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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1. 2022

공자는 과연 어떤 과목을 가르쳤을까?

사람이 되는 도리를 위해 배웠던 과목과 의미

子以四敎: 文行忠信.
공자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文, 行, 忠, 信이었다.

이 장에서는 드디어 공자가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다. 물론 <논어>의 특성상 아주 알기 쉬운 현대어로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제까지 읽어온 절반가량이긴 하지만 <논어>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상당히 많은 주석이 달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었는지 원문의 내용만큼이나 주석도 상당히 짧다. 정자(伊川)의 해설부터 살펴보자.

 

“사람을 가르치되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으며 忠信을 마음에 간직하게 한 것이니, 이중에 忠信이 근본이다.”

 

정작 상대적으로 바로 이해하기 쉬운 文과 行에 대해서는 설명하고는 忠과 信은 그저 묶어서 마음에 간직한 것이고,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만다. 이 정도 되면 주석이 아니라 또 다른 <논어>의 말씀으로 헷갈리기에 딱 좋다.

 

이 장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기 그지없다. 내용인즉, 孔子(공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 근본으로 삼았던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文學(문학)·德行(덕행)·忠誠(충성)·信實(신실)이 그것이다. 이것을 조금 구체화하여 詩書禮樂(시서예악), 躬行(궁행), 忠誠(충성), 信實(신실)로 풀어 해석하는 입장도 있었다.

 

일단 네 가지의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이 네 가지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문(文)은 가장 과정상으로도 가장 앞에 놓이는 개념인데,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개념 이전에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남긴 문헌을 해독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고문을 익혀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문학이 되었든 학문이 되었든, 일단 선대의 성인들이 남긴 기록과 저술을 통해 배워야 하는데 그 내용을 알려면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인식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 같은가? 이전 강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이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서울대에 본고사가 있던 시절, 그리고 잠시 학력고사로 그것이 없어졌다가 다시 본고사가 부활했을 때, ‘논술’이라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그 논술에서 가장 점수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서술형이었지만, 그 앞에 기본이 되는 문제는 주어진 지문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나마 수험생들의 교재로 사용할 것이 적당한 것이 없어 신문에 게재되는 논설을 축약하는 훈련으로 시험을 준비하곤 하였다. 왜 갑자기 라떼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가? 해당 지문을 읽고 그 내용을 축약하는 과정을 시험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은 과연 제대로 그 지문을 읽어냈는지를 보겠다는 것이다.


불변의 주요 과목 국, 영, 수에서 국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던가 최근 몇 년간 불수능을 국어가 주도하면서 영어, 수학보다 국어 열풍이 부는 것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문해력’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말귀는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는,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나 훌륭한 교재가 있다 하더라도 정수를 수용하여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 기본부터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상황을 보고, 같은 사람에게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다른 의견과 생각이 나와버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문(文)의 단계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것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것이지, 아직 교육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당시의 교육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문헌을 통한 공부가 가장 컸다. 어떤 문헌을 읽는가? 역사와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당연히 철학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동양고전을 통칭하여 ‘文(문학)史(역사)哲(철학)’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러하다.


그렇게 배운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래서 두 번째로 행(行)이 등장한다. 앞서 수차례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배우는 이유이자,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대한 실천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 범위는 그렇게 좁지 않다. 즉, 실천한다는 의미는 크게 양측면의 두 가지로 사용된다. 


