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29. 2021

예(禮)는 나의 최선을 내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禮)는 결코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脯(포) 한 束 이상을 가지고 와 집지(執贄)의 禮를 행한 자에게는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업료를 얼마나 냈어야만 하는가?’ 멀쩡히 <논어>의 공부를 하는 자가 갖기에는 엉뚱한 질문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장(章)은 그 엉뚱한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준다. 내용 인즉은 공자가 제자를 받아들임에, 가장 기본적인 예(성의)를 표하기만 하면 문하에 들여서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춘추시대 당시(B.C. 500년 경)의 사학(私學)의 수강료 수준과 수강료 납부의 방식을 볼 수 있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 장을 시작으로, ‘누가 공자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7개의 장(章)에서 공자가 자신의 제자를 가르쳤던 방식과 배우는 학생이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들이 소개될 것이다. 이 내용은 <예기(禮記)>에서 다루어지는 <대학(大學)>의 내용으로 이어져 확장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공부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이 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옛날에 서로 만나볼 적에는 반드시 폐백(幣帛)을 바쳐 예의로 삼았는데, 한 束의 脯는 지극히 적은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적에 똑같이 이 성리(性理)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사람에 대하여 善에 들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찾아와서 배울 줄을 모르면 가서 가르쳐주는 예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예를 갖추고 찾아오면 가르쳐 주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제자를 양성하는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데 있어 아무런 예를 갖추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국립(國立) 교육기관도 아니고 무료 교육기관도 아닌, 사학(私學)이었으니 당연히 수업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최소한의 예의(성의)를 갖추고 자신에게 배우겠다고 찾은 이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방점은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설사 가지고 온 수업료가 적다 하더라도 그를 내치지 않았다는 점과, 또 한 가지. 직접 배우겠다고 스승을 찾지 않은 이에게 찾아가서 가르쳐주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브런치는 글을 쓰고 그 글을 읽고 생각을 교류하는 곳이다. 그 글을 읽는데 돈을 내지 않는다. 책을 읽고 그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책을 산다. 그런데 브런치는 글을 쓰고 브런치 북이라는 이름이든 매거진이라는 이름이든 그것을 읽을 때 대가(돈)를 지불하지 않는다.


자신이 공들여 쓴 글에 대해 대가를 받을 수 없다면 공짜로 글을 쓰지 않겠다며 조금이라도 대가를 쳐주는 다른 매체들로 옮겨간다며 브런치를 성토하는 이들의 글을 적지 않게 보았다.


그들의 글이 재미를 추구하는 글인지 가르침을 주는 글인지 정보가 담겨 있는 글인지 일일이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공들여 쓴 글에 대해 대가를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은 주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브런치에서 글쟁이를 본 적이 없다. 글쟁이란,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 프로를 말한다. ‘먹고사는’이 아니라 ‘먹고살 수 있는’이 갖는 의미의 차이는 매우 크다. 자신이 쓴 글로 먹고살만한 경제활동을 해봤거나 자신의 글이 얼마만큼의 값어치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래가 되는 이들을 일컬어 ‘글쟁이’라고 한다.


책으로 치면 원고료를 받기 시작하는 초짜부터 인세를 받는 프로작가에 이르기까지 일단 책을 출간함으로써 그것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즉, 그것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 ‘전업작가’라 한다. 한국에서 글만 써서 전업 작가로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대개 교수나 강연자 등의 자신의 본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글을 저술활동으로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글만으로 먹고사는 글쟁이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는 말이다.

 

왜 갑자기 글쟁이에 대한 이야기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공자가 제자를 받아들임에 기본적인 대가를 예의로 반드시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처럼 풍부한 수업료로 낼 돈이 없는데 배우고 싶어 하는 자를 수업료를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고 해서 거절하고 내쳤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글은 어떤 형태로든 읽은 이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것이 정보가 되었든 교훈이 되었든, 하다못해 그냥 재미가 되었든 공감을 통한 평온함이 되었든 그 무언가를 주는 것을 글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은 글이라 칭하지 않는다. 자기감정의 찌끄러기를 긁적인 것은 감정의 토사물로 자기감정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자 자기 혼자만 보고 버리는 메모나 낙서일 뿐, 남에게 읽힐만한 ‘글’이라 할 수 없단 말이다.

