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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8. 2022

당신의 스승으로 삼을 자는 과연 누구인가?

굳이 셋이 길을 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 구절 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인용해서 많이들 알고 있는 가르침이다. 한 가지 자주 착각하는 것, 세 사람이 글을 감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면, 스승으로 삼을 타입은 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사람이 가는데 두 가지 타입밖에 없다고 물으면 아기돼지가 소풍 가는 날이 떠오른다. 자신을 빼고서 숫자를 세면서 계속 한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울상을 짓는 돼지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배워야 할 나는 빼야 하지 않겠는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 하나는 나 자신이니, 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하다면, 나는 그 선한 사람의 선행을 따르고, 그 악한 사람의 악행을 경계삼아 고쳐야 한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주석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함께 하더라도 그 사람이 선하면 선한대로 그것을 따르고 익히며 악하다면 악한대로 그 악행을 경계하여 나에게 그런 점이 없는지 고쳐나가면 된다는 설명으로 앞서 배웠던 불치하문(不恥下問) 정신에서 좀 더 외연이 확장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보고 배울 점이 없는 상대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윤씨(尹暾)는 이 장에 대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어진 이의 행동을 보고 나도 그와 똑같이 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의 행동을 보고 안으로 자신을 살펴본다면, 선과 악이 모두가 나의 스승일 것이니, 선에 나아감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제까지 <논어>를 매일 아침 절반 가까이 읽어왔으니 이전에 얼핏 들어 알고 있던 내용과 달리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 <논어>를 읽을 때 처음 공부할 때와 두 번째 볼 때, 그리고 마흔이 되어서 볼 때와 쉬흔이 되어서 볼 때가 다른 이유는, 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아닌 자신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험이 더 누적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어 사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이미 스펙트럼을 최대치로 넓혀 행간까지 읽을 수 있는 자와 표면적인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까지 이해하는 만큼 가져가도록 화법을 구사한 공자의 가르침이 달리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 말씀은 처음부터 같았고,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읽는 이가 더 자라 있을 뿐인 것이다.

 

왜 뜬금없이 이 장에 대한 가르침에 앞서 <논어>가 읽는 나이에 맞춰 달리 보이는가를 이야기했는지 궁금한가? 이 장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이 책 한 권 분량은 넘을 정도의 다양한 외연의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장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 그것이 당신에게는 어디까지 보이는지 먼저 물은 것이다. 어차피 눈에 빤히 보이는 것 말고, 초심자를 조금 벗어난 이들에게 보이는 것부터 풀어보자.


우리는 최근 몇 장에서 공자의 ‘호학(好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공자에게 있어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꾸준히 다양한 각도를 통해 이해해왔다.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모든 출발은 모르고 있는 것을 배우는 것에서 출발한다. 공자가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好學)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인 테크닉이나 지식만이 아님도 이미 배워서 알고 있다.


이 장은 그 호학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미처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내 인성을 고치는 것에도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배움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배움이라는 힌트를 준 것은, 본 장에 사용되고 있는 ‘스승 사(師)’라는 글자에 논리적 근거를 둔다.

 

스승이 무엇인가? 내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함께 길을 걷는 동행들이 뜬금없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준다는 말인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이 가르쳐줘야만 배울 수 없다는 배움이라는 의미의 외연 확장을 먼저 일깨워준다. 맞다. 학원을 가고, 선생님이 칠판 앞에 있어야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는 고정관념 안에 가두는 것이다.

고전을 읽음으로 동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훨씬 이전 시대의 농축된 지식을 책에 남겨준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사상을 공부하고 그가 남긴 저작을 통해 지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어 내가 변화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스승에게 배운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누구에게 배우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임을 공자는 이 장에서 먼저 강조한다.

 

두 번째는 반면교사(反面敎師 ;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하며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가능성의 시도에 대한 부분을 열어준다.


공자가 <논어>에서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도 서구 철학에서는 이 개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구 철학의 가장 기본은 모르는 것을 배우되 잘못된 것은 고칠 것이지 보고 배울 것이 아니라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전제로 삼았다.


