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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7. 2022

왜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진정 당신이 외면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子不語怪力亂神.
공자께서는 괴이한 일과 힘을 쓰는 일과 문란한 일과 귀신에 관한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장의 내용은, 아주 짧고 간결하기 그지없다. 공자가 ‘절대’ 언급하지 않지 않았다는 네 가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모두이다. ‘절대’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不語’라는 이례적인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네 가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아는 것과, 둘째,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 네 가지를 말하지 않았는지를 파악하면 된다. 그렇다면 먼저 주자가 이 내용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怪異함과 勇力과 悖亂의 일은 이치의 바른 것이 아니니, 진실로 성인이 말씀하지 않는 것이요,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니, 비록 바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치를 궁구함이 지극하지 않고는 쉽사리 밝힐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또한 가벼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네 가지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이치의 바른 것이 아니라서, 아예 말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고, 마지막의 귀신에 대한 부분은 바르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치를 궁구함이 지극하지 않고는 쉽게 밝힐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절대 언급하지 않지 않았다’의 주체는 공자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다. 말장난같이 들리지만, 공자가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보다 훨씬 더 강한 금지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인인 공자조차도 그것을 삼간다면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주석에서의 방점은 ‘이치(理)’에 있다. 그래서 ‘그 이치에 바르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잘 모르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던 천하의 스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 사유에 대해서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근거로는, 마지막 항목에 해당하는 귀신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주자가 부연 설명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이치에 궁구 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하면서, 설명하는 사람도 그 이치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는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할뿐더러 그 설명을 듣는 사람 역시 어느 정도 이해의 눈높이에 맞춰 있어야만 하는데, 귀신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전제가 깔려 있어 쉽게 말할 부분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공자가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쳐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다는 주자의 설명은 이해하고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쓱 지나가는 사안이지만, 이 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해의 열쇠로 작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지금은 일단 공자가 천하의 스승인 입장에서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다른 한 가지는 이치라는 ‘이치(理)’를 작용원리로 보아, ‘그 작용원리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즉, 그 이야기를 왜 하는지에 대한 발화 의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명쾌하지 않은 사안에 대한 것이라는 지적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주자의 설명만으로 배우는 자들이 갸웃거리며 이해를 하지 못할까 싶었는지, 사씨(謝良佐)가 이 네 가지를 쉽게 이해하도록 반대 개념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인은 떳떳한 일을 말씀하고 괴이한 것을 말씀하지 않으며, 德을 말씀하고 힘을 말씀하지 않으며, 다스려짐을 말씀하고 悖亂의 일을 말씀하지 않으며, 인간의 일을 말씀하고 귀신의 일을 말씀하지 않는다.”

 

이 설명을 통해, 도대체 네 가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보기로 하자.

 

첫째, 괴이한 일. 괴이한 일이란 말 그대로 괴이하여 사람들이 쉽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위의 주석에서는 떳떳한 일과 대비시키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괴이한 일이라는 것의 의미는 일반적이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생긴 일인지 이해할 수 없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다시 바꿔 말하자면, 속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사정이라는 것은 대개, 말 못 할 사정이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말해지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 그 속사정을 알지 않더라도 객관적인 상황만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괴이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은밀한 속사정을 알아봐야 하고 그것을 다시 설명해줘야 하는 대상들에게 말해야 했으니 당연히 공자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이 아니라 하였던 것이다.

 

둘째, 힘을 쓰는 일. 여기서 힘이란,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 번역한 ‘물리적 힘’의 의미가 아니다. 이른바 사람이 가용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을 넘어선 힘을 의미한다. 위의 주석에서는 뜬금없는 듯 德을 말할 뿐 힘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설명은 맞지만, 이해하는 이들을 위한 상세한 설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해하기 딱 좋게 德과 대치하여 사용하니 현대 해설서를 쓰는 이들이 그저 막연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德을 말한 것이라 오해하여 ‘힘’을, 물리적인 것이라고 풀게 된 것이다. 아니다. 그저 사람이 사용하는 가용범위를 넘어선 힘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왜 그런 힘을 썼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관계로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德을 언급한 이유는, 그런 가공할만한 설명하기 어려운 힘으로 해결할 일에 대한 방법의 최선 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가공할만한 힘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런 힘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힘으로 그것을 해결했다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일반 사람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긋고 시작하는 것이니 그래서는 안된다고 여겨, 주석에서처럼 德이라면 일반인이라도 얼마든지 노력하여 이를 수 있고, 그것으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반대 개념이 둔 것이다.