다시 말해, 문자를 나열하고 가 적었다고 해서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강의를 하게 되면, 특히 300명 이상의 대형 강의를 하게 되면 학생들과 아이 컨택을 하며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이해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그래도 할 사람들은 다 한다.


그래서 가만히 그들과의 아이 컨택을 통해 그들의 생각과 이해도를 살펴보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학생들을 발견하곤 한다. 강의는 그들을 일일이 구제하지 않는다. 시간의 제약도 제약이지만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가르침을 강요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도는 다르다. 대학원생들을 지도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쓴 논문이나 자신이 공부했던 자료를 가지고 와 조금 더 나아겠다고 자신이 적은 ‘글’을 가지고 온다. 자신의 공부를 지도해달라고 오는 학생들이 자신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그 과정을 통해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을 일러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것이 ‘지도’이다. 그런데, ‘글’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것을 들고 오는 학생들이 가끔 등장한다.(세월이 갈수록 그 숫자와 빈도는 커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공자식 표현으로 그것을 ‘기본이 되지 않았다.’라고 한다. 제대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언제까지 가지고 오라고 하였음에도 학생은 내용도 엉망이고 글도 엉망인 상태의 종이뭉치를 스승에게 내밀었다. 몇 장을 넘기다가 한 장에 비문이 두 개 이상 눈에 띄고 내용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수준임을 알고 논문을 덮으며 물었다.


“자네 담배 피우나?”

당황한 제자가 대답했다.

“예.”

“라이터 좀 빌려주겠나?”

“예. 여기.”

“자아, 자네 논문을 태우면 무엇이 남을 것 같은가?”

“네?”

그리고 그의 논문은 훨훨 잘 타들어갔다. 그리고 스승이 말했다.

“한 줌 재밖에 안 남네.”

경악스러운가? 아니. 그 정도로 엉망인 상태로 스승에게 글이랍시고 내밀며 알아서 고쳐달라고 후안무치한 학생에게는 회초리로는 해결 안 되기에 내린 처방이다.


장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최소한의 예로서 바쳐야 하는 육포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 보이는가? 제대로 배우고 싶은 자라면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배움에 갈급해하는 모습을 노력으로 보이는 것만 한 예가 없다.


가난함에도 기본적인 수업료로서 폐백의 예를 갖추라고 했던 기본요금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을 예로서 표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이 예이던가? 상황이 그만하지 못함에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 선생을 한다는 둥, 강사를 한다는 둥, 책을 몇 권 냈다는 둥, 유튜브에서 활동 중이라는 둥, 참 여러 스타일로 글쓰기 지도를 한다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푼돈이긴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먹고살겠다고 광고하고 마케팅하는 자들을 본다. 그리고 궁금하여 그들이 쓴 글을 본다. 그리고 얼른 화면을 닫고 세면대로 달려가 눈을 씻는다.

그러지 마라. 차라리 함께 공부하자고 해라. 그 알량한 세치 혀로 없는 실력 포장하지 말고 같이 공부하는 마음으로 해라. 예로부터 돈 받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함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아무나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그리 참람된 자가 함부로 입에 담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자.

글을 왜 쓰는지 모르겠어요. 글을 제대로 쓰고 싶어요.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어서 숨고를 찾아 선생님을 구했어요.(숨고가 뭔지 나도 찾아보고 알았다.)


그따위 입에 발린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글을 오독하지 않는 기본적인 훈련부터 하고 나서 자신의 글을 써라. 입을 열고 떠든다고 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자를 끄적거렸다고 하여 그것이 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제대로 배우고자 하면, 제대로 된 스승을 찾아라.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그런 마음의 자세가 되었는지를 예를 갖추어 보여라.


그러면 제대로 된 스승이라면 당신이 그간 제대로 못 배웠는지 가방끈이 너무 짧은지 칼 들고 설치던 깍두기였는지와 상관없이 당신을 받아들여 진정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제대로 배우고자 이들이 더욱 많아져 정말 ‘글’을 쓸 준비가 된 자들이 브런치에 점점 더 많이 늘어나길 바라마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