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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07. 2022

내 것 아닌 것을 탐해 얻은 것은 결국 네 것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 욕심을 내는 한심한 이들에게.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 曰: “伯夷·叔齊, 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염유(冉有)가 말하기를, “夫子께서 衛나라 군주를 도와주실까?” 하고 말하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내 장차 여쭈어보리다.”하였다. 들어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는 “옛날의 현인이시다.”하고 대답하셨다. “후회하셨습니까?”하고 묻자, “仁을 구하여 仁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하였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 자공(子貢)이 나와서 염유(冉有)에게 말했다. “夫子께서는 그(위나라 군주)를 돕지 않으실 것이다.”하였다.

이번 장(章)의 상황은, 바야흐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의탁해 있을 때, 위 영공이 죽고, 위 영공의 새 부인(夫人, 제후의 정비)이던 남자(南子)와의 갈등으로 송으로 도망한 태자 괴외(蒯聵)를 두고, 괴외(蒯聵)의 아들인 첩(輒)을 지지하여 위 영공의 대를 이어 위군(衛君)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이에 스승인 공자가 위군(衛君) 첩(輒, 出公)을 위해 정사를 도울 것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의논이 나오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해설하고 있는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衛나라 군주는 出公 輒이다. 靈公이 그 세자 괴외(蒯聵)를 내쫓았는데, 靈公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괴외(蒯聵)의 아들인 輒을 세웠다. 이에 진(晉) 나라에서 괴외(蒯聵)를 본국에 들여보내니, 輒이 그를 막았다. 때마침 공자께서 衛나라에 계셨으므로 衛나라 사람들이, 蒯聵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輒이 嫡孫으로서 마땅히 옹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염유(冉有)가 의심하여 그것을 물은 것이다.

 

누차 나왔던 상황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정리해보면, 衛나라 靈公은 수려한 외모의 南子라는 첩을 얻고 그녀를 부인으로 우대하고 총애하였다. 南子는 淫行(음란한 행적)이 있었으므로 괴외(蒯聵)가 이를 수치로 여겨 그녀를 살해하려 하였는데 결국 미수에 그쳤고, 이 일로 인해 영공이 노하여 괴외(蒯聵)를 축출한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임금인 아버지가 부인으로 맞은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니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태자 괴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유도 그 여론을 감안하여 위나라에 거처하는 스승이 괴외의 아들 첩(輒)을 도울지 궁금해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궁금증을 직접 스승에게 묻겠다고 했던 자공(子貢)의 질문 방식이다. 자공은 똑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자공은 백이, 숙제가 보였던 처신에 대해 스승의 생각을 묻는 방식으로 스승의 의중을 묻는다.


여기서 주의해서 읽어야 할 행간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과연 백이, 숙제의 상황과 당시 상황이 어떤 부분이 닮아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왜 직접 묻지 않고 이렇게 에둘러 질문했는가 하는 의도와 방법에 대한 것이다.

 

고문에는 워낙 많이 인의(仁義)의 대명사로 언급되는 전설적인 두 형제 伯夷, 叔齊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중언부언 반복할 필요가 없을 듯하여, 주자의 해설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伯夷, 叔齊는 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죽을 때 叔齊를 옹립하라 유명(遺命)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叔齊는 伯夷에게 양보하였다. 伯夷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이라 하고 마침내 도망가니, 叔齊 또한 왕위에 오르지 않고 도망갔다. 이에 나라 사람들은 둘째 아들을 세웠다. 그 뒤에 武王이 紂王을 정벌하자, 伯夷와 叔齊는 말고삐를 잡고 간(諫)하였고, 武王이 商나라를 멸망시키자 伯夷와 叔齊는 周나라의 녹봉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周나라를 떠나 首陽山에 숨어 살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고죽군의 둘째를 군주로 세웠다는 것은, 伯夷가 첫째이고 叔齊가 셋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아까 유념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두 가지 문제 중에 첫 번째부터 생각해보자. 이 두 형제의 이야기와 스승인 공자가 위군(衛君)이 된 첩(輒)을 도울 것인지가 무슨 관련이 있길래 子貢은 伯夷, 叔齊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을까? 이 질문은 이번 장(章)을 이해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자공은 스승이 백이, 숙제를 현자로 본다는 것을 이미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핵심 포인트는, ‘그들이 후회하였습니까?’에 있다. 스승 공자의 대답은 ‘仁을 구하고자 해서 仁을 얻었으니 다시 또 후회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위나라 여론이 어떠하든 공자는 당시 상황의 진상(眞相)을 알고 있었다. 뭐 비밀일 것도 없었으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괴외는 자신이 자리를 탐하였기에 남자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태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백이, 숙제가 떠나버리고 임금이던 아버지 고죽군(高竹君)의 자리는 중자(仲子;둘째)가 잇게 되는데, 자공은 당시 상황에서 위군(衛君) 첩(輒)을 고죽국의 중자(中子)와 같은 입장으로 두고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선왕이 물려준 것도 아니고 백성들에 의해 옹립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임금을 해야 할 자가 자리를 비워 왕이 된 자가 바로 중자(中子)였고, 괴외(蒯聵)의 아들이자 위 영공의 손자였던 첩(輒)도 그와 똑같은 입장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공은 스승 공자가 대답한 것이 모르는 척 대답한 듯 하지만, 이미 스승 역시 자신의 의중을 꿰뚫고 선문답 하듯이 대답해준 것임을 깨닫고 나와서 “스승님께서는 새로이 위나라 군(君)이 된 첩(輒, 出公)을 도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염유에게 알려준 것이다.

