겁고 더 날카로우며 더 깊이 있게 양심의 가장 민감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옴이 느껴진다.


올바른 것에 대한 순수한 배움과 그것에 대한 실천의 추구.


결국, 똑같이 한평생 사는 것이라면 물질적이고, 허황된 것을 추구하지 말고 나의 삶을 살찌울 수 있는 실질적인 것에 노력을 기울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어차피 부자의 영역에 오르지도 못할 가난한 이들에게 정신승리를 포장하라는 말이 아님은 이미 듣는 순간, 깨닫게 만든다.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보자. 과연 내가 좋아하는 바를,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에 대한 노력을 기울임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


늘 누군가에게 판단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속에 파묻혀 산 이들이라면 당연히 가장 먼저 물을 문제이다. 그런데 답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다. 삶은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망각하고 경거망동하거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허상을 쫓으며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삽질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대부분 정신 못 차리고 허상을 쫓는 이들의 대답은, 돈이 더 많았으면 좋겠고, 더 좋은 강남의 큰 마천루 아파트에 살았으면 좋겠고, 더 좋은 외제차를 타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그 대답을 조금 학문의 방향으로 돌려보자. 

상아탑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자네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고양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흥분하며 저마다 떠들어댄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고,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으면 좋겠고, 여러 나라 말도 자유롭게 해서 그 나라의 학자들과 함께 학술을 논의할 수 있고, 라틴어를 할 줄 알아서 철학 고전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아, 객관적인 제삼자 입장에서 강의실의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살짝 감이 오는가?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며 객관화되었다면 그나마 당신은 양심이 조금 살아 숨 쉬는 사람이겠구나. 맞다. 그러고 싶다면 노력을 해야 한다. 당신이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늘 들었던, 그리고 이 장에서 숨겨진 공자의 고도 이중 화법의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의 의미를 이제야 당신은 깨닫고 체득하게 된 것이다. 


공자는 이 아무렇지도 않은 용법을 고도로 단련된 자신만의 화법 속에 녹여 넣은 것이다. 풀어 설명해주자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왜 하지 않는가!’라는 죽비를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한 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나,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파악한 자라면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에 다름 아니다.


노력하지 않는데,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언어와 무예를 다운로드해서 클릭 한 번에 내 것처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리고 싶다면 갖춰야 한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데 왜 고민하는가? 당장 노력하면 된다. 그것을 거저 얻고 싶어 하기 때문에 언제나 탈이 나는 것이다.

 

주식을 하게 되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버는 것이 우스워지는 경향이 있다.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얻는 것을 꿈꾸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일해서 몇 백만 원의 월급을 받던 이가, 운용금액을 굴려, 하루에 몇 천 몇 억을 수익금으로 챙기게 되면, 세상이 우스워진다. 바로 일시불 현찰가로 비싼 외제차를 타고, 술집에 가서 5만 원권을 아가씨들에게 뿌리며 왕대접을 받고 놀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매일같이 누리고 지내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하나는 그가 유용할 수 있는 투자자금이 그만큼 있느냐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그가 매번 그렇게 엄청난 수익만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공부하고 노력해서 어느 정도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 치자. 

그다음은 더 중요한 문제와 결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얻은 수익을 어떻게 유지하고 더 불려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평정심을 유지하고 다스려나가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심성수양에 대한 문제로 돌아온다. 심성수양은 천성이 아니다. 오랜 시간 배움을 통해 그 배움이 실천으로 수양되는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결정물같은 것이다. 그가 언제 그런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래서 그와 같은 모델은 항상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장의 공자의 가르침으로 돌아온다. 결국,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더라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호학(好學)의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수양하여 실천하는 것에 목숨 거는 이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사상누각(沙上樓閣) 일뿐이라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중요하지 그지없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신이 지금 정작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배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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