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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30. 2021

진정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거저 주지 않는다.

공자의 계발 교육방식의 진수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않으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아야 한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대한 것은 일생의 화두처럼 늘 따라다닌다. 평생을 가르쳐왔던 공자의 가르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장에서는 앞서 열어주는 내용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드디어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설명하며 시작한다.

 

“윗 장에서는 이미 聖人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게을리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함께 이것을 기록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힘을 씀에 부지런히 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가르쳐주는 방법론의 상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주자는 이 세 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憤은 마음속으로 통달하려고 하되, 되지 않아 애태우는 뜻이요, 悱는 입으로 말하고 싶어 하되 능하지 못하여 애태우는 모양이다. 啓는 그 뜻을 열어줌을 말하고, 發은 그 말문을 열어줌을 말한다. 물건에 네 귀퉁이가 있는 것은 그중 하나만 들면 나머지 세 귀퉁이도 알 수 있다. 反은 되돌려 서로 증거 한다는 뜻이요, 復은 다시 말해주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憤은, 마음속으로 통달하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여 스스로 답답해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어떤 개념이 와닿지 않아 계속 끙끙거리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인 悱는, 입으로 말하고 싶기는 한데, 능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머릿속으로 알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단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강 알고 있는 듯 하지만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거나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증명할 수 없는 단계를 의미한다.

 

세 번째 단계는, 물건의 네 귀퉁이를 비유하는 단계인데, 이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똑똑하여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알아서 열 가지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물에 네 귀퉁이가 있음을 모를 때 한쪽 귀퉁이를 일러주면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 나머지 세 귀퉁이가 있음을 눈으로 보고, 유추하고 손으로 만져봄으로써 명확하게 네 귀퉁이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즉,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닌, 앞에서 알려주는 내용을 통해 유추하여 깨닫게 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연쇄 계발식 공부를 의미한다.

 

핵심은 이 세 가지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사’에 있다. 이 상황에 아닐 경우 가르쳐줘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는 것은, 반대로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 이들이 많고 그런 상황이 일반적임을 반증한다.

그래서 정자(伊川)는 배우는 자들이 이 장의 가르침을 명확히 깨닫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해설을 덧붙인다.

 

“憤悱는 誠意가 안색(顔色)과 말에 나타나는 것이니, 성의가 지극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에게 알려주고, 알려준 뒤에는 또 반드시 스스로 깨달음을 기다려서 다시 알려주는 것이다. 憤悱함을 기다리지 않고 말해주면 아는 것이 확고할 수 없으며, 憤悱하기를 기다린 뒤에 알려주면 확연히 깨달을 것이다.”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그것이 교육의 극대화를 위함이라고 해설하였다. 설명을 하면서도 방법적인 부분과 그 효과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하는 방법의 핵심은, 그가 절실하기를 기다렸을 때 알려주되, 그 알려준 것을 확실하게 스스로 깨닫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다음 것을 다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효과는 그 과정을 통해 답답함이 정점일 때 알려주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자신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어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은 물론 그렇게 귀하게 알게 된 것이 확고해진다는 점이다.

그저 교과서의 진도를 나가듯이 스승이 어렵게 터득한 것을 순서에 따라 가르쳐주게 되면, 가장 큰 문제점은 배우는 자가 어떤 것을 자신이 아는 것이고 어떤 것을 자신을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진도만 나가게 된다. 


그런데,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적인 것만 던져주고 그것을 혼자서 공부하다가 막힐 때 계속 혼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여 해결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했을 때 스승의 도움은 간절해진다. 그 막힌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스승의 역할이 인강처럼 그냥 틀어놓고서 혼자서 봐도 아는 것을 진도에 맞춰 떠들어 정리해주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흔히 그 옛날 고문을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서당에서 그저 쭈욱 같이 읽고 훈장님이 그것을 해석하고 일러주는 모양새를 생각하기 쉽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입식 교육이고, 실제로 공자는 그런 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이 장이다.

