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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2. 2022

우리는 왜 고전(古典)을 공부하는가?

이제는 제대로 글을 읽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공자께서 평소 말씀하신 것은, 『詩』과 『書』 및 禮를 지키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평소에 늘 하시는 말씀이셨다.

이 장은 바로 앞에서 『주역(周易)』의 해설서를 낸 공자의 이야기에 이른 고전에 대한 공자의 평소 생각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시경(詩經)』은 공자가 실제로 방대한 민요와 궁중음악을 수집하여 편집한 책으로 ‘인간이 지닌 성정(性情)을 다스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시경(詩經)』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思無邪]”라고 단언한 바 있다. 시는 감성과 정서를 풍부하게 하여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착한 본성을 감발시키고 감성을 순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진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본문에서 ‘아언(雅言)’이라고 한 것을 공영달(孔穎達)은 ‘아름다운 말’이라고 주석했지만, 공자의 시대에 ‘아언(雅言)’은 평상시에 사용했던 말, 즉 사람들의 말을 의미한다.

『서경(書經)』은 공자가 은과 주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역대 위정자가 행한 정사(政事)에 대한 기록이다. 공자의 역사인식은 확고했다. 인간이 지나온 역사에 대해 알아야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벌어진 일이나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의 일과 비교하고 그 기준을 삼아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앞으로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하는 도구이자 잣대이다.

 

예(禮)에 대해서는 따로 고전서를 언급하지 않고 집례(執禮)라는 설명으로 예의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예(禮)는 인간 사회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고도화된 문화표현인 동시에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체계에 다름 아니다. 책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주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해설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詩』로써 情性을 다스리고 『書』로써 政事를 말하고, 禮로써 節文을 삼가니, 모두 일상생활의 실제에 절실하다. 그러므로 항상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禮에 있어서만 유독 지킨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잡아서 지켜야 할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한갓 외우고 말할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경(詩經)』이 개인 스스로의 마음과 성정을 다스리는 데 사용되고, 『서경(書經)』은 정치에 적용할 수 있으며 禮로써 지나칠 수 있는 부분들을 삼가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이 모든 고전과 고전에 대한 정신을 일상생활의 실제에서 사용하는 것이 절실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禮에 있어서만 유독 지킨다고 말한 것에 대해, 배우는 자가 직접 행해야 하고, 한갓 외우고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한다.

 

이 해설은, 공자가 경전이라고 해당하는 고전에 대해 왜 그렇게 공부를 했는지 그 공부의 내용을 해설서까지 만들고, 굳이 왜 중국 전역에 퍼져있던 민요와 궁중음악을 수집하여 편찬했는지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해주고 있다.


요즘은 그나마도 읽지 않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잊힐만하면 ‘서울대 선정 고전’이라던가 ‘반드시 읽어야만 할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전 읽기를 강조하던 트렌드가 있었다. 고전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고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문학예술작품.’이라고 한다. 고전이 좋은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정작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 이를 보기에 어렵다. 지하철을 타면, 모두 스마트폰에 시선을 꽂고 있다. 웹툰을 보고,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보지, 책을 보거나 스마트폰 안에 있는 고전을 읽는 이를 본 일이 없다. 왜일까?


고전을 읽겠다고 추천해달라는 이들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추천을 해주고 나중에 읽었는지를 물어보면 정작 읽었다고 하는 이들을 찾기가 어렵다. 재미가 없고 조금 읽으려고 하면 잠이 쏟아질 정도란다. 판타지 웹툰은 눈이 빨개질 때까지 읽으면서 단테의 <신곡>은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덮인단다.


그럴 수 있다. 아니, 그게 맞다. 왜냐하면 고전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고전을 읽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일 5킬로미터를 조깅하는 사람에게 1000미터 달리기 체력검사는 큰 부담이 없지만, 매일 차를 타고 하루에 만보는 고사하고 100 보도 채 걷지 않는 사람에게 1000미터 달리기는 뛰다가 200미터도 채 못 뛰고 헥헥거리며 다리가 풀려 쓰러져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고전을 읽는 것보다 미리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왜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그것이 자신에게 절실하다고 느끼지 않는 이에게 백날 그 중요성을 이야기해봐야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의 공자의 가르침과 평생의 공부는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 위해 바른 성정을 유지하고, 과거를 공부하여 제대로 된 정치를 해나가기 위해,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오버하고 지나친 참람된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조절하고 발전해나가기 위한 실질적인 공부가 바로 고전이라고 말해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SNS를 보면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바디 프로필이라는 것을 찍는 것이 많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쁘고 연예인이 아닌 아줌마나 심지어 할머니에 해당하는 이들도 자신의 몸을 만들어 과감하게 옷을 벗고 자신이 만든 몸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당당히 자랑하는 것이다.

권장할만한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같잖은 맛집의 요리나 비싼 호텔에 가서 남기는 사진보다는 조금 나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종의 인증샷인 셈이기 때문이다. 매일 즐겁지는 않았지만, 힘겨운 무게를 들었고, 자신의 체중을 느끼며 매달렸고, 더 먹고 싶고, 살찌고 불량스럽지만 입에는 더없이 달콤한 것들의 유혹을 짧지 않은 시간 참아가며 자신을 단련한 결과를 스스로에게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트렌드를 보며, 조금은 쓴 입맛을 다셨었다. 몸을 단련하는 만큼 그들이 과연 보이지 않는 머릿속은 왜 단련하지 않는지가 아이러니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힘들고 근육통이 생기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지만, 어느 정도 단계를 지나게 되면 오히려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평상시보다 훨씬 더 덜 피로하고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힘도 훨씬 더 길러진 것을 알 수 있다.


