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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6. 2022

배우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본 적이 있는가?

무언가에 빠져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 불쌍한 청춘들에게.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공자께서 齊나라 계실 적에 韶樂를 들으시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시며 “음악을 만든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하셨다.

이번 장(章)은 앞서 팔일편 25장에서 한번 언급하고 간단히 공부했던 공자의 악(樂)에 입문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담은 가르침이다. 


공자는, 17세 정도였던 노소공(魯昭公) 초기에 노나라의 삼환가(三桓家)중 일가인 맹손씨의 맹의자(孟懿子), 남궁경숙(南宮敬叔)의 예(禮)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인연을 맺게 되고, 노의 공실(公室)과도 인연을 가지게 된다. 노소공(魯昭公) 20년에 패권을 꿈꾸던 제(齊) 경공(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를 방문하여, 공자에게 진(秦) 목공(穆公)이 진나라가 서쪽의 작은 나라임에도 어찌 패권국이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에, 공자는, ‘진(秦) 목공(穆公)이 오고(五羖, 백리해)를 발탁하여 그에게 대부의 작위를 주어, 나라의 행(行)이 중정(中正)하여 패권국이 되었다’고 대답하는데, 그렇게 그 둘은 3일간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게 된다.

 

​ 이런 계기가 공자와 제(齊) 경공(景公)의 인연이 되어 5년 뒤, 노소공이 계평자와 후소백의 투계(鬪鷄;닭싸움)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삼환가(三桓家)의 연합 공격을 받아 제나라로 도망하고, 그 뒤 노나라에 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공자도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제 경공의 일을 돕기도 하다가, 우연히 그 과정 중에, 제나라 태사(太師)로부터 소(韶)의 악(樂)을 듣고 배우게 된다. 본 장(章)의 내용은, 바로 이때 공자가 음악을 배우게 되면서 겪은 일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제(祭) 나라는 태공망 여상(呂尙)에게 봉해진 나라로, 태공망은 주 왕실의 태동이 되는 문왕과 만나 주(周)가 은을 치고 새로운 왕조의 성립의 기초를 닦은 공신이다. 하, 은, 주 삼대의 소리는 제나라 사람들이 기록하였기에 ‘제풍(齊風)’이라 불렀는데, 소(韶)는 순(舜) 임금의 일대기를 담은 악곡이며, 무(武)는 주(周) 왕조의 성립과 관련된 악곡이다. 순(舜) 임금의 후예인 진(陳)의 공자 완(玩)이 제(齊)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제(齊)에서 소(韶)가 보존될 수 있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그 소(韶)를 배우면서 기존의 예(禮)에 대한 기본에 더해서 악(樂)을 본격적으로 습득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앞서 이 내용을 공부했던 ‘八佾(팔일) 편’의 23장에서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라고 소(韶)와 무(武)를 언급한 바 있었다. 굳이 시간의 순서를 따지자면 이 장의 언급이 음악을 배우고 나서이고, 팔일편의 언급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고 난 뒤에 한 말로 추정된다. 두 장(章)의 내용을 함께 연계하여 이해하면 전체적으로 공자가 말하려고 했던 취지를 보다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이 장에 대한 해설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고기 맛을 몰랐다는 것은 마음이 여기에 專一해서 다른 것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舜임금이 음악을 만든 것이 이처럼 아름다울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내용(情)과 문채의 갖춤을 지극히 하여, 그 감탄이 깊어짐을 깨닫지 못하신 것이다. 성인이 아니면 이 경지에 미칠 수 없다.

 

주석에 나온 것처럼 고기 맛을 몰랐다는 것은, 입맛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음악을 배우는 것에 푹 빠져 지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단순히 기타나 드럼을 배우는 것처럼 음악의 테크닉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다. 소악이라는 음악은 순임금이 만든 음악이다. 즉, 공자의 단계는 그 음악을 만든 이의 당시 감정과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하모니의 행간마저 읽는 수준으로 빠져들어가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져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메시지를 읽은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입장에서는 순임금이 직접 만든 음악을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에 음악이라는 것이 그러한 메시지와 심상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되면서 자신이 무엇에 대해 빠져들어 감탄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 있었기에 음악이 그럴 수 있다는 점에 감탄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그 지극한 빠져듦을 이해한 범씨(范祖禹)는 이 장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韶樂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좋으니, 음악으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시고 감탄하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니, 정성이 지극하고 감동함이 깊은 것이다.”