 

첩(輒, 出公)이 할아버지인 위 영공의 죽음 이후에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공자와 자공의 대화는 좀 더 명확하게 이해된다. 사실 위 영공 말년에 부인(夫人)인 남자(南子)는 남편의 뒤에서 자신이 위나라 정치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다음 왕을 생각하자니, 당연히 자신의 소생이던 아들 영(郢)을 태자로 세울 것을 원했다.


허수아비 영공 역시 영(郢)을 태자로 세워주려 하였으나 여기서 남자(南子)의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그녀의 아들 영(郢)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태자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거부의사를 밝힌 것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많았겠지만, 어머니인 남자(南子)와의 갈등으로 본래 왕위에 올랐어야 할 적손(嫡孫), 태자 괴외(蒯聵)가 국외로 도망가있는 상태이고, 괴외의 아들 첩(輒)이 그대로 살아있으니, 당시 예법에 따라 적통 순위로 보아도 위군(衛君)의 자리는 태자(太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위(位)를 잇는 것이 의(義)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부들도 영(郢) 자신이 태자가 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하면서 한사코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니, 결국 괴외의 아들인 첩(輒)이 위군(衛君)이 된 것이다. 즉, 본래 왕위에 올랐어야 적통 순위에서 백이와 숙제가 모두 사양하자 지명되지도 않은 중자가 된 것처럼 상황이 똑같이 되었기에 그렇게 비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군자가 그 나라에 있을 때는 그 지방의 大夫를 비난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군주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자공(子貢)이 衛나라 군주를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伯夷, 叔齊를 들어 질문을 한 것인데, 夫子의 대답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위나라 군주를 돕지 않으실 것을 알 수 있다. 伯夷는 아버지의 遺命을 존중하였고 叔齊는 天倫을 중시하였으니, 나라를 사양한 것은 다 天理의 바름에 합하고 사람의 마음의 편안함에 나아가기를 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각각 자기의 뜻을 얻었으니, 그 나라를 버리는 것 보기를 헌신짝처럼 여긴 것이다. 어찌 후회함이 있었겠는가. 衛나라 첩(輒)이 나라를 점거하고 아버지를 막아서 행여 나라를 잃을까 두려워한 것으로 말하면, 같은 것으로 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앞서 던졌던 두 번째 질문, 왜 자공은 굳이 직접 대놓고 물어보면 될 것을 그렇게 에둘러 백이, 숙제를 소환하며 물었는가에 대한 해설을 주자가 직접 해주었다. 대놓고 묻는 것은 묻는 자도 부덕한 것이지만, 그 질문에 스승이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정작 지금 위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스승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공은 백이, 숙제를 소환한 것이다.


그 나라에 몸을 의탁한 사람이 그 나라의 군주가 된 자가 인의를 지켜 그 자리에 옹립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두 사람이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대화법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의견을 암호를 사용하듯 소통한 것에 다름 아니다.


염유만이 그렇게 공부하고서도 스승의 의중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뭇 위나라 사람들의 여론에 자신도 흔들려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대화와 상황들은 다시금 수준별 학습을 실생활을 통해서 공자가 어떻게 보여주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정자(伊川)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伯夷, 叔齊는 나라를 사양하다가 도망하였고, 정벌을 간하다가 굶주려 죽었으나 끝내 후회가 없었는데, 夫子께서 그들을 어질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衛나라 첩(輒)을 돕지 않으실 것임을 안 것이다.”

 

이후 공자가 판단했던 것처럼 衛君(위군) 출공(出公; 輒)이 망명 가 있던 아버지를 불러서 왕위를 계승케 했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왕위에 오른 것은 고죽군의 두 아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여 주나라로 도망간 것과 대조적이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 괴외(蒯聵)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아버지를 경계하였고, 아버지와의 싸움 끝에 아버지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자기 목숨 건지겠다고 노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대선판이 기울어졌다. 인지상정이었다. 대부분의 큰 일국(一局)은 내가 잘해서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상대가 잘못하고 실수해서 무너져버린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모든 것을 얻어낸 듯 설쳐댔었다. 나이가 먹을 대로 먹고 과거의 행실이 일관되지 못한 늙은이는 1년이나 자신의 몸값을 올려대는 추한 행동을 통해 결국 장로(長老)로 인정받고 싶어하더니, 킹메이커로 모셔지나 하던 순간, 한 달도 채 못 넘기고 팽을 당해버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이미 다음 정권을 자신들이 가져온 것이라 샴페인을 애초에 따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시며 강릉 출신의 총리를 운운하며 거나한 술자리를 가지며 자신들에게 잔소리를 하며 그 공을 가로채려는 듯한 이를 못 견뎠다. 거기에, 국회의원에 조차 단 한 번도 당선되지 못하고 그저 시류에 편승하여 '30대 젊은 당대표'라는 간판을 얻은 철없는 당대표라는 녀석은, 자신이 마치 2030의 표를 포대에 넣고 다니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인양 거드름을 피웠다.