셋째, 문란한 일. 표현하기 지저분하고 공자의 가르침이 지향하지 않는, 제거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무엇보다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는 공자의 기본원칙상 굳이 이런 따위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단순히 ‘19금’에 해당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인륜에 어긋나는, 혹은 상식이 지극히 어긋나 난삽하기 그지없는 패륜에 대한 모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극단적인 지저분함을 설명하는 것보다 옳고 바른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는 풀이를 한 것이다.

 

마지막, 귀신(鬼神)에 관한 일. 전에 공부하면서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귀신(鬼神)은 원래 한 글자가 아니라 유학에서는 ‘鬼’와 ‘神’이라는 두 개념이 합쳐져 형성된 단어이다. 누차 공자도 강조했지만,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학에서 귀신(鬼神)의 개념은 부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조상(先代)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제사를 모시는 입장에서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 주석에서는 인간의 일과 비유한 것인데, 이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검증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객관화할 수 없음을 지적하여 설사 끝까지 궁구하여 원리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실증적인 설명에는 부족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갖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에서 책까지 내면서 <논어>를 해설하고 해제한 꽤 많은 공부하는 이들이 그저 전통적이고 막연한 입장에서 이 네 가지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이유에는, 중국 전통 유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탓이 크다. 중국의 유학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언급할 때,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문화 대혁명 이후로 비이성적 사고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지극히 터부시 하는 해석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시대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자신들이 쉽게 경험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 잘 모르지만 궁금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찾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중국의 문학사 흐름을 보게 되면 명말청초의 소설이 인기가도를 달리게 해 준 배경이기도 했다.


명말청초에 소설이 전성기로서의 정점을 찍게 된 이유는, 이전까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썼던 이들이 식자층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에서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제법 글을 읽었다고 하는 이들이 소설 창작에 적극 가담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체계화되었고 글을 써본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향유층의 레벨이 함께 올라가면서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청나라 당시 등장한 소설, 아예 제목을 도발적으로 지었다.

하지만 문학의 발달이 상상력에서 온 것처럼 문화 대혁명을 통해 중국이 지나친 이성적 태도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중국의 문학사적인 측면을 보면 그들의 정서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후대의 학자들은 분석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귀신이나 요괴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신기한 이야기들, <산해경>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중국인들의 오래된 역사와 이야기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산물들이고 그 상상력들은 결국 그 나라의 문화기반을 풍부하게 다지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중국이 대국일 수 있는 것은 그저 인구가 많고 땅덩이가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엄청난 외연을 자랑하는 상상력과 이야기로 무장된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이성적, 합리적 측면을 넘어서는 비이성적 초현실적 특징을 가지고 그들의 문화 동력을 무럭무럭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 대혁명은 강제적 거세를 통해 그 부분을 축소시키는 자충수 역할을 해버렸던 결과를 자아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공자는 왜 ‘절대’ 말하지 않았던 것인가? 앞서 실마리가 된다고 했던, 공자가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임을 주의해서 이해하라고 일러준 자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공자는, 괴력 난신(怪力亂神)은 고사하고, 이후 <중용>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가르침이 아무리 좋아도 증거가 없으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할 정도로 ‘무징불신(無徵不信)’의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공자의 평생에 걸친 체험적 성과의 영향이기도 했는데,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교육의 현장에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공자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희들은 더더욱 함부로 할 것이 안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는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된 이들이란 말이었단 의미인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소설을 쓰는 이들은 그것을 소설이라고 하지, 실제로 자신이 경험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것이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는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자신이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누각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함부로 그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지, 그것을 입에도 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 장의 핵심 풀이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충분히, ‘소설가들은 구라쟁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는 사기꾼인가? 마술사도? 무당도? 그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도 사실 적시와 허위사실 유포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구분한다. 소설가나 마술사가 자신이 쓰는 소설이나 자신이 트릭으로 만들어낸 마술에 대해서 이것은 진짜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자가 자신을 속였다며 떠들고 다니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너무도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