논리학에서 아주 많이 드는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굴뚝 청소부가 두 명 있는데, 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게 검댕이 묻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누가 얼굴을 씻을까? 당연히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씻는다. 그런데 이건 반면교사의 예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얼굴에 지저분한 것이 묻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깨끗한 얼굴을 한 굴뚝 청소부의 시각적 인지일 뿐, 얼굴이 지저분한 굴뚝 청소부의 도덕적인 결함이나 악함을 보고 자신의 악함이 있는지 돌아보는 동양철학적인 개념이 전혀 담보되어 있지 않은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번에 그 이야기를 조금 입체화해보자.

얼굴에 검댕이 묻은 굴뚝 청소부는 당연히 자신이 굴뚝에 들어가서 더 지저분해졌고, 그래서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얼굴이 깨끗한 청소부는 적당히 굴뚝의 밖에서만 보조하느라 얼굴이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얼굴이 지저분한 청소부에게 얼른 가서 먼저 씻으라고 알려주면 된다. 굳이 같이 작업했는데 그 둘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보고 깨끗한 쪽에서 자기는 굴뚝에 들어간 적도 없으면서 새삼 혼자 가서 세수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만 굴뚝 안으로 들어가서 얼굴까지 지저분해진 청소부는 깨끗한 청소부를 보고,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 왜 저 녀석은 혼자서 더러운 거 묻히지 않고 나만 이렇게 온통 검댕을 뒤집어쓰고 일을 하게 되는 거지? 당연히 말끔한 청소부에게 불만이 있을 것이고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의 맹점은 굴뚝 청소부가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사람만 검댕이 묻어 있고, 다른 한 사람만 깨끗하다는 논리적 모순과 불합리가 질문을 받는 당신에게는 다각화되어 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았을 뿐이다.

왜 갑자기 이렇게 논리철학으로 아침부터 머리를 아프게 하느냐고 한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한문 안 보고 해석만 날름 읽어 챙기려는데 내용까지 이렇게 복잡해지냐고 투덜거리고 싶은가? 핵심으로 돌아와 보자. 반면교사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꺼낸 사례였다. 아주 기본적인 얼굴에 먼지가 묻고 안 묻고만 보더라도 이렇게 복잡한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행동들이 도드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를 생각하기가 쉬울까?


보통 인간들에게는 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이라는 것이 생기고 감옥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반면교사가 스스로 안되기 때문에 억지로 무서운 처벌을 두고 감옥에 가두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리는 처벌을 보면서 너희도 이런 죄를 지으면 이 꼴이 되니까 그러지 말라고 강제적으로 겁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스스로 반면교사가 되지 않으니까 억지로라도 무섭고 강제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억제시키려는 것이다.

 

아직도 감이 안 왔는가? 두 번째의 숨겨진 의미는 스스로 그런 수준이 될 때까지 올라서라는, 거기까지 올라오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공자가 단계를 높여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선한 것을 보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도 그닥 쉬운 일이 아닌데, 악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안에 있는 악한 행동의 씨앗을 제거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익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을 배우고 따라 하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사람의 간사함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던 인간 분석 전문가 공자는 그 부분이 개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스승이 없고 책이 없는 배움의 외연 확장의 출발점으로 반면교사를 화두로 놓은 것이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뭘 배워야 할지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의 단계를 지나 책을 읽고 스승에게 배움을 찾는 이들의 단계를 벗어나면 스스로를 경계하여 올라갈 수 있는 단계로 이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 철학에서는 이 점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앞서 우스갯소리로 했던 아기돼지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 두 번째까지도 고문 공부 초심자를 겨우 넘어서는 단계 정도인데 세 번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머리 아파하면 평생 당신은 논어를 1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뇌를 가락국수 사리로 채운 채 입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만 더 집중해라.