짐에 가기가 싫고 풀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그렇지 열심히 운동하고 땀을 빼고 샤워를 하고 나올 때의 그 기분은 마약같이 중독이 되어, 어느 순간, 운동을 빼먹으면 몸이 영 찌뿌두둥하여 견디기 어려운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전 읽기는 운동과 많이 다를 것 같은가?

아니다. 똑같다. 처음에는 읽었는데 영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고, 한 페이지 넘기기 전에 눈꺼풀이 무거워 수면제보다 더 강한 기운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몇 페이지 넘어가고 모르는 내용에 대해 찾아보고 그 재미를 느껴가는 사이에 조금씩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 느껴지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며, 무엇을 일깨워주려고 했는지를 공감하게 되면서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당신이 매일 아침 이 <논어>를 읽고 공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고전을 읽다가 흔히 말하는 킬링타임용 소설이나 맞춤법도 제대로 교정 보지 않은 잡글을 읽게 되면 당신은 느낀다. ‘도저히 이건 읽을 게 못된다.’ 혹은 ‘이게 왜 이렇게 거슬리는 부분들이 많지?’라고.


고전 읽기가 체득된 사람은 글 또한 함부로 쓰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읽어온 것이 있는데 허접하기 그지없는 글을 함부로 쓰는 것이 얼마나 엉성한 짓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에도 한번 공부하면서 비유했지만, 기한이 지난 냉동 도시락을 먹으며 연명했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고급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를 먹는 것을 할 수 있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기한이 지난 냉동 도시락을 먹으라고 하면 못 먹게 된다. 사람의 입맛도 그리 간사하기 그지없는데,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뇌가, 머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번 대강 본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것이 몸에 배어야 한다. 일주일이나 한 달 나가서 운동한다고 당신의 처진 배에 식스팩은 고사하고 홍해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직업적 특성상 평소 비슷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분위기가 가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문화충격에 가까운 괴리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뭐 뉴스를 보면서 광화문에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군복을 입고 설치는 정신 나간 사람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들의 배경이 읽히기 때문에 그럴만하다고 마음의 준비(?)라고 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멀쩡히 상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겠지 싶은데 전혀 다른 말을 하거나 다른 세계의 언어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경우를 보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최근에 그런 경험은 브런치에서 가장 많이 한다. 이상한 글을 쓰거나 헛소리를 풀어놓는 경우는 뭐 워낙 많기 때문에 놀랄 것까지는 없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쓴 글을 오독하고 오해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준만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볼 때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머리에 예쁜 머리띠를 한 소녀에게 ‘오늘 머리띠가 예쁘구나!’라고 칭찬의 말을 던졌을 때, 그 소녀가 화를 내며 ‘지금 내 얼굴이 예쁘지 않다고 머리띠만 칭찬하는 거예요?’라고 발톱을 세우게 되면 칭찬의 말을 던졌던 사람은 단순히 뻘쭘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게 된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과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소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소녀가 정말로 멀쩡한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였는데 칭찬의 말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오해한다면, 어려운 말도 아니고 해석이 필요한 외국어도 아닌데, 그 말을 다시 설명해줄 수도 없고, 칭찬한 사람은 난감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칭찬은 고사하고 그 소녀와 다시 마주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 소녀가 나중에 화를 내면서 ‘만약에 칭찬이었다면 그냥 칭찬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주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해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어요?’라고 따지기까지 하는 상황이라면 이제 당황하는 것을 넘어 경악하게 된다. 과연 그 소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어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예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최근 브런치에서 나는 이런 상황을 수차례 목도하고 경험했다. 즉,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소녀들이 우리 도처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누군가가 더 잘났고, 프로이고 아마츄어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이념의 문제라면 그것은 중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단순한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약간의 행간조차도 읽지 못해서 발생하는 오해는 결국 소통의 부재를 불러오게 만든다.


브런치에 한 편의 글에, 200자 원고지 10장도 채 안 되는 글이 70%가 넘는다. 짧은 글이 안 좋고 긴 글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없는 비문 덩어리를 길이까지 길게 싸놓은 것처럼 난감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긴 글을 읽고 싶어 하지 않고, 어려운 글은 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저 훅하고 읽고 마는 글을 편안해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생을 우리는 공부한다. 학자가 되기 위함도 아니고 전문 글쟁이가 되기 위함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의무이고 욕망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돈은 더 벌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사는 것을 보면서 이유 없이 적대감을 불태우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공부하고 더 생각하고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은 어려우니 하기 싫어한다.


세상에 그것만큼 모순된 욕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운동하고 싶지 않지만, 날씬하고 탄탄한 근육을 갖고 싶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싶진 않지만 많은 것들을 알고 싶다는 궤변은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유치원 꼬마에게 물어봐도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고 힘들다. 아니, 심화되면 또 심화되니까 더 어려워진다. 어려운 것을 더 찾는 변태라서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계속해서 초심자 모드로 1편만 하라고 하면 당신은 재미있다고 하겠는가? 당신이 숙련자 모드로 최종 보스까지 어렵게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공자와 다른 배우는 자들은 고전을 즐겁게 익혀나갔을 뿐이다.


당신만 아직 그 즐거움을 모르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혼자 삽질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마냥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우리도 다 그래. 괜찮아.’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며 자위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결국 당신은 그거 거기 정체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삶에, 안락한(?)‘정체’당신도 잘 알다시피, ‘퇴보’라고 쓰고, ‘낙오’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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