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10. 2022

富貴를 왜 뜬구름이라 부르는지 이유를 아는가?

무엇을 얻는 것보다 어떻게 얻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樂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못하고서 富하고 또 貴함은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으니라.”

이 장은 어디선가에서라도 많이 본 것 같은,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미리부터 알려주며 시작한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해라. 그리고 그 수준을 의심해라. 이 장의 내용에서 당신이 쉽게 읽어내지 못하게 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가장 쉬운 국어 실력부터 점검하면서 시작하자.

왜 富와 貴를 ‘뜬구름(浮雲)’이라고 표현하는지 아는가? 이 표현은 한국어가 아닌 한자어에서 나온 말이다. ‘덧없다’는 의미는 어렴풋하게 알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 물으면 정작 그 이유를 제대로 아는 대답하는 이가 드물다.


이 의미에 대해서만 선배 학자들이 달아놓은 주석이 몇 페이지가 넘는다. 정리하자면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뜬구름은 하늘에 떠 있어 내가 소유하지도, 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즉, 제멋대로 떠 있는 것이라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뜬구름은 순식간에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항상성이 없는 것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순식간이라 덧없다는 것이다.

셋째, 뜬구름은 하늘에 떠 있을 뿐 비를 내리지 않아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소용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두 번째, 富와 貴 자체가 뜬구름처럼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방점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다. 즉, ‘의롭지 못하고서’에 있다는 말이다.


富하고 貴해지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반어(反語)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의로운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당당하게 누려야 할 것이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적지 않았을까? 그것에 공자의 의도가 있다. 그런 정당한 방법으로 의롭게 富와 貴를 얻은 자들을 볼 수 없으니 그것이 그저 뜬구름이라는 당대 富貴한 자들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기는 펀치에 다름 아닌 용법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앞서 안회(顔回)의 고사(단사표음(簞食瓢飮))를 언급하며 한번 지적했던 부분인데 또 잊었을 듯하여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안회(顔回)가 가난한 생활을 즐거워하고 일부러 가난하게 지낸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함이 그가 즐거워하던 바를 방해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하면 다시 이전 공부로 돌아가서 천천히 읽어볼 필요가 생긴다. 본문에서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樂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라고 한 것은, 앞서 설명과 마찬가지로 곤궁한 생활을 하더라도, 즉,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것을 참고 仁과 道를 논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오독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이들이 많으니 공자를 오해하는 이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평범하게 생활하고 심지어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방점은, 극단적인 예로서 곤궁한 처지가 되더라도 그 즐거움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예일뿐인 것이다.


이 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통해 이 부분을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자.

 

聖人의 마음은 渾然히 天理여서 비록 지극히 곤궁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樂이 있지 않은 데가 없다. 그 의롭지 못한 부귀 보기를 마치 뜬구름이 없는 것 같이 여겨, 막연해서 그 마음에 동요됨이 없는 것이다.

 

지극히 곤궁한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즐거움이 그것으로 인해 영향을 받거나 어려울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의롭게 노력하여 얻은 富貴가 아니기 때문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에 굳이 비교하면서 그것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우는 자들이 혹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할까 싶어 정자(伊川)가 다시 정리한다.

 

“거친 밥과 물 마시는 것을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그 즐거움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니, 의롭지 못한 부귀 보기를 뜬구름처럼 가볍게 여기신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모름지기 즐기신 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주석에서는 마지막에 굳이 마지막 한 줄을 나눠 설명한 것에 방점이 있다. ‘즐기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맞다. 이 장에서는 그 부분을 부러 설명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말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감추는 것으로 강조한 것을 배우는 자들이 놓칠까 싶어 다시 한번 강조한 해설에 다름 아니다.


