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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3. 2022

당신은 자신을 한 문장으로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공자의 열여섯자 짜리 자기 소개서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섭공(葉公)이 자로(子路)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子路)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너는 어찌 그의 사람됨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이치를 깨달으면) 즐거워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 장에는 또 새로운 인물이 나왔다. 먼저 그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섭공(葉公)’은 ‘섭윤(葉尹)’이라고도 불렸던 자로, 자는 자고(子高)이고, 심윤술(沈尹戌)의 아들, 심제량(沈諸梁)이라는 인물이다. 대부(大夫)로 섭(葉)에 봉해졌는데, 초혜왕(楚惠王) 10년, 영윤(令尹) 자서(子西)에게 백공승(伯公勝)을 귀국시키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뒤 백공승이 난을 일으켜 자서를 살해하고 혜왕을 위협했다. 이에 초나라에 구원을 청해 백공승을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킨 뒤 영윤과 사마(司馬) 직을 겸한 인물이다. 주자의 주석을 보면, ‘공(公)’이라는 호칭은 쓸 수 없는 처지임에도 참람되이 썼다고 비판하여 그의 사람됨이 존경을 받은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섭공(葉公)이 자로(子路)에게 스승 공자의 인물됨이 어떠냐고 묻는다. 묻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만약 소문대로 대단한 인물이라면, 얼른 그를 모셔와 자문(諮問)으로 삼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葉公이 공자를 알지 못했으니, 반드시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로(子路)가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또한 성인의 덕이 실로 쉽게 형용하여 말하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주자는 이 해설을 통해, 왜 자로(子路)가 스승에 대해 물었던 질문에 대해 선뜻 답하지 않은 것인지를 두 가지로 유추하고 있다. 첫 번째는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물었기 때문에 불쾌하여 대답을 거부하여 했을 것이라는 가정과 두 번째, 성인인 스승의 덕이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굳이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후자보다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인데, 다른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어 보인다. 예컨대, 자로(子路)는 고지식하여 스승이 남자(南子)와의 만남을 가진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드러냈을 정도였으니, 섭공(葉公)의 빤한 속이 보이는 정도였다면, 자기 선에서 선을 긋고 잘라버렸을 확률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장의 핵심은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된 공자가 자신에 대한 소개를 직접 한 문장, 열여섯글자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저 유명한 ‘발분망식(發憤忘食)’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한 문장이기도 하다.

먼저 주자가 배우는 자들을 위해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고, 이미 터득하면 즐거워 근심을 잊는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힘써 날마다 꾸준히 힘쓰면서 연수(年數)가 부족함도 알지 못하니, 이는 다만 학문을 좋아함이 독실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깊이 음미해보면, 그 전체가 지극하여 순수함이 그침이 없는 妙가 성인(聖人)이 아니면 미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夫子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은 대체로 이와 같으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생각을 다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공자의 이 열여섯자는, ‘호학(好學)’, 즉 배우는 것을 즐거워했던 공자의 가르침이자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분발한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가?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결과를 낫게 되면 분해서 그것을 배우고 익혀 잘하게 될 때까지 밥을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빠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치를 깨치게 되면 인간으로서 가장 걱정이라고 하는 늙음이 다가오는 것조차 잊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는 한 문장이다. 위정자에게 발탁되어 자신을 쓰라고 하는 마케팅의 요소라고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을 잘한다고 써있지도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고 있지도 않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 소개라는 것도 어쩌면 유치한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못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 문장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상당히 많은 생각할 거리와 반성할 거리를 던져주는 복합다각적인 문장이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는가?

누구나 잘 안되는 것이 있을 때 화를 내고 분노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화내고 짜증내고 그것을 그만둔다. 그것이 성인 공자와 일반인의 차이였다.


잘 안되는 것, 잘 못하는 것에 화를 내고 포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임에도 공자는 그것을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방법을 모색하고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먹는 것을 잊고 몰두하여 그것을 끝내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에 있어서 그러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공자는 그것이 삶에 대한 자세였다.

 

공자는 칠십이 넘는 평생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세상에 쓰임을 얻지 못한 것이다. 당시 은자(隱者)라고 은둔한 이들은 제자들을 키우고 위정자들에게 쓴소리를 하고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를 비아냥거리며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도 그 희망을 꺾지 않고 덤비는 무모한 사람’이라고 비판했었다.


공자역시 그들의 비난과 자신에 대한 의혹과 폄하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공자는 그러한 말에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았다. 한 명의 제자라도 더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죽는 그날까지 그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짐승과 더불어 살 것이 아니라면 결국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사람을 바꾸지 않고서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눈치챘는가? 위 해설에서 주자가 말한 단순히 어느 한 가지 잘 못하는 것을 하지 못해 분개하고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잘할 때까지 그것에 열중했다는 기본적인 수준이 아닌, 세상이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죽는 그 날까지 바로 잡아보겠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또 기울였기에, 주자가 위 주석에서 성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묘(妙)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 달쯤 전에 ‘브런치의 작가라고 하는 이들의 민낯’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 편 올렸었다.

https://brunch.co.kr/@ahura/589


참 많은 분들이 공감의 의견을 주셨고,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자세와 태도를 바꾸겠다는 사람부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응원한다는 사람까지 다양하게 공감의 의견을 전달해주셨다.


