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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4. 2022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

子曰: “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斯可矣!” 子曰: “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을 내가 만나볼 수 없으면, 군자만이라도 만나보면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善人을 내가 만나볼 수 없으면, 떳떳한 마음[恒心]이 있는 者만이라도 만나보면 된다. 없으면서 있는 체하며, 비었으면서 가득한 체하며, 적으면서 많은 체하면 항심(恒心)을 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장에서는 궁극의 목표지향인 성인의 경지까지 어떻게 올라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방향과 방법에 대해 제시해주고 있다. 공자는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장의 가르침을 통해 이후에 배울 맹자의 ‘항심(恒心)’이라는 개념이 정립되는 결과를 낳는 장(章)이기도 하다.


일단 언급되는 단계의 인물 등급이 네 단계나 등장한다, 성인(聖人), 군자(君子), 선인(善人), 항자(恒者).


이 네 가지 개념이 과연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서로 간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개념들을 통해 과연 공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 장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겠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聖人은 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이의 칭호요, 君子는 才德이 출중한 이의 이름이다.

 

聖人은 당연히 배우는 자가 이루고 따르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른바 ‘성인군자’라고 하는 단어를 하나의 용어라고 착각하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군자는 그다음 단계인 것이다. 그래서 원문에서 공자는 '성인을 내가 만나볼 수 없으면, 군자만이라도 만나보면 된다.'라고 구분 지어 말한 것이다.


성인을 만날 수 없다면 그다음에 해당하는 군자라고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해석은 단순히 ‘만나다(見)’라고만 설명하였지만, 고문에서 ‘만나다(見)’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무슨 의도를 갖겠는가? 배우는 자의 의도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그를 만나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를 스승으로 모시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면 그다음에 해당하는,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재덕(才德)이 출중한 군자를 만나서 스승으로 모시는 것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군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나보다 위의 단계에 먼저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충분히 스승을 삼을만하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그다음 원문에는 ‘자왈(子曰)’이 또 보이는데, 이는 연문(衍文)이라고 하여 편집 단계에서 잘못된 경우로 굳이 또 중복해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말이다. 다음 단계에 대해선 장자(張子)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恒者란 그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것이요, 善人이란, 仁에 뜻을 두어 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주자는 여기서 ‘恒’이라는 글자의 뜻을 항상 하고 오래 한다는 뜻으로 새겼다. 전술한 바와 같이 후에 <맹자>에 등장하게 되는 ‘항심(恒心)’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공자는 ‘항자(恒者)’라고 하여 그것을 항상 하고 오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개념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무엇을 항상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것과 그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항심(恒心)’이란,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한 [恒] 마음[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맹자(孟子)가 ‘인간이 늘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선한 마음’을 가리켜 사용한 용어이다. 《맹자(孟子)》의 〈등문공편(滕文公篇)〉과 〈양혜왕편(梁惠王篇)〉에 관련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원문에서 ‘善人을 내가 만나볼 수 없으면, 떳떳한 마음[恒心]이 있는 者만이라도 만나보면 된다.’라는 순서에서 알 수 있듯이 선인(善人)이 더 상위에 있고, 그다음이 항자(恒者;항심이 있는 자)이다. 주자가 해설한 것처럼, ‘善人’이란, 仁에 뜻을 두어 악한 일이 없는 자이다. 이미 마음이 仁에 있기 때문에 부러 악한 일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단계의 사람이다.

그다음으로 언급된 이가, 네 개념 중에 가장 마지막 단계에 있는 항자(恒者)이다. 앞에서 맹자가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을 참고하자면, 변하지 않고 항상 그러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이란 인간이 늘 유지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선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즉,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하는 자를 말한다.

 

그러면 의문이 생길 것이다. 사람의 단계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의 세 가지 경우를 언급한다. 그것은 항자(恒者)가 가장 기본적인 단계임을 의미한다. 배우는 자의 첫 번째 단계이자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항자(恒者)는 공부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단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배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가장 극단적인 안 좋은 상황을 예로 들어, 이렇게 하면 항자(恒者)의 단계조차 들 수 없다고 설명한다.


‘없으면서 있는 체하며, 비었으면서 가득한 체하며, 적으면서 많은 체하는 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자들은 도저히 항심(恒心)을 두기 어려워 항자(恒者)로서의 출발점에서 서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이자, 실제로 그런 자들이 많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후 《맹자(孟子)》의 주석을 단 주자는 ‘항심(恒心)’을, ‘사람이 늘 지니고 있는 선한 마음)恒心人所常有之善心也)’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한 바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극단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허황되게 과장하는 일이니, 이와 같은 자는 반드시 떳떳함(항상)을 지킬 수 없다.

 

앞서 항심을 이해하는데 두 번째로 알아야 한다는 방식에 대한 부분이 바로 여기서 언급하는 ‘떳떳함’이다. ‘항심(恒心)’에 대한 설명을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생물학적 개념을 통해 이해를 돕는 예를 든다.

바로 ‘항상성’이 그것이다. 사람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 체온을 항상 같은 온도로 유지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말 그대로 본능이다. 그것보다 높거나 낮아지면 항상성이 깨지게 되고 그것은 건강의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심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적용된 것이 바로 ‘항심(恒心)’이라고 이해하면 크게 어긋난 부분이 없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항상성이 맞춰야 할 기준이 ‘체온’이라면, ‘항심(恒心)’이 맞춰야 하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들쑥날쑥하거나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이는 결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도리를 갖추는 것에서 배움은 시작된다. 그런데 그 가장 출발점에 있는 항자(恒者)조차 선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만나고 싶다는 언급은, 그나마 항자(恒者)마저도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어찌 된 말인가?