일반 문장에서는 강조를 하기 위해 도치를 하거나 여러 번 반복하거나 일반적인 방법을 쓰는데, 공자의 레벨이 되면, 굳이 강조하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들은 어차피 계속 말하고 강조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문장에 모든 실마리는 다 나와 있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의롭게 얻은 富와 貴는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인의(仁義)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는 이미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富와 貴는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였다. 공자 역시 富와 貴를 바라며 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富와 貴를 바라지 말라고 금지한 말을 한 적은 없다. 앞에서 공부한 것처럼 의롭지 않게 그것을 얻는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적하고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롭지 않게 얻었다는 것은 어떻게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하고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속인 것 따위가 의롭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속여 그렇게 富와 貴를 얻게 되면 공식적인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롭지 못하다는 기준을 어떤 것으로 삼고서 말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생각하고 이해했을 뿐 명확하게 기준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말하는 ‘義’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데, 공자의 개념에서 그릇됨을 가장 먼저 알고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본인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법이나 상식으로 말하기 이전에 자신이 꺼려지는 바가 있다면, 아직까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단계로 본다. 그것을 양심이라는 용어 정도로 표현해도 좋겠으나 더 정확한 표현은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꺼려지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이다.

 

비싼 서울 강남의 집을 여기저기 돈을 꾸고 은행에 대출까지 해서 샀다. 그렇게 산 집이 갑자기 엄청나게 올라 경제적인 이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의롭지 않다고 보아야 할까?

반대로 그렇게 영끌이라는 것까지 해서 산 아파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이자를 내고 궁핍한 하우스푸어 짓을 하면서 지냈는데, 갑자기 부동산이 폭락하여 혜택을 보지도 못하고 빚은 계속해서 갚아나가야만 한다면 그에게 ‘義’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본 장의 행간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결국 내 것이 아닌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이것이 본 장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왜 두 다른 개념을 한 문단에 들어가 있을까 하는 명쾌한 해석이 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결국 온전히 내가 누리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의롭고 의롭지 않고를 떠나서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뜬구름 말이다. 당신이 우연히 다른 사람의 일을 봐주러, 혹은 과외를 하러, 혹은 상사의 집에 심부름을 하러 갔을 때 봤던 그 강남의 아파트들은 당신에게는 그저 뜬구름일 뿐이다.

당신의 것이 아니고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당신은 그것을 보면서 배가 아프고 당신이 그곳에 살았어야 한다고 억울해하기까지 한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대적 빈곤감이 당신의 자괴감을 괴물처럼 키우기 시작하며 당신을 우울과 자격지심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래서 당신은 강남의 아파트를 산 이들이,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당신의 주머니를 털고 당신을 속여서 그러한 부를 마련했다고 정말로 아무 근거 없는 분노를 키운다. 그렇게 키운 분노가 당신의 삶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물론 그런 자들도 있다.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서 돈을 받고, 받아서는 안될 부정한 돈을 받고, 우리가 요즘 보았던 대장동의 비리처럼 무슨 수백억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고 50억 클럽이니 뭐니 하면서 대가를 받아 챙기고 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그것이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의라는 것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도 아니거니와 그들은 나름 컨설팅이나 법률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수억 혹은 수십억이 오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단 말이다.


당신이 생각해 볼 때, 그저 전관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서류에 넣는 것만으로 실제 변호를 하지도 않고 변호인단에 이름만 넣고도 몇억씩 받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을 의롭지 않다고 할 것인가? 그것은 입장 차이일 수도 있는데? 당신이 그려도 그것보다 잘 그릴 것 같은 미술 같지도 않은 추상화가 수백억에 경매에서 낙찰되었는데, 당신이 미술을 모른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산다고 그것을 당신의 기준으로만 보아, 의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리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법비들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그렇게 아등바등 대법관까지 하고 나와서 전관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수백억 수천억이 오가는 재판에서 키맨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만져보지 못했던 그 부를 누리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차피 법비들이 전관이라며 돈을 받고, 컨설팅비 자문이니 뭐니 하면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래를 하고, 그저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범위에서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겨도 그것이 의롭지 않다고 욕할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고 싶고 갑자기 혼란스러운가?