배운 것을 그대로 지식만으로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언행을 통해 끊임없이 가다듬는 수련과 수양의 과정으로 실천해야 하는 의미와 그렇게 가다듬고 연구한 실천화된 지식을 생활에 적용한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운 지식을 통해 덕을 쌓는 것, 그리고 그 덕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때문에 행(行)이란, 개인적 실천이 사회적 실천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전체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개념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위의 두 개념은 일반인들도 막연하게나마 이해를 하고 있던 개념이라 심층적인 의미를 풀어주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뒤의 두 개념에 대해서는 정자의 주석에서도 한꺼번에 묶여서 언급하고 있어, 정확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충(忠)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가 언급하고 있는 충(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정자(程子)가 공자의 충(忠)을 주석으로 달면서 ‘진기(盡己)’라고 해설한 것은 바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푼 것이다. 현대의 의미처럼 누군가를 향해서 자신의 의미를 지키고 전쟁에서 국가에 충성하는 등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현대로 오면서 이상하게 전성된 의미 이전에 원래부터 이 의미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앞에서 공부했던 정명론(定名論)에 의하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개념에서 그 ‘~답다’를 설명할 때 가장 적확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충(忠)이다. 자신의 본분에 맞춰 최선을 다한다는 개념이 바로 충(忠)이 갖는 본래의 개념이었다. 

그래서 군인의 본분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니 그것이 후대에 전성이 되면서 ‘충성’으로 강조된 것이다.

이는 공자의 유학을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시켜 성리학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그대로 반영된다. 충신은 충언을 하고 죽을지언정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언해야 한다는 개념은 신하로서 자신의 본분을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충(忠)의 개념이 그러한 것은 알겠는데, 왜 제대로 배우고 그것을 실천한 다음의 과정에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자신이 맡은 바의 책무에 대해 최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에 나서는데, 평소에 전술과 전략에 대해 전혀 공부도 하지 않고 실전처럼 실천하며 훈련도 하지 않은 자가, 전쟁이 터지자 목숨을 바치겠다며 전쟁터에 뛰어들면 어떻게 될까? 맞다. 그냥 개죽음을 당한다. 그것만큼 허탈하고 바보 같은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의 과정을 거쳐 내 것으로 만드는 수양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양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기 어렵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어두운 골목에서 교복을 입고 버젓이 담배를 피우며 한 손에 맥주캔을 들고서 아가씨를 희롱하는 불량학생들을 보고, 평상시에 운동을 하지도 않은 아저씨가 정의감에 불타서 그들에게 참 교육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은 결과인 셈이다. 


최소한 뭘 들고 설치는 양아치들 두엇 정도는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련이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얼른 경찰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지극히 현명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수양이 이루어져야 상황 변화에도 항심(恒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기업을 경영하는데, 몇 번 파산의 경험을 겪고 어려운 경험을 했던 사람은 리스크 관리 능력을 충분히 키우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계속해서 만일의 사태를 시뮬레이션한다. 그렇게 리스크 관리를 하더라도 기업경영을 하다 보면, 문제는 예상치 못해던 돌발상황이 터지고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고 수양하고 단련했던 사람은, 피해를 최소하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당황하지 않게 된다. 누구든 평온하고 안정된 상황에서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돌발상황이 터지고 그때마다 흔들린다면 최선은 고사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충(忠)은 행(行)의 다음으로 이어져 그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가장 까탈스러운 마지막 개념, 신(信)에 대해 살펴보자. 왜 까탈스럽다고 했는지 눈치를 챘길 바란다. 앞서 충(忠)도 그랬지만,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신(信)이란, ‘믿음’, ‘신뢰’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서 공자가 가르쳤던 항목으로 소개된 의미는 단순히 그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에서 의미하는 신(信)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해설서를 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면, 신(信)이란, ‘다른 사람의 말에 속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왜 현대에는 믿는다고 설명되는 단어가 처음 갖게 된 의미가 다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왜 속지 않는 것이라고 했을까?

