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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0. 2022

당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설득법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삶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내가 무엇을 숨긴다고 여기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노라. 행하고서 그대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는 자가 바로 나(孔丘)이다.”

 

이 장에서는 인간 공자의 답답함이 절규로 터져 나온다. 이례적으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고유명사(이름)를 직접 드러낸다. 고문에서 스승의 이름을 휘(諱; 함부로 부르는 것을 꺼리다)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서 왕의 앞에서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자기가 호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공자가 왜 갑자기 그렇게까지 격한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뭇 제자 들은 夫子의 도가 높고 깊어서 거의 따라갈 수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숨기는 것이 있는가 의심하고, 聖人의 동정(動靜)과 語黙(말할 때고 말하지 않을 때도), 어느 것도 가르침 아닌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이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것이다. 與는 보여주다 [示]와 같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모든 열성을 다 쏟았던 진정한 교육자이고 스승이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공자의 교육법은 단순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를 해도 학생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한 맞춤 답변으로 나왔고, 모든 일상이 교과서였고, 모든 행동들이 헛투루 나오는 것 없이 하나하나가 모두 본보기였고, 가르침이었으며 꾸지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곱씹고 모두 소화해서 공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라왔던 제자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도 못되었다. 많은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이나 일상은 고사하고 공부시간에 일러준 내용조차 모두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쯤에서 멈췄더라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서 끝났을 것인데, 그들은 노력하지 않아 이해하지 못하면서 스승의 도가 너무도 높고 깊어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뭔가 정수가 되는 중요한 가르침을 스승이 감추고 전수해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의 말 한마디, 스승이 읽는 책, 스승이 사람들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또 평상시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지 등등을 면밀히 보고 익히고 따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교재이고, 스승을 곁에서 모시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방기한 채 그저 모든 것을 먹기 좋게 다 손질해서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제대로 된 정수(精髓)를 일러주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일갈을 던진다. 이 바보같이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답답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감추고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독하고 오해하고 자기 혼자만의 상상으로 새로운 엉뚱한 의심까지 하는 이들을 바꿀 수 없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겠는가? 하지만 그의 분노와 답답함은 그들이 자신을 몰라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백번 설명해준들 그들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그만큼 공자는 자신의 삶에 당당했음을 그대로 드러냄으로 보여준 것이다. 말은 매우 간단하게 ‘그대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는 자’가 바로 나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한 외침을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역사상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 정자(伊川)는 주자의 해설로 피부로 이해가 와닿지 못했을, 배우는 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이 장에 대한 해설을 달아주었다.

 

“聖人의 道는 하늘과 같아, 문하의 제자들이 가까이해서 가르침을 받아 미치기를 바란 후에야 그 높고도 멀다는 것을 안다. 가령 진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여긴다면, 도를 따르는 마음이 태만해지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聖人의 가르침은 늘 낮추어서 나아가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다. 이는 비단 자질이 용렬하고 낮은 자로 하여금 힘쓰고 생각하여 따라가기를 바라게 할 뿐만 아니라, 才氣가 高邁한 자도 등급을 건너뛰고 쉽게 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공자 같은 성인을 스승으로 두고 배움을 가져보지 않은 이들은 그 정도 그릇이 큰 스케일을 평생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곁에 있고 가까이 모시고는 있지만 스승의 도량을 모두 담아낼 수도 가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배우는 것 같지만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깊은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한참을 지나 자신이 수양하는 과정을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만약 정말로 배우고 익혀서 따라갈 수 없는 경지라고 판단된다면 아예 노력하지 않게 될 것이고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눈높이를 최대한 낮춰서 이렇게 말해준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자는 오히려 공자가 이런 방식으로 내가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주었으니 그대로 보고 익히고 배우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하여,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하는 이가 생기지 않도록 눈높이를 최대한 낮춰준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정말로 도저히 배우고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의 성인이라고 느끼고 경외감만을 느낄 뿐이라면 누가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승을 목표로 삼아 공부하겠는가? 그런데 주자의 해설도 정자의 해설도 말이 쉽지 그렇게 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 것이다.

 

그래서 여씨(呂大臨)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성인은 도를 體行함에 숨김이 없어 마치 天象과 같이 환하여, 지극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할 뿐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논어>의 절반 가까운 여정을, 지난 6월부터 거의 반년을 넘게 달려왔다. 절반 가까운 공부를 통해 당신이 배운 것을 정리해보자. 공자의 가르침의 단계는 어떤 수순을 거치는 것이었던가? 최근 술이편을 공부하면서 공자의 호학(好學)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하고 설명한 바 있다. 그토록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는 공자는 어떤 공부를 어떻게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가?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매우 간단했다. 모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수양할지를 배워야 하고, 내가 어떤 것을 알고 어떤 것을 모르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확실히 무엇을 아는지 배워야 하고, 잘못된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려면 또 배워야 하고,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배워야 하고 또 그것을 찾았으면 그것을 익히고 배워야 하고, 그렇게 그의 배워가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껴 고기 맛을 느끼지 못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다시 노력하여 그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이른바 공자의 호학(好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공자는 왜 그리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가? 혹은 배워서 뭘 하려고 배웠던가? 공자의 호학(好學)이 단순한 현학(衒學)으로 빠지지 않고 수천 년이 지나고 모든 배우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추앙받는 핵심은 ‘실천(實踐)’에 있다고 하였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하는 공부는 공자가 강조한 공부가 아니라고 누차 강조하였다. 결국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공부하고 그렇게 경성제대에 가서 법비(法匪)가 되어 신세를 망친 수많은 케이스에 대해서 당신은 이미 지금까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아침마다 들어왔다.