아니, 당신은 이제 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용인되는 사회를 만드는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는 분위기의 사회를 만드는가에 대한 문제로 당신의 인식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전관예우가 모두 사회악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법제적으로 그것을 여태 뿌리 뽑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 때문에 이익을 보고 이익을 누리는 자들이 그것을 법제적으로 금지하면 자신들의 이익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부동산 투기를 하면 세금을 많이 내게 제도를 만든다니까 연예인들마저 강남에 빌딩소유로 인기를 가늠한다며 세금을 피해가며 법인을 설립하여 세금폭탄을 피해 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법을 모르고 그저 정해진대로 세금을 내라고 해서 내는 서민들만 바보인가? 아니면, 법망을 빠져나갈 방법을 잘 알고 피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챙긴 자는 문제가 있다고 의롭지 못하다고 욕할 것인가? 그것이 용인되는 이유와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이상, 그러한 일은 계속 반복된다.


대학을 들어가는데 스펙이라는 것을 요구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만들어줄 수 있는 전문직 부모들, 특히 교수들끼리 품앗이하는 개념으로 유행하듯 이루어졌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 자식들에게만스펙을 달아주고 그들의 자식이 더 나은 대학을 가고 로스쿨에 입학하고 치전원이니 의전원을 가게 되는 것에 당신이 분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당신도 그 자리에 끼어다면 함구하고 그들처럼 ‘당시에는 대개의 강남 부모들이 그랬다.’라던가 ‘그것이 법률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구차하게 변명할 것 아닌가?


일하지도 않은 로펌 사무실에 인턴을 했다고 하여 경력을 만들고, 엄마가 국회의원이라고 국립대 연구실을 고등학생에게 실험하라고 빌려주고 해서 만든 경력이 다들 하는 일이라고, 법률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할 것인가?

아빠가 현직 판사고 엄마가 판사 출신 국회의원인데, 딸을 대학에 넣기 위해 딸이 면접에 들어가서 자기 부모의 직업을 당당히 말해도 장애가 있는 아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고장 난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처벌하고 그런 행태를 부끄러워서 도저히 할 수 없게끔 만들지 못하는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 사회 시스템 탓을 하느냐고?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 시스템은 단순한 법이나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암묵적 동의에 의한 공범이 있어야만 한다. 그 공범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공유되지 않으면 결코 암묵적 동의를 하고 동조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몇 번이나 잊힐만하면 방송사의 고발 보도를 통해 문제가 되었던 외교부를 필두로 한 각 정부 부처의 회의비라는 것이 있다. 그들이 뭘 먹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정작 높은 사무관 이상 말고서라도 당신의 이웃, 당신의 딸, 친구들이 있는 그 하급직 공무원들이 팀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하러 가서 공인된 카드로 식사비를 결제한다.

그들이 자신의 돈으로 먹는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것을 먹을 것 같은가? 그들이 같이 그 카드로 결제하고 먹는 고급 와인이 첨부된 스테이크와 이름 모를 이탈리안 프랑스 요리들에는 그들의 양심이 같이 요리되어 그들이 모두 먹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상사가 더 큰 금액을 밖에서 접대를 하든 사용하고 다닌 후 영수증 처리를 해달라고 했을 때,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미 이익을 같이 공유하여 그 콩고물을 쳐드셨기 때문이다.


법비들이 가장 먼저 같은 편을 만들기 위해 하는 방법은 함께 해 먹는 것이다. 공범이 되면 그 어느 누구도 양심을 빙자하며 다른 누군가를 찌를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이 질펀하게 퍼 마시고 별짓 다하고 놀았는데, 나중에 혼자 고고하게 굴 수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학습에 의한 오래된 경험에서 나온 필살기이다.


같은 사회 구성원인 당신이 결코 동조하지 않는데 어느 한쪽에서 자생(自生)하는 불의(不義)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것 아닌 것을 탐해 얻은 것은 결국 네 것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