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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3. 2022

당신의 새해 첫 다짐은 무엇인가요?

써주기만 한다면 간, 쓸개 다 내놓겠다고 헥헥거리는 자들에게.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孔子께서 顏淵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써주면 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子路가 말하였다. “夫子께서는 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범을 맨손으로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江河를 건너가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를 데리고 할 것이다.”

이번 장(章)에서는, 스승인 공자가 안연(顏淵)에게 말하는 내용과 자로(子路)가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승과 문답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공자가 안연(顏淵)에게 이야기하며 언급한 것은 실제로 안연(顏淵)에게 말한 것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포함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 제자 안연(顏淵)과 일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자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출생하여 계씨가(季氏家)의 재물 출납을 담당하면서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자기 원칙에 위배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그만두었고, 중도(中都)의 재(宰)가 되고,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또, 자신의 원칙 때문에 그 자리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천하를 떠돌면서 자신을 유세하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할 기회를 구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나라의 위정자도 선뜻 공자를 삼고초려(三顧草廬)하며 모셔가지 않는다. 공자를 따르던 뭇 제자 들은 이렇게 갑갑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여러 형태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승에게 불만과 의문을 품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의연함을 지키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연(顏淵)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쓰일만한 상황에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렇지 못한 상황에 은둔하는 모습을 보인 안연(顏淵)을 칭찬하며 가르침을 준다.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 윤씨(尹焞)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나를 써주거나 버리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으며, 행하고 은둔하는 것은 만나는 환경에 따라 편안히 여기니, 운명은 말할 것이 못 된다. 顏子는 聖人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역시 이에 능할 수 있었다.”

 

공자는, 내가 등용되고 되지 않고는 내 의지와 상관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 내가 능력을 펴는 것과 그렇지 않고 은둔하는 것 역시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은, 앞서 공부했던 도가 통용이 되는 환경이라면 나서고, 그렇지 못한 시대에는 은둔하고 나서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聖人인 공자만이 그것을 몸소 실현할 수 있었는데, 제자 안연(顏淵)이 그러했다는 칭찬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앞에서 수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안연(顏淵)은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의 추천을 받아 벼슬자리를 얻어보겠다며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스승의 높은 평가를 받은 수제자에 다름 아닌 인물이었다.

 

자아, 이렇게 스승이 자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이해한 것으로 안연(顏淵)을 칭찬한다고 여긴,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가 가만있을 리 없다. 자로(子路) 용맹한 것으로는 자신을 능가하는 제자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승에게 군사를 통솔하게 된다면 누구와 함께 지휘할 것이냐는 가정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자신을 지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자신도 칭찬을 해달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상황이다.


공자가 그렇게 호락호락 제자가 원하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해주는 양반이던가? 아니다. 공자는 자로(子路)의 의도는 물론, 그 질문을 통해 자로(子路)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진정한 용맹과 군대를 통솔하는데 필요한 요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며 자로(子路)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르침을 일러준다.

범을 맨손으로 잡으려 한다거나 한겨울에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는 등의 행동은 진정으로 용맹한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오히려 어떠한 일에 임하더라도 늘 두려워하고, 늘 도모함에 있어 충분히 계획하여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진정한 용맹임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이것을 말씀한 것은 모두 그의 勇猛을 억제하여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움직이는 것의 요점은 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子路는 아마도 이것을 알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사씨(謝良佐)는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聖人은 나서고 은둔함의 사이에 뜻함도 없고 期必함도 없어, 道를 행하는 것이 자리를 탐내서가 아니요, 은둔하는 것도 자기 혼자만이 善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등용해주지 않는데도 행해지기를 구하고, 버리는 데도 은둔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顏子만이 이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子路는 비록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아니니, 고집함과 期必함이 없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三軍을 출동함을 가지고 질문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議論이 더욱 비루하다. 夫子의 말씀은 그의 잘못을 인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무릇 도모하지 않으면 이룸이 없고, 조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하는 것은,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三軍을 출동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주석에서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 오독(誤讀) 하기 쉬운 용어가 있는데, 바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라는 표현이다. 앞에서 ‘仁’에 대해 공부하면서 몇 번 강조했던, 인위적으로 그것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부분에서 지칭했던, 안 좋은 의미로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이다. 


