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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19. 2022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력하라.

그럴 수 있다면 두려울 것이 무에 있겠는가?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나에게 德을 주었으니, 환퇴(桓魋)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상퇴(向魋)의 초상

이 장에서 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桓魋(환퇴)는 宋나라의 군정을 주관하는 사마(司馬)의 관직에 있던 상퇴(向魋)라는 자이다. 그가 송나라 환공(桓公)의 후예였다는 이유로, ‘환’자를 넣어 ‘환퇴’라고 불렀다. 지금 이 장의 상황에 대해서 《史記(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한다.

 

경공 25년 공자가 송나라를 지나갈 때 송나라의 사마 환퇴가 그를 미워하여 공자를 죽이려 했다. 공자는 미복을 하고 피해 갔다.

 

공자가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다.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예(禮)를 익히고 있었는데 송나라 사마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고자 하여 그 나무를 뽑았다. 공자가 떠나려 하니 제자들이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

 

桓魋(환퇴)와 공자의 인연은 《禮記(예기)》, <檀弓(단궁) 上>에도 보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선생님께서 송나라에 머물고 계실 때 송나라 환사마(환퇴)가 죽으면 쓸 석곽을 만들면서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사치할 바에야 죽으면 속히 썩는 것이 낫다." 하셨다. '죽으면 속히 썩고 싶다'는 말은 환사마 때문에 나온 말이다.

 

공자의 이 혹독한 평가와 비판이 환퇴의 귀에 들어갔다면 죽일 만큼 미워했을 것은 여러 정황상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먼저 공자가 왜 이렇게 대답했는지에 대해 주자는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이미 나에게 이와 같은 덕을 주었으니,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장에서 왜 갑자기 桓魋(환퇴)가 공자를 죽이겠다고 나무를 뽑아서 달겨 들었는지 고증할만한 기록이 전하는 것이 없어 원인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명백히 멀쩡히 있던 공자를 죽이겠다고 한 것만은 명확해 보인다. 갑자기 이유 없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 그것도 그 나라의 권력자인 경우에는 누구라도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의연하게 그를 피하지 않으며 하늘이 이미 자신에게 덕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자는 그 의미를 하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무언가 빠진 것이 느껴졌는가?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환퇴와 하늘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환퇴가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을 자라면 갑자기 나무를 뽑아서 달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워낙 훌륭하신 현대의 번역자들이 낸 <논어>의 해설서에서도, 이 장에 대해 구체적인 해설과 언급을 하고 있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논거를 찾지 못하고 이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석도 거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공자가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에 대해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 두 번째는 공자는 뭘 믿고 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공자가 언급한 ‘하늘’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공자가 하늘을 언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獲罪於天, 無所禱也.)

 

이전에 공부했던 이 말로 공자의 하늘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확실하게 한번 인지했다.

이 말은 상대에게 하면 저주가 되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될 때 더 큰 무게를 갖는다. '하늘에 죄를 지을 수가 있나?' 이 문장을 통해 공자의 하늘은 그저 운명이나 하느님 따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죄악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한 악한 행위는 발각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처벌된다. 우리는 그것을 법이라고 하며 잘못된 인간을 단죄한다. 그런데 위 문장을 공부할 때 설명했던 것처럼 위 문장에서 언급하는 죄를 지은 것의 대상이 하늘이라는 것은 두 가지를 결과를 단정 짓는 조건을 형성한다.

하나는 그 죄를 도저히 감출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엄청나게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말은 더 크고 묵직한 무게를 갖는다.

 

인간에게 판단받을 수 없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아는 하늘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맞다. 자신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고 그것을 혼자 가장 먼저 알기 때문에 그 죄는 더욱 무겁고 힘겨우며 견딜 수 없는 상당한 수위의 처벌로 다가온다. 그러면 자신이라고 하면 되지, 왜 하늘이라고 했을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천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다. 알겠는가? 단어 뜻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자의 하늘은 절대적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나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공자는 《중용(中庸)》의 첫머리를, “하늘에서 내린 운명은 본성이다(天命之謂性)”이라는 말로 연다. 자신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이 의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 즉, 바꿀 수 없는 것은 하늘에게 받은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밖에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했던 공자의 호학(好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첫 번째 하늘에 대한 개념이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면서 두 번째, 공자가 왜 그 급박하고 위험한 순간에 의연했는지를 유추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대개 겁 없이 당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

덩치가 좋고 무서운 게 없는 사람? 힘이 쎄서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 돈이 많고 권력의 정점에 있어서 두려울 게 없다고 떠드는 사람? 모두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하늘을 우러러 모든 것을 보고 들어 알고 있는 하늘과 나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겠다고 하는 자가 환퇴이다. 환퇴가 어떤 자인지 모르겠으면 모르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자는 이미 그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끝낸 후였다. 환퇴는 자신의 가치 지향을 재부(財富)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공자의 기준에서 그것은 하늘에 죄를 지은 수준의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공자는 아무런 것도 겁낼 이유가 없다. 하늘이 그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을 안다. 나도 알고 그도 안다. 그가 나를 질시하거나 미워하거나 죽이고 싶다고 하여, 그가 멋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나무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공자에게는 확실하게 정립이 된 것이다.