불합리한 일처리를 하는 공무원을 보거나 뻔뻔하게 그것이 관례라면서 사건을 덮어버리는 경찰이나 검사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한다. 혹은 뭐 그렇게 대단한 금액이 걸린 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쏟아부으면서 스트레스를 받느냐며 접고 만다.


그런데 그건 아는가?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포기하기 때문에 그것을 귀신같이 아는 그 똑같은 자리의 반대쪽에 앉아 있는 자들이 버젓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태를 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종국에 이 곪아터진 사회는 안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모두 남녀노소 투사가 되어 불의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로 그렇게 해서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놈의 현실성을 핑계로 또 사람들은 한풀 접는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로잡겠다고 싸울 수 있는지 대단하다며 디스인지 모를 응원을 하는 분들도 있긴 있었다. 아마도 솔직한 자신의 감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번, 눈에 보이는 불합리와 불의에 대해 지적하고 바로잡겠다고 힘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신기해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저 남의 일일 때는 그렇게 넘어가겠지만, 그것이 당신의 일이고, 당신의 가족이나 당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부유하진 않았지만, 단란하게 살았던 가정에서 갑자기 제주도로 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배에 갇혀 생떼같은 목숨을 잃었다.

자기 자식이 눈앞에서 물에 잠겨 물귀신이 되는 것을 보면서 제정신일 부모는 없다. 아마도 그들 모두는 단 한번도 불합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이건 아니지 않냐고 시정해달라는 투쟁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내 아이의 목숨을 졸지에 빼앗기고 나니 눈이 뒤집히고 정부가 뭘 했는지, 왜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이 죽었는지, 그리고 선장이란 놈은 자기만 가장 먼저 살겠다고 기어나오면서 아이들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방송을 계속했는지 의문을 품고 한을 풀겠다고 투쟁이라는 것을 했더랬다.


그들이 그런 황망한 일을 당하지 않고서 과연 그런 목소리를 내고 분해서 잠을 못 자고 도저히 분해서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고 목에서 피를 토하며 절규했을까? 왜 자신이 그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고나서야 그것을 깨닫는 것일까?

문제는 해경도, 먼저 살겠다고 나온 선장도, 그 시간에 뭘 하느라 밖으로 나와 진두지휘를 하지 않았는지 모를 그 대통령도 모두가 자기 집에 가서는, 자기 가족에게는, 자기가 챙겨야할 사람에게는 너무도 친절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가 죽어라 패고 범인을 만들고, 멀쩡한 사람을 기소해서 몇 년이나 감옥에 쳐넣고, 나중에 재심으로 무죄가 밝혀져도 자신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했던 자들이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곁에서 함께 웃으며 밥 먹고 술마시는 이들이라는 말이다.


불의는 악마나 괴물들이 저지르거나 제도적으로 프레임이 짜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공조하는 자들이 있고 그것이 불의인줄은 알지만 눈감는 자가 있고, 자신의 이익이 된다고 선뜻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있기에 끊이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괴로웠을까?

그는 제대로 성공하여 자신의 뜻을 펼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매번 조금 해볼만한 싶다가도 현실적인 이유로 혹은 여러 다른 이유로 접고 또 접어야만 했다. 그렇게 매번 실패와 고난을 되풀이하면서도 공자가 칠순이 넘도록 포기했던가? 아니, 그는 끊임없이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았고, 미래를 찾으려 들었다.

그리고 그 썩은 사회의 원흉도 인간이었지만, 결국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것도 인간임을 알았기에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눈물겹게 애썼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에게 삶의 목적이 없어지는 것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그는 살아갔고, 노력했다.

 

실패할 때마다 그는 끊임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묻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신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잘 안되더라도 당신의 목소리가 가 닿지 않더라도, 그것이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말도 안되는 상황임에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접어버리지는 않았던가?


공자는 그렇게 스스로 답을 찾는 노력을 결코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의 출발은, 자신이 서툴고 잘 못하는 것을 배우는 단순한 호학(好學)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호학(好學)은 단순한 지적호기심과 이기적인 지식 욕구를 넘어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는 그 노력을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인데 왜 아프지 않았을 것이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왜 아니 들었겠는가?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되지도 않을 것이라며 손사레를 치던 일에 매진했다.

문제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아주 근본적인 생각에서부터 그러해왔다. 그랬기에 열여섯자의 자기 소개서에 담담하게 담았지만, 그의 칠십이 넘는 인생을 알고 있는 수천년 후의 후학들에게는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생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부조리한 것을 보면 분하고, 잘못된 것을 보면 분개하는,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될 때까지 노력의 끈을 놓지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직도 당신에게는 전혀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 <논어>공부는 그만두라고 권하마. 책에 나오는 그럴싸한 문구들을 읽고 입으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떠벌이며 뭔가 있어보이는데 사용하라고 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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