물론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그것조차도 없으니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긴 하지만, 인위적 의도에 의한 행위는, 이미 체화(體化)되어 자연스러운 단계보다는 하위 단계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안연(顏淵)은 조금의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성인인 스승의 경지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그러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고, 자로(子路)는, ‘노력해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단계’라는 설명이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기에는 위정자가 모시고 쓰려고 하면 냉큼 달려가서 그를 위해 일하며 벼슬자리를 노리고 더 위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모든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임과 동시에, 자신의 출처(出處)를 자신이 하고 싶어 한다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섭리에 맞춰 의지가 동화되는 단계가 성인(聖人)의 단계임을 말한다.


여기서 조금 높은 단계의 해석으로 행간을 풀어보자면, 단순히 위정자에게 쓰이게 되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능력을 발휘하고 은둔하는 것도 도가 행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함께 연동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불러준다고 쪼르르 달려가 ‘간택되었구나!’라며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이고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때와 상황인지도 함께 살피는 것이 지향해야 할 경지임을 설명한 것이다.

 

뒤이어 자로(子路)가 자신의 특장점인 용맹을 강조하며, 삼군(三軍)을 통솔함에 있어 용맹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유도신문을 하였으나, 그의 눈높이에 맞춰 ‘도모하지 않으면 이룸이 없다’라고 한 가르침을 눈여겨보면, ‘도모하다’라는 의미가 그저 ‘그 일을 계획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려야 한다. 미리 계획하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도록 다각도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면밀한 준비를 통해서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에 다름 아니다. 


다른 이들이 무서워하는 호랑이를 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맨손으로 때려잡겠다고 한다거나 한겨울 얼음을 깨고 강에 들어가 수영하여 강을 건너겠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준비도 없는 무모함일 뿐 결코 용맹이라 부를 수 없다며, 극단적인 예를 들어 자로(子路)를 권계한 것이다. 


호랑이를 잡고 강을 건너는 일은 三軍을 출동시키는 일보다는 작은 일인데, 그 작은 일에조차 진정한 용맹과 무모함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사를 일으킴에 있어 자기 혼자만 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군사를 떼죽음 시킬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일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라 일깨워준 것이다.

바둑에, ‘돌을 던진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이 그 바둑 시합에서 졌다는 것을 상대에게 인정하는 일종의 항복 행위이다. 게임은 승부가 결정지어지게 마련이다. 누군가 이기고 누군가 진다. 그런데, 상대를 몰살시키기 전에, 내가 스스로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여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어느 타이밍이 돌을 던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기사들과 바둑을 두게 되면, 그들은 확실한 패배를 확인하는 단계가 넘어갔음에도 돌을 던지지 않고 끝까지 바둑을 두었다. 차라리 그것을 페어플레이라고 여겨 그리하면 모르겠는데, 마치 상대의 터무니없는 실수를 기대하며 바둑을 두는 것과 같아 불쾌함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들은 상대가 실수를 할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 허망하게 돌을 던진다. 그것을 한국 바둑계에서는 굉장히 매너가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사실 그것은 한국 바둑계만 인식이 아니라, 신선들의 놀이였다는 바둑에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라고 중국의 수많은 고전에서도 언급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차마 자신이 어디 단계에서 확실하게 졌는지 가늠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경우, 다시 말해, 돌을 던지는 타이밍(졌다고 승복해야 할 그 타이밍)을 놓쳤을 경우엔, 예의를 갖춰 끝까지 둔다. 그것이 이른바 돌 던질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끝까지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까지 수차례 청문회를 통해 ‘낙마’하는 이들을 보아왔다. 정말 어이없는 경우로는, 자신의 부인이 외국에 나갔다가 외교관도 아니면서 외교관 신분을 이용하여 고가의 도자기들을 자신의 카페에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해 무관세로 들여온 경우가 있었음에도 청문회까지 얼굴을 내민 뻔뻔한 사람부터, 자녀의 좋은 학군을 배정받기 위한 위장전입은 기본이고, 학위를 받기 위해 썼던 논문 표절은 기본이고, 자신이 부정하게 치부한 것을 인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산신고를 축소하여 감추었거나 주택이나 건물을 다운 계약하거나 했던 것 등등 수많은 흠결들이 너무도 다양하게 총망라되는 것을 목도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런 흠결이 드러났음에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 한번 앉아보겠다고 청문회까지 나와 영혼까지 탈탈 털려가며 버티기로 일관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어도, 그 정도 흠결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공개되었으니 부끄러워서라도 청문회 자체에 임하지 않겠다고 하는 공직 후보자를 만나본 일이 없다.