 

사람 된 도리를 배우는 것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을 통해 실천하고자 함이지, 그것을 배워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인문학은 다른 지엽말단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돈이 되고 밥벌이가 되는 교육 커리큘럼보다 가장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하게 밥을 먹을만한 정도의 기반을 갖춘 마흔 즈음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다시 공자의 가르침에 마음이 흔들리고 자꾸 자신이 제대로 채우지 못한 가르침에 대한 갈증을 구하게 된다.

 

공자의 제자들은 작정하고 공자에게 배우겠다고 당시로서는 굉장한 사설학원에 등록을 한 이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원에 등록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스승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배우고자 함이다. 게다가 스승으로 계신 분이 당대에 모든 위정자들이 모셔가지는 않지만 침을 흘리고 있는 성인급의 스승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도 기대치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스승의 교육이라는 것이 너무도 허탈하리만큼 보잘것없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누구라도 아는 당연한 이야기를 가르침이라고 주고, 고리타분하게 위정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원하는 소리가 아닌 쓴소리만 하기가 일쑤이고 벼슬을 한다 싶어서 스승의 줄을 잡고 나도 출세하나 보다 기대를 좀 하려고 하면, 뭐가 안 맞고 잘못했다면서 바로 때려치우고 아예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하는 수업의 내용을 들어보면 조금 어려워지거나 한다 싶으면 도통 알 수 없는 어려운 별나라 이야기 같은 것들만 나오니 이건 기대했던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저분은 유명해졌는데, 나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렇게 없다 허탈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호학공맹

엊그제 '三人行 必有我師'를 강독하면서, 해설을 하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안 온다면, 그저 눈 따라서 스크롤을 올리지 말고 책을 읽을 때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글을 곱씹어보길 바란다.”라고 쓴소리를 했었다. 그랬더니 한 아주머니가 뜬금없이 댓글에, “왜 구독자가 글을 읽으며 생각 없이 스크롤만 한다고 생각하세요? 읽는 사람도 다 생각하며 읽는 답니다.”라며 잔뜩 골이난 듯 발도장을 찍고 갔다.


갑작스러운 삽질에 웃프게도 마시던 차를 모니터에 뿜었다. 구독을 하겠다고 눌렀다가 구독취소를 한 것은 덤이었다. 당신이 나였다면, 여기에 뭐라고 답글을 달아주겠는가? 기껏 다 가르쳐주고 모든 것을 보여줬는데, 뭔가 혼자서만 감춰두고 비전(祕傳)을 자신들에게만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의심하는 무지몽매한 제자들에게 어이가 없었을 공자의 입장이 빙의되어 왔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이런 일이 가끔 있느냐고?

하루에도 두어 번이나 있다. 멀쩡하게 지역신문에 칼럼을 연재한다며 온투 똑똑한 척하던 아저씨가 원문의 내용도 독해하지 못하고서는 뒤의 평론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며 뜬금없이 시비를 거는 경우에서부터, 너무 어이없는 수준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용기를 내라고 부러 써준 댓글에 자기를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달겨드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당하고 겪는다.

 

그런 경우 당신은 상대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설득은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던, 아니, 직업이 없는 백수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테크닉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설득해야 하고, 내가 먹고살기 위해 물건을 팔려면 설득해야 하고, 무엇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의견을 이해시키고 끌어오기 위해 설득해야 하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도 설득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내가 낳은 자식을 울지 않게 하려고 해도 설득의 기술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최선의 설득 방법은 무엇인가? 돈 뭉텅이나 금괴를 던져주면 설득 따윈 필요 없다고? 그것은 설득이 아니라 꼬드김이고 매수일 뿐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설득은, 그 사람의 마음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본 사람들이라면 안다. 하다못해 장사를 해서 원래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지갑을 열게 하는 아주 간단한 판매행위조차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길거리 좌판에 나서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장의 가르침은 바로 그 설득의 최상위 경지를 말하고 있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공자의 공부는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실천은 작정하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서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든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작정해서 업무시간이나 도덕군자처럼 연기하는 시간에만 작동하는 실천이 아니라, 숨 쉬고 있는 것자체만으로도 그의 언행, 모두가 그의 배움에서 시작되어 수양을 통해 배어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앞서 그가 일갈을 던졌던 두 번째 이유에서 말했던 당당함이 거기에 묻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뭔가 준비하고 벌이지 않아도 그 모든 나 자신 자체가 공부의 결정체라고 외치는 그 당당함이, 당신이 대강 읽을 때, 그저 일갈하는 것으로 보였던 이 장의 숨겨진 정수이다.


나 자체가 내 배움과 수양의 결정체이고 내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이제까지 배우고 생각하고 수양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내가 더 뭘 보여줘고 뭘 설명해야 하냐는 당당함은, 스스로가 증거가 되는 삶을 살았던 공자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자기 선언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 장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이해한 이들은 이 장에서 잠시 할 말을 잃게 된다. 저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고 수양하고 실천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뭔가를 감추고 있어서 감춘 것을 내놓으라며 삽질을 하는 이들의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침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은 이 적나라한 가슴 벅참을 어떻게 받아들였단 말인가?


제 돈 주고 산 책으로 배우려는 이들에게 출판하여 깔끔한 책으로 제공하면 그뿐일 공부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가 새벽마다 막 꺼내 김이 나는 원고를, 그 숱한 출간 청탁도 마다한 채 원고료 한푼 받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전한다.


과연 그대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자청한다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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