그들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장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또 그 설명을 들으면서 당신이 보기에는 과연 누가 잘못한 것 같이 보이던가? 태자 괴외(蒯聵)가 정말로 바른 인물이었다면 그의 아들 출공이 아버지가 없는 사이에 냉큼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가 다시 못 들어오게 막고 싸웠을까? 우리는 그것을 전문용어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부른다.


태자 괴외(蒯聵)의 행동이 남자(南子)와의 권력투쟁에서는 바른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그들 안에서의 사정이고 그 자식 하나 바르게 가르치지 못해 자식과 왕위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괴외(蒯聵)는 이미 입이 열개여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라의 부족한 점을 보고 보완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진정한 위정자라면, 굳이 자신이 가장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고 나대며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정 그가 그럴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면 자신이 떠들고 다니며 강조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를 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가 우리나라를 이끌 자라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나라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겠다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이기고난 이후에 공을 누가 더 가져갈 것인가 헛된 꿈부터 꾸었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는데, 상상 급체에 스스로 무덤까지 파고들어들 가신 셈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조금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렇게 미리 삽질하는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법비들의 이른바 ‘그림을 그리는 버릇’에서 기인한 것이다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면 대개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결과물로 나와주었때문이다.

구치소 가는 이명박을 배웅하러 나왔던 커플

그들은 그렇게 잘 그려진 그림만으로도 미리 룸살롱에서 언니들을 주무르며 폭탄주에 미리미리 공을 나누고 돈을 나누고 죄악을 나눠갖는다. 그 버릇이 그대로 정치판에 옮겨오면서 따라왔을 뿐이니 그들은 일관된 삶을 산 것뿐이다.

 

당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낄낄거리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가?

회사 조직을 비롯해서 무리를 지어있는 곳에서 속해 일하다 보면 이런 자들은 꼭 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일을 버젓이 자신이 모두 이뤄놓은 것처럼 숟가락만 얹어 모두 자신이 만들어 상을 올린 것처럼 티 내고 그 공을 따먹겠다는 자.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말하겠지만, 회사든 조직생활을 한 이들이라면 이런 자들의 귀신같은 연기와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를 승진시키고 인정하는 무능한 듯하면서 뒤로는 그들과 똑같은 보스와 상관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심지어, 귀신은 바쁜지 그런 것들을 잡아가지도 않고 그들은 의외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 정작 밑에서 재료 손질부터 밥상을 만들어 올리는 일만으로 지쳐버린 이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떤 조직이나 있는 그들의 왜 박멸되지 못하고 계속 바퀴벌레처럼 기승을 부리고 그 삶을 영위하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데, 분명히 이 성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데, 당신에게 그 공치사가 돌아왔을 때, 당신은 백이, 숙제처럼 굴었던가?


공동작업이고 나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좀 공을 받아도 된다고 슬쩍 스스로를 기만하며 설득하지는 않았던가? 공동 프로젝트에서 정작 날밤 새우며 PPT를 준비한 것은 내 동료인데, 내가 졸지에 발표만 맡아서는 어쩌다 기가 막힌 연기와 발성으로 인정을 받아놓고는 모두 자기가 한 것처럼 칭찬하는 말에, ‘저는 그저 발표만 맡았는데요.’라고 말하며 그 공을 원래 받아야 이에게 돌릴 생각을 왜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까?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하겠다고 장관하고 청와대 들어가고, 그렇게 감옥 가고 울고불고 화장 다 지워지고 민낯 드러낸 아줌마 아저씨의 일이 당신과는 멀찍이 떨어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나?

아니다. 그 사람들도 부모에게 제대로 가정교육받고, 제대로 된 스승에게 회초리 맞아가며 인성교육 받고 수양했다면, 그런 짓은 어느 순간 안된다고 멈췄을 것이다. 스스로가 멈추지 못하면 그 남편이라도, 그 아내라도, 아니 그 늙은 부모라도 멈춰줬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저 그 부와 명예를 누릴 생각에 자신의 양심에 잠시 눈꺼풀을 덮어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감옥에  들어가고 법정에서 눈물 콧물 부부가 다 흘리고 나서 그들이 개과천선했을 것 같은가?

 

그저 웃는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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