세 사람이 간다고 했고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돼지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나만 배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초심자를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기 위한 숨겨진 세 번째 의미 찾기의 해답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안 온다면, 그저 눈 따라서 스크롤을 올리지 말고 책을 읽을 때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글을 곱씹어보길 바란다. 당신이 워낙 편하게 브런치의 그들이 말하는 술술 읽히는 활자만 읽어 버릇하여 곱씹어가며 사고를 키울만한 글이나 책을 얼마나 읽지 않았는가에 대한 반성을 할 시간이다. 간단히 환치해서 다시 설명해주마.


세 사람 중에서 당신만 배우는 자(者)라서 두 사람을 가늠하고 그들에게서 선이나 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말은 그들도 당신을 그 둘 중에 하나로 판단하고 당신에게서 배울 것을 찾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당신은 과연 어느 쪽이냐고 묻고 있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앞서 두 번째의 숨겨진 의미를 해설하며 반면교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제 제대로 수양이라는 것을 하는 출발점의 기준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수양을 시작하기 위한 시작점은 곧 곁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판단되는지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그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하여 배우고 싶은 대상인지 그렇지 못한 악한 행위를 해서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될지를 끊임없이 가늠당하는 것이 배움의 길이고 그래서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고 늘 삼가야 한다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이제 함께 길을 간다는 의미가 그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로 환치되어 보이고 들리는가?

초심자를 벗어났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를 가늠하는 세 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이해하고 행간을 읽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이 장의 한 문장만으로 읽어낼 수 있는 스펙트럼의 외연은 책 한 권 이상은 충분히 뽑아낼 정도의 다양하고도 심오한 화두를 담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일깨워주고 싶고, 넘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가서 일으켜주고 싶고,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안 좋고, 나쁜 놈들을 보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혼쭐을 내주고 싶어야 정상이다. 물론 요즘은 정상이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멸종위기에 있다고들 한다. 다들 아름다운 미담을 찾아내면 아직도 세상살이가 그렇게 퍽퍽하지만은 않다는 둥 말하고 웃으며 스스로들 자위하려 든다.


내가 늘 논어 읽기를 통해 강조하지만, 이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신 못 차리고 부와 명예, 권력을 향해 자신의 몸이 불이 붙는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법비를 비롯한 정치꾼들을 보며 욕할 필요 없다. 다른 나쁜 것을 보고 나만 몰래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만 잘못을 고치고 나만 더 앞서가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순간, 그 배움은 오염되어 악화로 변질된다. 하긴, 그나마 몰래 혼자서 화장실에 뛰어들어가 숨어서라도 바꾸고 더 나아지려고 한다면 그나마 고치지 않는 놈보다는 나은 것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오늘, 이 장의 가르침을 해설해주면서 당신들에게 권하는 것은, 수양의 첫걸음을 어떻게 뗄지조차 모르는 당신에게 지침을 주려고 한다. 자신이 더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아주 쉽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 제대로 사실을 파악하는 것에서 배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SNS의 일방적 몇 글자만으로 마녀사냥을 하고 사람 다 죽여놓고서는 그것이 오해였다고 되돌리는 짓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고 저질러 왔는가? 버스 기사가 아이와 아이 엄마가 내리기도 전에 차를 돌렸다는 둥 그래서 너무 위험했다는 둥, 몇 마디 자극적인 일방적 주장만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버스 기사를 화형대에 올렸던가?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나은 편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그저 분위가 그러니까, 저 사람이 우니까, 아프다고 자지러지며 쓰러지니까 그 사람이 피해자일 것이고, 불쌍한 사람 아닌가? 그러지 마라. 조금이라도 당신이 신경 쓰고 바라보고 알아보려고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알아도 모르는 척, 잘 몰라도 그냥 선한 사람인 척 적당히 동정하고 적당히 비난하고 나중에 문제가 커질 것 같으면 ‘저는 그냥 아무것도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사회적 살인은 없는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많은 변화를 얻어낼 수 있다.

 

당신이 오늘 배운 내용에 대해 10분의 1이라도 알아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먼저 실천에 옮길 생각을 하고 생각을 움직임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진화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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