요 며칠간 나는 아주 기괴한 논리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궤변을 목도하는 신기한 체험을 하였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한 아낙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이 진정한 글쓰기이고 ‘글이 곧 나’라는 논리 워프(warp; 우주선이 시공간을 초월하듯 그냥 건너 뛰어가는 이동한다는 이론) 이론으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탑재해야 할 개념을 모두 자기 집 오래된 김치냉장고 냉동실에 꽁꽁 얼려 자신의 머릿속에 넣기를 꺼리는 사람처럼 아무 말이나 배설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낙이 쓴 글은 뭔가 중간이 심각한 알맹이들이 모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 과장되거나 거짓된 삶을 살며 그것을 쓰는 이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겪은 일상만을 적어야 한다는 단순무식한 의미가 결코 아니다. 무엇을 쓰던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느꼈는지를 쓰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의 의미임을 그녀는 이해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이 쓴 소설이나 남이 쓴 절절한 감정이 담긴 문장들을 슬그머니 가져와서 자신이 영혼에서 끄집어낸 것인 양 내놓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사전적 사실관계를 원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구별된 것이다. 그 구별법은 초등학교에서 이미 가르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개념이 빠진 자리에, 그 구분이 교착된 덩어리로 꽁꽁 붙어 얼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초등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수준의 이야기이다. 즉, 아이가 방학숙제인 일기에 다녀오지도 않은 미국 여행을 가족과 다녀왔다고 쓰면 그것은 욕먹을 일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우주여행을 다녀온 소설을 훌륭한 표현으로 썼다면 그것은 칭찬해줄 일이다. 그 아낙의 글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 떠들고 있었다. 처음 글을 쓰는 이들은 당연히(?) 초등학교 일기 수준을 넘지 못한다.


심지어 글을 좀 쓰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자신이 겪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상과 자신의 느낌과 더 나아가 자신의 세계관을 펼치게 되는 수순을 겪는데, 그녀의 글쓰기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받아쓰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쓰고 나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굳이 내가 받아쓰기 수준까지 언급한 것은 그녀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실제로 그녀가 구사하는 글쓰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수시로 틀리는 맞춤법이나 기본적인 언어구사능력이 부족한 비문투성이의 글을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함일 뿐이다.

 

학교 다닐 때조차 문예부와는 거리가 멀었아줌마에게 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냐고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이로서는 지나친 것이자 배운 자로서 취해서는 안될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아줌마가 자기 입으로 ‘내가 쓰는 것이 진정한 글이다. 글은 이런 것이다.’라며 혹세무민 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대로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러면 안된다고 일깨워줘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브런치에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자신의 일상을 적시하는 것이 바닥나서 계속 똑같은 일상을 적는 자신에게 한계를 느껴 자신마저 그런 글쓰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맨땅에 헤딩하며 고뇌하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브런치에는 뉴스를 브리핑해서 올리는 전직 기자도 있고, 주식정보를 취합해서 분석하는 글을 올리는 애널리스트도 있으며, 해외 운동선수들의 약력을 서머리 해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스포츠 마니아도 있다.


그런 이들의 글이 자신의 일상을 빈칸 노트에 적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일기 쓰기 원칙에 어긋난다며 뜬금없는 총질을 해대며 ‘그것은 글이 아니고 내가 쓰는 일상만이 일기야.’라고 떠들어댄다면 그것은 궤변이라고 누군가는 알려줘야만 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무지한 데다가 당당히 혹세무민 하며 설치던 아줌마가 아니다. 올바로 돌아가는 사회라면 그런 어설픈 언행을 하는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일러주었을 것이다. 진정 애정을 가지고 있는 주변 친구들이라면, 아니면 잘 모르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도, 그건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총질하다가는 자신이 다친다고 일러줘야만 한다.


그런데, 브런치의 적지 않은, 그녀의 주변 혹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모두가 그저 적당한 립서비스를 던져주거나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그녀의 곁에서 껍데기 위로를 던져주던 몇몇 이들은, 그 잘못에 대한 것에 분노한 이가 진실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될 상황에 처하자,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런 것이라며 긴급한 손절을 해달라고까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누차 설명한 바 있지만, 내가 브런치에 굳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썩어 문드러져가는 것들을 고쳐나가자는 공감을 모아 이 사회를 제대로 세워나갈 뜻을 모으고자 함이다. 그런데, 정작 이 공간에서 버젓이 그 따위 일이 벌어지고, 다시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야 할 길이 정말로 멀구나 하는 한탄이 흘러나왔다.

학부모가 촌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학생을 구타하고 불이익을 주며 다리를 꼬고 촌지 안에 든 돈을 세는 자를 선생이 아니라 쓰레기라 불렀었다. 그런데 그 쓰레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두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최고라고 들고 다니던 도덕 선생이었다.


촌지를 챙기겠다고 가난한 학생들을 불러 몽둥이찜질로 겁박하는 순간, 마침 그 곁을 지나던 도덕선생에게 학생들이 구원의 눈빛을 보냈는데,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가던 길을 지나가는 도덕선생을 보며 학생들은 좌절하고 만다.

 

지금, 당신이 그 도덕 선생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이, 대단한 정치가들만이 이뤄낼 수 일이라은 당신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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