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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4. 2022

당신이 존경하는 성인의 대답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당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죽비를 내려치는 것이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

이 장에서 언급되는 ‘生而知之(나면서부터 알다)’라는 단어는, 한참 뒤에 공부하게 될 ‘계씨편(季氏篇)’의 9장에서, 배우는 자의 등급을 네 단계로 나누면서, 가장 상위에 속하는, 이른바 성인의 단계로 언급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말을 공자가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히 자신이 그런 성인의 등급이라고 자부하는 오만함을 보였을 리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저, 극단적인 사례로 선대의 성인을 올려서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란 의미이다.


그 근거로 이 장에서 공자는 스스로 자신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저 옛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한 자일뿐이라고 설명한다.


이제까지 나온 거의 대부분의 <논어> 해설서에서 이 장을, 공자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겸손을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맞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겸손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더 큰 의도가 이 발화(發話)에는 숨겨져 있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면서부터 안다는 것은 기질이 청명(淸明)하고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나, 배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아는 것이다. 敏은 빠른 것이니, 급급히 함을 말한다.

 

도대체 나면서부터 안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그 의문에 대해 주자는 다시 설명해준다. ‘배우기를 기다리지 않고 저절로 아는 자’. 요 며칠째 계속해서 공자의 호학(好學)에 대해 공부한 이들이라면 ‘배우지 않고서 알게 된다.’는 단어에서, 이미 그 개념이 공자와 정반대의 저 맨 끝에 속해 있는 개념임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방점은 뒤의 문장에 있다. 공자가 지난 장에서 열여섯 자로 자신을 표현한 것에 이어진 바로 자신에 어떤 단계인지에 대해서 설명한 그 문장, 되시겠다.

‘옛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한 자’.

고문에서, 특히, 공자가 말하는 ‘옛것’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상대적 시간을 의미하는 ‘옛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부터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여겨진 성인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긴 다산(茶山; 정약용)은 자신의 직접 미리 지은 자신의 묘지명에 자신을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옛것을 좋아했노라(樂善好古)”라고 써서 공자에 가까워지고 싶어 했던 자신의 욕심을 살짝 드러내기도 했다. 북학파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법고창신(法古創新)’ 역시 같은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한 옛것을 좋아한다는 설명으로 공자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배우는 바에 대해 전제한 후에, 더 중요한 핵심, 그것을 급해서 그것을 구한 자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위에 주자의 해석에서처럼 빠른 모양이라고 설명한 그 급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 번째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 여겨 재빨리 먼저 그것을 취하고 싶어서 그랬다는 의미와, 두 번째는, 자신이 부족하고 노둔(老鈍)하여 그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가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윤씨(尹燉)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성인으로서 매양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말씀한 것은 단지 사람들을 권면시키려고 해서일뿐만 아니라, 나면서부터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은 의리일 뿐이요, 예악과 물건에 대한 명칭과 고금의 변하는 것으로 말하면, 역시 그 실제를 징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향이 조금 다른 해석이긴 하지만, 결국 이 해석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악과 물건에 대한 명칭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달라지고 변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현실적인 부분을 설명한 것일 뿐이다.

자아,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공자가 뜬금없이, ‘자신은 나면서부터 아는 자(聖人)’가 아니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 누군가 물었던 것이다. 그런 분이 아니냐고 확인하는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논어> 해설서에서 단순히 스스로를 낮춰 겸손하게 대답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대해 내가 동의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누가 물었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대개 <논어>에서는 위정자가 물었을 경우에는 아무리 단순한 질문이라도 위정자의 실명과 상황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이 대답은 제자의 질문에 대한 스승의 대답이다. 공자가 그저 단순히 제자들에게 겸손하게 대답한 것을 <논어>에 실을 이유가 있나? 이 장을 편집한 자들의 지적 수준을 너무 폄하한 해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공자의 대답만 실렸을 경우는, 제자들과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행간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이제 그대들도 눈치챌 때가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공자는 어떤 메시지를 제자들과 배우는 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였을까? 공자의 지식이 너무도 해박하고, 또 그 많은 지식을 하나로 꿰뚫어 너무나 밝은 이치를 드러냈기 때문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경지에 오른 스승에게 ‘스승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아시는 최상위 레벨의 성인이시군요.’라고 물었을 때, 같잖아서 그냥 대답하지 않고 웃고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알고 태어난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굳이 이와 같은 대답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라는 최상위 등급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바로 공자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이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최상위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위해 그 경지가 아니냐고 질문을 받는 자신조차도 공부한다고 말한다면 말귀를 알아듣는 제자라면 경탄하고 고개를 숙여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분석해보자.

질문했던 제자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공부를 많이 하고 수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질문에 대해 답할 때,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전에 질문을 한 사람의 의도를 먼저 읽는다. 질문에 대한 정답이랄 것도 있겠으나, 그것이 질문한 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질문한 사람이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뭘 알고서 질문한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읽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배운 자의 대답하기 전 취해야 할 자세이다.


그래서 공자의 답변은 같은 질문에도 늘 다양한 질문자에 맞는 답변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스승님은 너무 대단하십니다, 성인 아니십니까?)을 공자가 평생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러한 상황만 감안하더라도, 공자는 결코 겸양의 의미로 대답한 것이 아니다.

질문을 한 이가, 노력도 해보지 않고 막연히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발분망식(發憤忘食)하는 자세로 이룬 그 단계와 경지를, 자신은 결코 오를 수 없는 경지라며, 선을 긋고 경탄하며 말하는 것에 대해 죽비를 든 것이다.