이유는 하나이다. 그들이 그 자리에 반드시 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이 장의 가르침 따위는 개나 줘버릴 공자왈 맹자왈에 나오는 구닥다리 이야기일 뿐, 그들의 삶에 비춰 그들이 바르게 걸어 나가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이나 거울이 결코 아님을 반증한다.

그렇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50여 년이 넘게 살아온 삶이 모두 까발려져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낙마’ 하지 않고 버텨서 그 자리에 안착하게 되면, 그냥 다 넘어갈 수 있다는 식의 논리이다. 


그들의 부모라면, 그들의 자녀라면, 그와 똑같이 생각할까? 내 아들이, 내 딸이, 그리고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가 장관이 되었다면서 청문회 과정에서 언급된 그 수치스러운 치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덮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


한국은 이제 그런 사회가 되어버린 듯싶다. 도덕불감증. 결국 사람들은 그저 잊혀갈 것이고, 그나마 교수나 국회의원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한 나라의 장관을 했다며 사석에서 죽을 때까지 ‘장관님’이라는 호칭을 즐기며 살고 싶어 하는 것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기도 전에, 자신의 능력이, 깜냥이 되는지 안되는지 따지기도 전에 무조건 손에 움켜쥐려고 달려드는 이들뿐이다.

그러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고, 상식이 통용될 리가 없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서가 일반화되어 가고 양심이 돌처럼 굳어가는 상황에서 바늘로 백날 찔러봐야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한단 말이다.

다 좋다. 부와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생리이지 않냐고 동물 본성론을 끌고 나온다면 그것도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피해는 누가 보는지 생각해보았나?

그렇게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과연 비선출직으로 구성된 공직사회를 그 밑의 부하들을 통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썩은 검찰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뿐이다. 정작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를 도려내지 못하는 검찰은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들과 결탁된 한 패거리라면 그들에게 정의를 아무리 외쳐봐야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이 온갖 비리를 다 저질렀다고 공표가 되고서도 다른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소리쳐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술 먹고 주사를 부려 경찰서 바닥에서 난동을 치면서, 당신의 자녀에게, '술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며 절대 주사는 부리고 난동을 부리는 개가 되지 말라'라고 가르칠 수 있는가? 당신의 자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그 헛소리에 공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가?


능력도 안되면서 나대겠다는 사람은 이미 서울부터 부산까지 줄을 세워도 넘쳐날 정도로 길바닥에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전 중국에서 공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말하면서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강조한 것이다. 능력이 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거처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춰 해야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상황이 아님에도 자처하며 나서는 것은 스스로를 다치게 함을 넘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회를 망치는 것이라고.


지금 당신의 직을 내려놓으란 말이 아니다, 물론 당신이 그럴 마음도 없겠지만.


당신이 청문회를 통해 그 자리에 오른 장관도 아니고 고위층이 아니라고 그들을 욕할 때만 신나게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자리에서 가장으로, 남편으로, 혹은 아내로, 아빠로서 엄마로서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하고 있는지 새해 첫 출근을 하며 생각해보란 말이다. 

만약 이제껏 그렇지 않았다면, 반성하고 새해 다짐으로 다이어트나 1억 만들기 따위를 목표로 삼기 전에 사람부터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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