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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1. 2022

당신은 왜 당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가?

미래를 읽는 공부를 하는 이유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 장의 내용은 공자가 만년에 이르러 비로소 〈역경(易經)〉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여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었다고 하는 고사성어, 이른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근거가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두 가지 방면에서 이 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좀 많은 편이다. 먼저, 주자의 주석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글자에 틀린 부분이 있어 그 부분부터 명확하게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유빙군(劉騁君)이 “元城 劉忠定公을 뵈었는데, 말하기를 ‘일찍이 다른 本의 <論語>를 읽어보니, 加는 假로 되어 있고 五十은 卒로 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加와 假는 음이 서로 가까워 잘못 읽은 것이고, 卒과 五十은 글자가 서로 비슷하여 잘못 나뉘어진 것인 듯하다.”하였다.

 

유빙군(劉騁君)은 이전에 공부하면서 장인에 해당하는 ‘빙부(聘父)’라는 말을 만들어낸 주자의 첫 스승이자, 장인이던 인물을 가리킨다. 내용인즉, 원문의 글자가 잘못 표기된 것이 두 군데나 있어 그것의 원래 글자를 다시 교정했다는 내용이다. 처음 스승이던 장인의 의견을 앞에 달고 나중에 자신이 <사기(史記)>와 비교하며 크로스체크를 해보아도 원문의 50세라는 것은 잘못 표기되었음을 고증한다. 


이 글의 내용을 말했을 당시 공자의 나이가 이미 칠순이 넘었기 때문에 더더욱 50이라는 나이 언급은 오기(誤記)라는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논어(論語)> 해설서에 이 내용을 그대로 활용하며 공자가 51세부터 <논어(論語)>를 공부했네 어쩌고 들어가는 이들의 설명은 모두 제대로 주석의 사실관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들이대는 방식의 혹세무민(惑世誣民) 수준의 글들이니 참고하여 걸러내기 바란다.

 

한편, 첫 번째 고증의 문제는 두 번째의 논란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 내용이 위작으로 공자의 말씀이 아닌 부분이 슬쩍 편집되어 들어갔다는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공자 사후에 증삼(曾參)이 추가한 부분이 아닌, 전한(前漢) 시대의 학자이자, 공자의 11대 손(孫)이던 공안국(孔安國)이 <논어(論語)>를 해석하면서 임의로 추가한 부분이라고 보며 ‘위작(僞作)’이라는 살벌한 용어까지 쓰며 비판하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비판은 공자가 <주역>을 공부했을 리가 없다는 비판까지 가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는 거기까지 나가 동조하지는 않고 다음과 같이 해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주역>을 배우면 吉凶과 消長의 이치, 進退와 存亡의 도에 밝아진다. 그러므로 큰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인이 주역의 무궁함을 깊이 관찰하시고,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을 가르치신 것은 하여금 그것을 배우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하시고 또한 쉽게 배울 수 없음을 알게 하신 것이다.

 

공자는 73세에 생을 마치는데, 이 장의 언급대로라면 말년에 <역(易)>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너무 늦게 <역(易)>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왜 <역(易)>을 중요시했는지에 대한 강조점을 행간에 넣고 있다. 