공자는 제자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씨름을 하거나 질문을 하더라도 선뜻 답해 주지 않았다. 공자는 학생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배움의 세계에서 내적 성장을 한다고 믿었다. 공자의 학습법은 답을 알려주는 ‘주입식(注入式)’ 교육이 아닌, 생각의 길을 뚫어주는 ‘계발술(啓發術)’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것인데, 말이 쉽지, 부모도 그것을 하기가 어려운데, 가르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스승 공자가 학생들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공을 들이면서까지 일괄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공자보다 좀 늦게 태어난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문답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거나 질문의 대답을 찾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대화법을 ‘산파술(maieutike)’이라고 한다. 무지이든 앎이든 깨달음을 얻는 측면이 아이를 낳는 과정과 닮아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크라테스가 <논어>를 읽고서 공부했을 리가 없지만,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스승의 교육법은 묘하게 정점에서 맞닿아 있다.

 

공자의 계발술은 학생이 알던 모르던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막혔을 때. 그 길을 터주고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껍데기만 대강 알고 있는 상태를 깨뜨려 주므로 막힌 생각의 길을 뚫어준다. 이런 점에서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같은 교수법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학생들이 몰라 쩔쩔매는 상황을 즐긴 변태 스승이 아니었다. 

자신이 공부를 했던 입장이었을 당시의 경험과 깨달음부터 수년간 제자들을 가르쳐오면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에서 나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저 가르쳐주는 남의 말을 듣고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지성으로 생각을 해내서 내 것을 일구어내는 ‘고독하지만 고요하고, 고통스럽지만 갇혀있던 답답한 세계를 부수고 벗어나는 시간’으로 안내한 것이다.

 

아주 작은 가르침이어도 그것을 곱씹어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소화의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수학 강의를 인강을 틀어놓고 풀이과정을 쭈욱 문제없이 써 내려가는 교사의 수학 지식이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눈으로 따라가고 수학 공부를 끝내는 수재는 없다. 


내가 내 손으로 풀어보고 어디에서 막히는지 무슨 실수 때문에 값이 다르게 나오는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실수를 발견하고 막혀 있던 부분에서 어떤 새로움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보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때, 스승이 곁에서 답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막히고 똑같은 실수를 했는지 그에게 맞춰 이야기해주는 것은 요즘 말로 1대 1 맞춤 교육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교육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이 방법으로 깨달은 자신의 실수나 새로운 해법은 결코 쉽게 잊지도 않을뿐더러 그 방법을 통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이미 똑같은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봤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을 길다고 귀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더 힘든 것은 제자가 그런 방식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그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그에 맞는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것이다.

 

수리적 논리가 명쾌한 수학 공부에도 그러할진대, 사람을 공부하는 철학은 어떨 것이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글쓰기는 또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랫동안 생각해서 해답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내고자 하고 혼자만의 절차탁마하는 고독한 수련의 시간을 갖고서 막혔을 때 그것을 일깨워주는 스승에게 배울 수 있었던 공자의 제자들은 정말로 행운아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자와 제자의 대화는 교실 안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그저 아무렇지 않은 일상에서도 고도의 긴장을 요구했다. 가볍게 건넨 말 한마디조차도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좌판을 깔고 칠판을 앞에 두어야만 배움의 장이 아님을 일깨워준 것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이 열어준 세계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교실이 아니라 내 것을 일구기 위해 철저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세계였다. 


이렇게 선생과 학생이 생산적인 긴장을 유지한 덕분에 공자에게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그 시대에도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자의 문하가 되면 누구라도 내 것을 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걸 언제 기다리고 앉아 있느냐고 그냥 쭉 한꺼번에 이야기해주면 알아서 내가 다 하겠다고 성급하게 소매부터 걷어올리는 철딱서니 없는 학도(學徒)들을 많이 본다. 인강을 쭉 틀고 그저 듣고 보는 것으로 지식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저 더 많은 것들을 ‘주입식(注入式)’으로 배우고 가르쳐왔다는 반성이 당신에게 든다면, 이제부터라도 당신 혼자서 온전히 스스로 생각하는 고독의 시간과 수련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권해본다.

 

막혔을 때 당신이 찾아갈 스승은 당신이 스스로 찾아내야 할 또 다른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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