 

하늘의 순리에 순응하여 늘 그에 맞춰 삼가는 행동을 하며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갖추게 된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을 하늘이 보살펴주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 하늘이라는 존재라기보다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이제까지 어떻게 수양하고 나를 다스려왔는지 모든 것을 알고 봐 왔던 하늘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배우고 수양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하늘이 도(道)가 무너진 어두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을 내셨다고 자부(自負)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공부하고 수양을 하는 평생을 거쳐 확고해져 갔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가르치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더욱더 확신했다. 즉,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 곧 천명(天命)을 확신했기에 더더욱 생사(生死)에 대한 집착이나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서 공자가 언급한 ‘하늘이 이 같은 덕(德)을 주셨다’ 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천명(天命)을 재확인한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죽어간 이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그 죽음에서 벗어나겠다고 울며불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준이 명확하게 선 자, 도(道)에 있는 사람이다.


‘도(道)’라는 글자가 현대에 오면서 ‘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이유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사람마다 걷는 길이 다를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갖추어 가야만 하는 올곧은 길은 결국 하나뿐이다. 그것이 누누이 공자가 강조하고 자신이 걷고자 하였고, 걸어 나갔던 군자(君子)로서의 삶이다.


공자는 그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환퇴가 자신을 감히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가 나를 물리적으로 해하든 하지 않던 나의 올곧은 길을 걸었던 마음은, 그 정신은 죽일 수 없다는 자부심에 다름 아닌 표현이었던 것이다.


재부(財富)를 자신의 지향으로 삼았던 환퇴 따위가 어찌 하늘이 세상의 목탁(木鐸)으로 내신 공자를 해칠 수 있었겠는가?


법원을 가보면, 하늘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증거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자신의 억울함을 소명하기 위해 재판에 나왔던 할아버지가 흥분해서 판사에게 외친다.

“아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저 작자가 알고 내가 아는데 뭘 더 증명하라는 거요?”


웃픈 말이긴 하지만, 그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법에서야 증거가 필요하고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하겠지만, 분명히 상대가 할아버지에게 사기를 치고 나쁜 짓을 한 것에 대해서 하늘도 알고, 그 작자가 알고, 할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거짓말이 아니다.


그런데, 한참 어린 (예비 법비) 판사는 할아버지를 꾸짖는다. 법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상대 사기꾼은 그의 비싼 변호사와 함께 할아버지를 비웃는다. 법이 그렇다.

그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을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고 시작하자면, 그들에게 하늘은 없다. 하늘이 없어진 지 오래인 듯 그들은 군다. 천벌을 받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농담을 그들은 술자리의 안주로 삼으며 웃어젖힌다.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누르고,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버젓이 잘 사는 것이 현실이라며 하늘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도대체 하늘이 있다면 왜 그런 자들이 저리 멀쩡히 백주대낮에 당당히 하늘을 바라보며 걸어 다닐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린다.


천인공노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살아가는 악마 같은 이들을 접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말도 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에게 천벌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 하늘은 당신들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다.

최소한 하늘에 부끄러운 짓을 한 이들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 죄를 안다. 즐거워 보이는 듯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천벌이 어떤 형태인지 언제 떨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떨어지는 것만은 안다. 왜냐하면 하늘은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는다고 하늘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 하늘은 그 가슴 안에 있단 말이다.

 

공부를 왜 하느냐고 가끔 질문을 받곤 한다.

아침마다 논어를 한 장씩 풀어주면서, 나는 한자의 독음을 붙여 한자를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당신이 고문을 전공하고 싶어 한문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한자도 고문의 문법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글을 쓰고 함께 공부하고 싶은 것은, 공자의 공부와 수양과 그의 평생 삶을 통해 보여져왔던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 가장 크다. 하늘이 당신의 가슴에,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대에는 ‘동경(銅鏡)’이라고 하여, 구리로 만든 거울을 썼다. 지금 박물관에 가서 보면 그것으로 도저히 뭘 보았을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닦지 않아서 그렇다. 광을 내지 않아서 그렇다. ‘동경(銅鏡)’은 매일같이 닦고 먼지 같은 것이 끼지 않게 관리를 해줘야만 한다. 지금 당신의 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 구리 덩어리일 뿐이다.


하늘이 자신의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당신의 안에 하늘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있다가 그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공부를 통해 모르고 있는 것을 궁구하고 깨달아 그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는 삶으로 수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호학(好學)의 이유이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산 이유이다. 


당신에게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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