위의 주석에서 주자가 읽어낸 그 행간의 내용에 따르면 <역(易)>이 갖는 특징과 그것을 성인, 공자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길흉화복을 미리 알 수 있는 공부를 통해, 얻게 되는 결론, ‘큰 허물이 없게 한다.’에 이 주석의 방점이 있다. 즉,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나, 이익을 찾기 위한 것으로 활용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발견할 수 있는, 혹은 그것을 미연에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반드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과 그것을 배우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점도 유의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서 공부했던 내용에서 누차 확인했던 것처럼, 공자가 도통(道統)으로 인정하고 따르고자 했던 인물은 바로 ‘주공(周公)’이었다. 주공은 주(周) 왕조를 개창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이름은 단(旦)이며 무왕이 일찍 죽자 주변에서 어린 조카를 대신해서 왕으로 등극하기를 간청하였지만, 끝내 임금의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오히려 주공은 조카 성왕(成王)을 보필하여 태평성대의 바탕을 닦았으며, 아버지 문왕이 지은 괘사를 연구하여 총 384효의 해설인 효사(爻辭)를 지었다. 그러니 공자가 주역을 자신이 공부해야 할, 혹은 이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제대로 정리할 책으로 보고 탐구했던 것은 몇 살부터였는지와는 별론으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공부했던 내용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고 결국 말년에는 위정자를 통해 직접적인 정치를 펴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도를 펼쳤는데 세상에 행하여지지 않자 돌아와 시경과 서경을 정리하고, 예악을 정하고 춘추를 엮었다”라고 한다. 그렇게 <주역>의 체계는 공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렇게 〈역경(易經)〉을 정리하려고 공부를 시작하고서는 공자는 경탄에 마지않게 된다. 그리고 ‘성인께서 지은 글은 천지 이치에 맞는 글인데 어찌 내가 감히 손을 댈 수 있겠는가, 다만 후세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해설 정도만 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 창작은 하지 못하고 다만 서술만 할 뿐’이라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이 장의 술이편인 것과 이 내용이 왜 이 편에 실려있는지를 이어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내용이 종이가 없던 당시는 대나무를 반으로 잘라 가죽끈으로 엮어서 대나무 겉면에다 글자를 썼는데 이를 ‘죽간(竹簡)’이라 한다. 얼마나 공자가 손에서 〈역경(易經)〉을 놓지 않고 공부하였는지, ‘위편삼절(韋編三絶; 질긴 쇠가죽(韋)으로 대나무를 엮은(編) 죽간이 세 번(三)이나 끊어졌다(絶))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공자가 힘써 정리한 〈역경(易經)〉이 ‘대전(大傳)’ 혹은 ‘십익(十翼)’이라 부르는 〈역경(易經)〉의 해설서이다. ‘십익(十翼)’은 <주역>을 이해하기 쉽도록 10개(十)의 날개(翼)를 달아 놓았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성인의 글은 ‘경(經)’이라 이름 붙이고, 현인의 글은 ‘전(傳)’이라 하여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 일컫는다.

 

<주역>을 〈역경(易經)〉이라 하고 공자의 해설서를 ‘대전(大傳)’이라 부르는 것만 보더라도, 〈역경(易經)〉이 갖는 비중이나 공자 및 다른 학자들이 어떤 위치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공자는 사후에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예견하여 <주역>을 점서(占書) 형식으로 꾸며놓으면서 곳곳에 비결(祕訣)을 감추어 놓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주역>에는 문왕과 주공이 괘사와 효사에 천기(天機)를 숨겨 놓은 비사체(秘辭體)와 공자가 미래지사(未來之事)를 감추어 놓은 비전체(秘傳體)가 있다고 전한다.

 

해가 바뀌고, 설을 앞두고 토정비결이나 사주를 알고 싶어 찾는 이들이 많다. 그 흔한 인터넷 사주팔자와 토정비결에서부터 광고를 해대는 무당을 직접 찾아가는 것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운명과 팔자를 알고 싶다며 그것을 말해줄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거기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을 돈 받고 말해주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의 말이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그 말이 틀리라고 해서 환불을 받거나 그의 정중한 사과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맞으면 좋은 것이고 틀리면 틀린 대로 그만이라는 식이다.


내가 아침마다 논어를 함께 읽고 공부하며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것은, 공부를 하는 것이지, 정체를 모를 자에게 가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원리를 모르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묻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주식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끊임없이 정보를 업데이트하여 그 공부를 적용해나간다면, 굳이 묻지 마 정보에 기대거나 자신이 알 수 없는 내부 정보이니 세력에 묻어갈 수 있다며 이상한 명목으로 돈을 그들이 시킨 대로 처박은 후 손해 봤다고 울고불고하지 않을 것인 이치와 같다. 


