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31. 2021

작은 일에서도 남을 헤아리고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은 배우기 어렵지 않다, 행하기 어려울 뿐이다.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 哭則不歌.
공자께서 상 당한 사람의 곁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배부르게 먹은 적이 없으셨다. 공자께서는 이 날에 조곡(弔哭)을 하시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이 장은 성현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작은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앞서 배운 대로 모퉁이의 한쪽만을 들어주는 작은 사례이니 잘 살펴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들어 보일 수 있기 위해 그 행간의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이 장에서의 일화는 공자가 상갓집에 갔을 때 했던 태도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에 공부할 때도 언급했지만, 스승을 곁에서 보시는 제자들은 글이나 말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스승의 마음가짐을 볼 수 있는 언행을 통해 보고 익히는 것이 더욱 많은 법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보이는 스승 공자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그것 자체가 가르침이다. 크게 두 가지 행동으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 행동은 상갓집에 갔을 때 배불리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有喪者(유상자)는 부모나 친족이 殞命(운명)해서 服喪(복상)의 禮를 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전의 喪主(상주)는 슬픔 때문에 먹을 것을 삼킬 수 없으므로 대개 죽을 먹었다. 말이 죽이지, 그 슬픔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주자는 주석에서 그러한 배불리 먹는다는 의미를 결코 음식을 달게 먹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음식의 맛을 향유하며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갓집에서는 슬픔이 깊어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공자는 남의 喪家(상가)에 가서 일을 도울 때, 먹지 않으면 허기져서 도울 수가 없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슬픔을 잊게 되므로 적절한 양만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곁에서 슬픔에 빠져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이를 보는 것은 고인과의 친밀도가 얼마나 깊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직접 그곳에 도움을 주러 갔던 예를 취하러 갔던 그 기본은 슬픔의 정서를 공감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 곁에서 음식의 맛을 즐기고 푸짐하게 먹는 것 자체가 예의범절을 떠나 사람으로서 공감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깨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두 번째의 행동은 상갓집에 다녀온 날에는 즐겁게 노래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是日(시일)의 ‘이날’은 喪家에서 弔問(조문)한 날을 말한다. 哭(곡)은 弔問할 때 소리 내어 울어 哀悼(애도)하는 일을 말하고, 歌(가)는 즐겁게 노래 부르는 일을 말한다.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으로, ‘하루 안에는 남은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 저절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하였다. 조문한 날 노래 부르지 않는 것은 마음속으로 슬퍼하면서 감정을 속이고 즐겁게 노래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예의범절을 따지며 금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비슷한 말인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 유학을 유교로 바꾼 조선시대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신성시하며 이해할 수 없는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주객이 전도된 가르침을 양반의 것이라며 숭앙하라 하였다. 그 영향으로 허례허식이나 잘못된 예의범절로 인해 공자왈 맹자왈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이들의 웃음거리로 전락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러나 본래 공자의 가르침은 이 장처럼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근본을 가르치고 그것만을 강조한다. 예의가 그렇기 때문에 상갓집에서 밥을 먹을 때 맛을 음미하고 즐기며 배불리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상갓집에 가서 슬프게 곡을 한 것이 겉치레가 아니라 슬픔을 나누고 그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에 돌아왔는데 기쁘게 노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지, 그날만 노래를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 씨(謝良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배우는 자들은 이 두 가지에서 聖人의 올바른 性情을 볼 수 있을 것이니, 聖人의 性情을 제대로 안 뒤에 道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어려울 것이라고 착각하고 이해조차 못할 것이라고 거리부터 두고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이 장의 가르침은 말한다. ‘성인의 위대한 사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맞다. 인간적으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의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배려의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 그것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루어 공감하는 것임을 공자는 이 작은 일화를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도 남을 헤아려야 한다. 아울러 뒤에 나온 것처럼 그렇게 진정으로 공감하였다면 자신의 감정이 슬픔인데 그것을 속이며 즐거워할 수 없을 것이라 역설하며 보여준다. 즉, 자기의 감정을,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과연 어려운가?


슬픔을 당한 이에게 위로를 하러 그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가서 거기 음식이 맛있다고 혹은 배가 고파 일을 할 수 없으면 안 된다고 배불리 먹으며 음식 맛을 논하는가? 그것이 상대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쯤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바, 아니건가? 제사를 지낼 때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오랜만에 친척을 만나 기쁘고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지내는 것은 그들이 제사가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떤 집안의 어른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에 지극히 솔직할 뿐이다. 너무 뛰어놀고 방정맞다고 가장 큰 아이가 어른들에게 혼나서 눈물을 흘리면 금세 우는 모습을 목도하고는 같이 슬퍼져 눈물을 보이며 같이 슬퍼진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유도 없이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제사가 누구를 모시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행하는 것인지, 왜 온 가족들이 모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엄숙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여도 그들 역시 숙연해진단 말이다.


상갓집을 비즈니스로, 혹은 상대가 우리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해줬었기에 적당히 얼굴도장을 찍고 돌아 나와 다시 술자리가 있는 모임에 참석하거나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신이라면, 가까운 집안의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웃고 노래하고 즐거운 자리를 온전히 즐길 마음이 나는가? 하다못해 기분이 좋다가도 안 좋은 소식을 듣거나 접하게 되면 흥이 깨졌다고 판을 접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상갓집에 가서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고인을 잃고 슬퍼하는 지인을 위로하고 그의 슬픔을 가득 가슴에 담아왔는데, 즐거운 노래가 나올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이것은 굳이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본성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그것을 유지만 해도 될 것을, 그것을 거스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공자는 그저 자신의 행동만으로 보여준다. 본래 성인이란 그런 것이다. 무엇을 애써 강조하고 무엇을 부러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그의 언행만으로도 깨우침을 주고 주변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왜 부끄러운가?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그래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성인의 행동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미 배웠다. 하지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이미 배우기 전부터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사욕(私慾) 때문이다. 내가 얻는 이익 때문에 그렇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얻을 혜택을 쟁취하기 위해 그런 일이 발생한다. 상갓집에 가서 배불리 먹고 맛있게 먹는 게 무슨 사욕까지 갈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무엇을 하러 갔는가가 핵심이다. 사람의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는 산해진미가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편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와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하면 거친 음식도 달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러한 위의 주석에서 살펴본 인간의 ‘성정(性情)’이다. 위 주석에는 올바른 성인의 성정이라고 표현하였지만, 결국 성인의 성정은 특별할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래야만 할 도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쓰러진 할머니를 그대로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드리려는 것을 머리로 계산하고 계획하며 돕지 않고, 트럭이 달려오는 앞에 꼬마 아이를 보호하려고 뛰어드는 것이 <논어>를 매일 아침 공부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려는 당신의 본성을 가로막는 사욕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 길이 바쁘고 힘들게 다른 사람을 도와줘서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데?’ ‘내가 목숨 걸고 다른 사람을 구해주다가 내가 다치거나 죽는 일을 뭘 위해서 하는데?’라는 것들이 결국은 번지고 번져 당신 스스로를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럴만한 능력도 없는데 뭘.

정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혹은 당신의 자식이 그런 불이익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마라. 살려달라고 외치지 말 것이며, 도와달라고 울부짖지 말 것이며, 억울하다고 몸부림치지 말 것이며, 나라꼴이 개판이라며 촛불 따위 들고 광화문에 나가 사진 찍어 페이스북이니 인스타니 하는 곳에 올리고 만족해하지 말란 말이다.

작은 일에서도 남을 헤아리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인의 길을 뒤따를 수 있다는 오늘의 가르침을 쉽게 흘려듣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진정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거저 주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