이 장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갖는 극명한 차이이다. 서양의 음악은 멜로디를 듣는 것이다. 특히나 현대의 음악과 달리 가사가 없는 음악의 경우에는 작곡이 갖는 의미가 지대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음악이 클래식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그들의 음악은 목적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들려주기 위한 것은 청중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연회의 목적이든 어떤 목적이든 그 목적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서양의 음악은 듣는 이에 맞춰, 상황에 맞춰, 목적에 맞춰 작곡되었고 그렇게 활용되었다.

그런데 동양의 음악은 조금 달랐다. 동양의 음악 역시 서양의 음악이 갖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동양의 음악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는 음악을 통한 수양이고, 음악을 통해 심상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에서처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만들어내는가는 곧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서양의 음악은 테크닉 위주로 발달했지만, 동양의 음악은 작곡한 이가 연주하는 메시지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고 발달하였다. 이는 감상에서도 큰 차이를 갖게 되는데, 서양의 음악은 그 기교를 알아보지 못해도 음악을 듣는 데는 무리가 없다. 즉, 본래의 멜로디가 갖는 의미의 차이는 크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의 음악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백지에 가까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책을 소리 내서 낭독하게 하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한 자가 읽는 소리와 그냥 말 그대로 책을 읽는 자의 소리가 다르다. 그런데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듣는 이가 그 정도 수준이 되어야 간파해낼 수 있다. 그것이 동양의 음악이 갖는 특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음악이 서양의 음악보다 상위에 있다거나 하는 우열론으로 구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두 세계의 문화관과 가치관이 달라, 음악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다. 서양에서도 동양에 한 번도 와보지 않고 수양이라는 개념을 배워보지도 않은 이들이, 단순한 소리의 유사성이 아닌 동양의 심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작곡 안에 담아내는 작곡가들이 세기마다 등장했었다. 

같은 의미에서 동양에서도 그 심상을 제대로 구사해내기 위해 부단한 수련을 통해 악기를 다루는 기교에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국 음악의 종국점에서는 동서양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레벨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자가 전혀 배워보지 못했던 음악이라는 세계, 그런데 하필이면 또 처음 배운 그 소악(韶樂)이라는 것이 순임금이 만들어낸 음악이었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도통(道統)의 흐름 정점에 있는 순임금이 만든 음악으로 음악을 배웠고, 그 음악을 배우면서 그 음악을 만든 순임금의 심상을 읽으며 감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신묘한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어갔던 공자의 즐거움이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중에 미술사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다면 상술하겠지만 미술에서도 이러한 동서양, 두 세계의 완전히 다른 양태의 지향점은 두 세계를 비교하고 대조하는데 아주 좋은 문화적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다시 이 장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 장의 가르침이 주는 여러 가지 입체적인 메시지 중에 <논어>를 편집한 이들이 스승 공자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었는지를 가만히 눈 감고 명상하듯 상상해보라.


스승이 처음 배운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 경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것이 전달해주는 하모니 속의 메시지를 읽느라 푹 빠져 밥을 먹는데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하려고 한다는 단계를 보며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반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는 ‘저게 그렇게 재미있나?’하는 의문, 두 번째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것을 통해 배우는 체득이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배울 때 저런 자세로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배울 때, 밥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밥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열중하고 빠져들었던 것이 있었던가? 요즘 사람들은 기껏해야 게임, 만화책 읽기, 도박 정도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가장 큰 착각이, 그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의 즐거움은 그 어떤 중독이나 즐거움보다 깊고 크다. 물론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을 말로 백날 설명해봐야 와닿지 않기 때문에 공자는 늘 실천을 통해 직접 몸으로 체득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체행하였고,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자세를 강조하였다.