당신이 처음부터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과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여 당신의 기준이 올바르게 서 있다면 그것이 주식이 되었든, 학술분야의 정보가 되었든, 심지어 운명이 되었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부하는 이유라고 이미 수백 수천번 강조하였다. 귀를 열고 제발 좀 들어먹었으면 좋겠다, 이젠.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운명과 팔자를 당신이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알고 싶어 하는지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행간을 통해 강조한 이 공부의 목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미래가, 그리고 지금 풀리지 않는 당신의 이 기구하며 복잡하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실패의 나락이 오죽 답답하면 당신도 그런 점쟁이를 찾아가겠는가 딱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운명과 팔자, 그리고 <주역> 공부는 그런 것을 위함이 아니라고 공자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그것에 대해 광범위하고 정치한 해설서까지 쓴 분의 가르침에 의하면 운명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내가 큰 허물이 없게 하고자 한다는 목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겜블링(도박)을 할 때, 돈을 따기 위함과 크게 잃지 않기 위함은 목적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어이가 없다고 당신이 물을 수 있다. 돈을 따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하러 겜블링(도박)을 하느냐고. 좋은 질문이다. 겜블링(도박)은 안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겜블링(도박)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이라면 어떠한가? 인생은 안 하고 싶어 하는 순간 삶을 끝내야 한다는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된다. 물론 인생이 도박은 아니지만,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으며, 그 결과를 노력한 대로 받는 것도 아니기에 구조적인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리고 수학적인 면에서 확률과 통계를 매 상황과 케이스에 맞게 계산을 하고 변수 매개까지 계산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너무도 닮아 있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큰 허물이 없게 하기 위해 <주역>을 공부한다는 것은 큰돈을 얻는다던가 언제쯤 내 힘겨움이 끝나고 잭팟이 터질 것인가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잭팟이 언제 터지는 지를 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쏟아진 잭팟을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그 행운이 불행으로 변해 당신을 집어삼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몸을 삼가는 방식을 연구하고 수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삼가야 할 것을 공부하고 수양하는데 참고를 삼기 위한 공부이지, 내가 부자가 되는 터닝포인트나 귀인(貴人)이 언제쯤 오니 그 사람을 묻고 따지지도 않고 물고 늘어지라는 안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이 걷고 있는, 아니 어쩌면 헤매고 있는 길고 긴 터널 속의 어둠 같은 실패가, 고통이, 그 두려움이 당신의 걸음을 붙잡고 언제쯤 어디에서 빛이 보일지 답답하고 속상하고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어둡다고 온 길을 돌아갈 수 있는 인생은 없다. 당신은 또 묵묵히 그 앞을 걸어 나가되, 그 어둠에서 돌부리에 차여 넘어지거나 발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되 마음이 급하고 빛을 찾는다고 달려 나가다가는 또 더 크게 넘어지고 다쳐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어둡고 컴컴해서 당신이 예견할 수 없는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한 공부가 바로 이 공부라고 공자는 강조한다.

 

밝아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혹은 차에 올라 다른 사람들을 젖히고 쓩쓩 나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할 때는 더욱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언제 당신의 앞에 큰 트럭이 멈춰 서서 당신을 자동차와 함께 저 먼 세상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당히 속도를 조절해야 하고, 주변의 길을 봐야 하고, 행여 막히고 아직 완공되지 않는 고가도로로 들어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멀리 볼 줄 알아야 하고 늘 확인하고 검증하는 조심스러움을 겸비해야 한다. 그것이 <주역>을 공부한 자의 태도이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공자가 부러 말년에 그 어려운 경전을 쥐고 그렇게 자세하고 두껍고, 세상에 함부로 혹세무민 하는데 활용되지 말라고 진의를 드러내 놓고 알려주지 않는 해설서를 정리하고 집필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곧 진정한 의미의 임인년(壬寅年)을 맞는다. 

당신이 <논어>도 원문으로 제대로 읽지 못하는데, <주역>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엽등(躐等)을 시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시도한다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공부를 왜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촘촘하고 수백수천 번을 읽은 성인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장에서와 같은 말을 했는지 당신이 오늘 다시 한번 되새기며 당신의 언행을 그리고 당신의 세상을 사는 마음가짐을 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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