속지 않으려면 진위여부를 명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고 믿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런 검증과 입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과학적인 사유를 강조한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배워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속이는 것을 간파하는 것은 난이도가 다르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지만, 나를 속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속이는 상대에게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쏘는 것과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수준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런데 앞서 정자의 주석을 기억하는가? 뒤의 충(忠)과 신(信)이 마음에 간직한 것이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가르쳤다는 그 말. 그래서 신(信)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끊어져있지만 연결된 부분의 역할을 하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를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가? 일단 긴 종이를 준비한다. 종이의 앞면에는 붉은색이 뒷면에는 파란색이 있는 색종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종이로 그냥 색끼리 연결되는 원을 붙이게 되면 그냥 띠가 된다. 그런데 한번 비틀어 붙이게 되면 빨간색과 파란색이 연결되며 빨간색이던 것은 파란색으로 연결되며 분리되는 면이 없이 모든 면을 연결하여 달리게 된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붙게 된 그 부분에 바로 신(信)이 위치하며 이 네 가지 개념을 다시 융합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며, 그 배운 것을 내가 온전히 익힐 수 있게 실제 연습을 통해 수양해야 하며 그렇게 수양하여 내 것이 되었다면 실제 생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내가 맡은 바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그 최선을 다하는 대상에게 내가 자연스럽게 믿음을 주어 나를 의심하지 않게 진심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그 마음을 미루어 똑같이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공자의 가르침이 지시하는 네 가지 덕의 관계를 설명하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이 네 가지 개념은, 공자가 사람을 가르칠 때 우선으로 삼은 덕목으로 사교(四敎), ‘공문사과(孔門四科)’라도 부른다.


자아, 이제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제 당신의 머리가 복잡해질 순서이다. 내가 왜 위에서 설명하면서 네 가지 개념의 순환적이면서도 보완적인 구조를 뫼비우스의 띠로 설명했는지 뜬금없는 개념 등장에 조금 의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뫼비우스의 띠는 당신이 대강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물론 지금 당신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원인은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다. 네 가지 개념의 입체적인 상호보완과정이 결코 2차원적인 순서를 반복하는 순환구조가 아닌 입체적인 개념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에서 기인하게 될 것이다.

 

學文은 知를 얻기 위함이요, 修行은 德을 얻기 위함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수행을 통해 德을 이룸이 우선이요, 글을 배움은 그다음이다. 하지만 이 둘은 순서에 따라 진행될 사안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을 하지 않고 글을 배우기만 하면 바탕이 되는 덕성을 갖추지 못하고, 덕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글을 배우지 않으면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자는 위 주석에서 ‘學文과 修行은 忠信을 主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文과 忠은 직접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부분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 해당하고, 行과 信은 행동하는 실천으로 정신적인 부분이 발현된 실체적인 부분이다. 또, 文과 行은 개인적인 수양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忠과 信은 사회적인 미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文을 배우고 실천하여 행하며 덕(德)을 닦는 것은 忠과 信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文과 行은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상호보완적이고 忠과 信은 인과적 특성을 보이며 상호보완적이다. 아울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行은 단순히 실천한다는 것의 의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과 밖으로 실천하는 모든 움직임을 포함하는 외연이 확장된 의미이며, 信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믿는 것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나를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는 개념에서 확장되면서 사회 전체에 걸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忠信에서 말하는 忠의 개념은 자기가 맡은 바 책무에 최선을 다했을 때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인과(因果)적 속성을 갖게 된다. 文(배움)은 忠의 개념이 확장되어 자기가 가진 최대의 역량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이를 실천[行] 하지 않으면 서로 간에 믿음[信]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文行忠信의 네 가지 개념은 연속선상에 있으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입체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당신은 내내 <논어>를 공부하면서도 공자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걸어왔다. <논어>가 아직 절반에 이르지 않은 시점에 이 이야기가 술이편에 전하는 것에는 편집자들의 숨은 의도가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왜 배우는지에 대한 목적은 명확해야만 한다. 하지만 목적만 명확하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공부가 그러하고, 그 공부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그러하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가 그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 모든 과정이 어느 하나에 그쳐있거나 어느 하나를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않았다면 그러한 근본적인 궁금함도 갖지 못했을 것이고 이 설명도 그저 머리 아픈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내 주변을, 그리고 내가 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공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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