부모가 책을 읽으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곁에서 함께 책을 읽고, 부모가 소파에 드러누워 예능 프로그램이나 보며 낄낄거리고 있으면 아이도 그 곁에서 다리를 똑같이 꼬고 드러누워 낄낄거린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지식과 경험을 한창 쌓아야 할 아이들에게 교육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즐겨보는 이들조차도 인정할 부분이기에 재삼 강조하지는 않겠다.


부모가 무언가를 늘 연구하고 노력하는 집에서 아이들이 소파에 드러누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부모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어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아 서울대를 들어간 아이들의 부모가 모두 전문직이고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라서 부의 대물림처럼 지식의 대물림이 된다는 허망한 지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문직이라고 하는 부모들은 자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적기 때문에 그들의 가방끈이 길다거나 그들이 전문직인 것과 자식이 성적이 좋다는 것은 조금 핀트가 안 맞는 상상이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많이 보았겠지만, 부모가 훌륭한 성적의 전문직이라고 자식들도 그런 전철을 밟는 경우가 당연한 것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의 선생보다, 학원의 일타강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이는 사람은 결국 부모라는 것이다. 보여지는 교육,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익히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공자의 가르침에 비춰보면 당신의 자식이 지금 공부를 못하고 놀기를 좋아하며 부모 몰래 딴짓을 하려고 하는 것은 200% 당신의 모습에서 투영되어 나왔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식의 몸에 투영되어 나오는 배움을 좋아하고 그것에 빠져드는 긍정적인 방식의 습관이 몸에 배려면 한 달이나 1년 정도로 익혀지지 않는다.

삐쩍 마른 아이가 어느 집에 입양되었다. 그런데, 입양된 집에서는 늘 저녁을 늦게 먹고, 야식을 배달음식으로 먹는 식습관이 있는 집이었다. 삐쩍 마른 아이가 한 달이 지난다고 뚱뚱해지지는 않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게 되면 그 집에서 삐쩍 마른 아이를 찾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맞다. 악화가 그러하듯 양화에 해당하는 단련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한 달, 1년으로는 변화하는지 아닌지 모르던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습관이 되어 있고, 몸을 바꾸고, 머릿속에 든 것이 바뀌고, 생각을 바꾸며, 행동거지를 바꾸게 된다. 그런데 아이의 경우에는 그것을 주도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부모의 패턴에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공자가 그렇게 자기 집안의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한 것이고, 그것이 안되는데 더 큰 바깥의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딱 잘라 말한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주책없이 늘어만가는 똥배조차 조절하지 못하는데, 자녀에게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그저 강조하고 있는가? 자신은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그저 강요하지만은 않느냔 말이다. 


당신은 가르친 적도 없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당신의 자녀에게 가장 가깝고 영향을 많이 미치는 선생은 바로 당신이다. 그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익힌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왜 배우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부모가 시켜서 피아노 학원은 필수로 가야 하고, 태권도 학원은 당연히 가는 것이라면 피아노 학원 원장과 태권도 학원 원장은 먹고사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자녀에게는 당신이 그렇게 컸던 것처럼 당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당신은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가? 당신도 그랬는데 왜 당신의 자녀에게 그저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지에 대해 한번만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배움은 갈증이다. 갈증이 나서 지금 막 물을 한 통이나 마신 아이에게 물을 계속 내미는 것은 고문일 뿐이다.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 돈을 주면 그 돈은 꼭 필요한 것이 되지만, 그저 부족하지 않게 넉넉하게 챙겨준다고 돈을 주면, 그 돈이 없어졌을 때, 그 아이는 결핍과 부족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된다.

지난번에 배운 것처럼 궁금하다고, 꼭 알고 싶다고, 간절해 하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말라고 공자는 말했다. 이유 역시 그것이 가장 효과적일 때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해줘야 한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근거에서 나온 논리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대한 갈증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아이가 무엇에 대한 갈증이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그것을 해줄 생각을 해야지, 그저 멍하니 남들이 하는 것을 나도 잘 모르고 했었던 것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했더니 당신의 삶이 윤택해지지 않았음에도 또 그 패턴을 반복한다는 것은 당신이 인생을 얼마나 안일하게 살고 있다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정신 차려라!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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