그런 안일한 자세로 지금 서 있는 자세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레 무조건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단정 짓는 행위를 하는 제자에게 죽비를 내려치는 대답에 다름 아니란 말이다.

 

공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본의 아니게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으면서 공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100명이 넘는 강의를 들어가서 2회 차가 넘으면서부터 출석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이름을 부른다던가, 외국대학에 강의를 들어가면서 외국 학생들의 이름과 고향, 혹은 그 학생이 작성한 논문의 특징들을 말해주는 따위의 행동을 보이면, 대개의 동료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공자의 제자 같은 우문(愚問)을 하곤 한다.


“어떻게 그 얼굴과 이름을 모두 매칭 해서 다 외우세요? 천재세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하긴, 얼마 전, 구밀복검(口蜜腹劍)하는 자세로 브런치 생활을 하는 어떤 여인이 비슷한 질문을 하긴 했었다. 어떻게 댓글을 다는 여성(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동성의 라이벌 여성들이었기 때문에)들이 쓴 글의 내용에 나오는 특징적인 것들이나 그 집 아이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느냐고.

그런 류의 우문(愚問)에 답하기 전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영어단어를 어떻게 외웠나? 태어나서부터 알게 되었나? 화학식을 어떻게 외워서 시험을 보았나? 수학공식은 엄마 뱃속에서 외워서 뇌에 새겨서 나와서 문제를 풀었나?


이미 당신은 답을 알고 있다.

맞다. 노력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외우지 않으면 사람의 뇌는 지극히 간사하여 잊게 된다. 계속해서 애정을 갖고 반복하여 보고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기억은 휘발되어 버린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그 노력을 통해 이룬 사람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라고 설정하고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합리화하려 든다.


이 장에서 완곡한 표현을 써서, 수많은 배우는 이들이 겸손이라고 오독하게 만들 정도의 내용은, 사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깨우쳐주려고 죽비를 들어 후려치고 있음을 당신이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따위 아첨에 가까운 셀프디스 겸 자기 위안의 바리케이드를 치는 질문에 대해, 정말로 그 단계에 오르고 싶다면, 그런 헛소리 할 시간에 모르는 것을 한 자라도 더 공부하라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이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라떼 꼰대 취급을 받는다고 하지만, 굳이 요즘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너무 모든 것을 날로 먹으려는 경향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무언가를 많이 읽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제대로 읽는 이들은 거의 없다. 못 봤다. 읽고 나서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펜을 들어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다. 무슨 유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를 한다고들 하는데, 본래 '필사', 그들이 하는 것처럼 한번 대충 써보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단계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쓰는 것이 필사가 본래 갖고있는 의미이다.


겉멋만 잔뜩 들어, 같잖은 코스프레로 본래 필사가 가진 뜻과 수련의 의미를 더럽히지 마라.


한 번 써봐서 당신의 머리에 그것이 입력될 정도라면 뭐하러 써보겠는가? 그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서 써본다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더 오래 기억하며, 나중에 내가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되고자 함이라고 한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있나?

바둑을 가르칠 때, 공부가 될만한 프로의 일국(一局)을 부러 찾아, 온전히 외울 때까지 놓아보라고 시키는 공부 방식을 고수하곤 했었다. 물론 제자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만한, 저마다 그에게 깨달음을 줄만한 일국들을 선별하여 숙제로 내주는 것은 내 배려였다. 처음에 바둑을 경험한 초심자가 아니라 프로를 지망하는 아이들이었기에 아이들은 순순히 그 방법을 따랐고 일가를 이뤘다.


300수가 넘는 그 바둑을 그것도 한 판이 아닌, 10판 정도 되는 바둑을 그저 기억으로 외우는 것이 가능할까? 이미 자신이 둔 바둑을 복기하는 수준이 된 아이들은 다른 이의 바둑을 외울 때, 그 바둑을 뒀던 사람의 마음을 한수 한수를 통해 읽는다.


정점에 이른 프로의 바둑일수록 최선의 다음수는 경우의 수가 수밖에 없다. 암기의 과정은 그중에서 어떤 것이 최선의 수였는지를 읽어내고 기억하는 것이지, 공간지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외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바둑을 이제 배우기 시작하려는 이가 그것을 슬쩍 보았다고 치자. 그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초능력에 가까운 천재들의 향연이라고 보이지 않을까? 그런 그가, ‘모두들 천재이거나 초능력자이군요.’라고 한다면, 뭐라 답변해주는 것이 맞을까? 정작 해보지 않은, 그것을 배우지 않은 자가 그렇게 신기한 것을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질문인 것이다.

차분히 처음부터 자신이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고, 될 때까지 발분망식(發憤忘食)하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이 장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 대답을 누가 했다구? 맞다. 공자란 말이다.

나면서부터 나은 사람이냐고 칭송받았던 공자가, ‘나도 겨우겨우 부족한데도 그저 노력하고 있다.’는 대답은 그래서 더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아픈 죽비인 것이다.


부족하다고 지적을 듣고 회초리를 맞아도 부족한 사람이 말해도 그런가 할 상황에, 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공자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는데, 그런 질문을 한 자는 ‘굉장히 겸손하신데?’하면서 놀러 갈 수 있겠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힘들고 싫지만,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에  이들이 잘 나가는 건 부럽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귀찮고 버겁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강남에 사는 사람을 보면 배가 아프고, 외국어를 술술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며 인강 신청해놓고 유튜브 보고 낄낄거리며 앉아 있는 당신에게 묻는다.

 

이제 새해 결심을 한 지 며칠이나 지났는가?

당신은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이 맞나?


당신은 원래 생식(生食)을 좋아하는가?

왜 모든 것을 날로 먹으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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