그러고 나서 바로 극단적인 예라고 세 가지를 든 것은 사실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래서 공자의 논법은 언제나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과 같다. 그 허황된 과장을 하는 자들은 결코 항자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선인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항자라도 만나면 된다는 문장의 사이에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본능을 갖춰야 할 항자조차도 세 가지 행태를 저지르고 다니는 이들 투성이다보니 도저히 만나기 어렵다는 반어에 다름 아닌 날 선 비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경부(張敬夫)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여, 이 네 가지 개념이 일렬로 비교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개념으로 나눠져 있는 것임을 구분하여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울 것을 방지해준다.

 

“聖人과 君子는 學問으로써 말한 것이요, 善人과 항심이 있는 자는 자질로써 말한 것이다.”

 

성인의 개념은 총체적인 것이긴 하나, 앞서 주자의 주석에서 군자를 설명하며 재덕이 출중하다고 설명한 것처럼 여기서는 학문적인 부분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그 학문이 현대의 지식적인 개념으로 국한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천을 전제로 한 배움의 정도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가 생각건대, 항심이 있는 사람과 성인과의 관계는 그 높고 낮음이 진실로 현격하다. 그러나 항심(恒心)이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장(章)의 끝에 항심(恒心)을 두는 뜻을 거듭 말씀하신 것이니, 덕(德)에 들어가는 문(門)을 사람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 깊고 간절하며 매우 분명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설명은 크게 두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성인을 목표로 삼아야 할 공부이긴 하지만, 항자에서 출발하지 못한다면 이를 수 없으니 항자조차도 이르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한 가지는 어떻게 하면 항자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반증 사례를 강조하여 항심이라는 기본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기본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항심은 항상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기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떳떳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떳떳한 것인지에 대해 이해하였는가? 대개 우리는 어떤 경우에 ‘떳떳하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내가 한 행동이 하늘을 우러러 어떤 부끄러움이 없을 때 떳떳하다고 한다. 왜 무언가를 갖춰서 떳떳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없어야 떳떳하다고 하는가?

그것이 바로 항심에서 출발한 의미를 설명해주는 언어적 발전과정의 증거이다. 떳떳하다는 무언가를 갖추는 것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당당함에서 오는 것이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을 사익(私益)을 위해서나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악용하는 등의 때 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떳떳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는 떳떳하다는 표현의 끝자락에 슬쩍 가서 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그런 설명이 가능한지 조금 이해가 안 가는가? 다시 원문의 마지막 극단적인 예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보자.


그저 거짓된 행동을 하는 이들이라고 해도 되는데, 거짓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해설에서 주자가 ‘허황되게 과장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이 그것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왜 없으면서 있는 체하며, 비었으면서 가득한 체하며, 적으면서 많은 체하는가?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지 못하면서 왜 사실과 달리 그런 ‘척’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이 추앙받고 싶고 더 대접받고 싶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형법상 사기는, 일반인들이 흔히 말하는 거짓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거짓말을 했다고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다.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사기는, 자신 혹은 제삼자에게 재물이나 재산상의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망한 행위를 의미한다. 앞서 허황되게 과장한 이들이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공자는 의미 없는 말장난으로 거짓말을 하는 이들을 꾸짖을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야 할 이들이 그렇게 굴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 개념은 나중에 맹자가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말로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배움을 얻지 못한 일반인들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장에서 회초리를 맞고 있는 이들과는 해당 범주부터가 다른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체를 도대체 왜 하는지, 비었으면서 가득한 체를 왜 하는지, 적으면서 왜 많은 체를 하는지 그 대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지만, 이는 명확하게 위정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이 항자조차도 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사람 축에도 끼지 않는다’는 살벌한 욕설의 점잖은 완곡어법인 셈이다.

 

그런데, 그 범주가 위를 향하고 있다고 하여, 배움이 부족한 이들은 그래도 된다고 면제부를 준다고 착각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공자의 어법을 다시 일깨워준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이들조차 그런 식으로 자신이 본래 지켜야 할 착한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그것을 언제든 이익을 위해 바꿀 수 있는 실정이 당연해지는 것은, '위에서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라고 말하고,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수천 년 전의 당시에서 그랬던 썩은 사회는 수천 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사회에 와서도,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 줌의 항심(恒心)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로 이어진다.

 

체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은 자연적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추워지면 옷을 더 챙겨 입고 더우면 옷을 벗는 것은 사람이 한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겨울이 되면 당연히 추워지고 여름이 되면 더워지는 것은 자연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건강한 방법이다. 그에 맞춰 사람들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겨울에는 껴입고 여름에는 가볍게 입는 것을 대단한 의식 있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왜 겨울에 반팔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뛰어다니지 않고, 여름에 두꺼운 파카에 모자를 쓰고 장갑을 쓰고 다니면 미친놈을 바라보듯 혀를 끌끌 차면서 아무것도 없는 데도 있는 체하며, 공부하지 않아 텅텅 빈 머리로 뭔가 가득 들어있는 체하며, 노력하지 않아 자신이 모아둔 재산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것을 털어 한탕하면 금세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허황된 꿈을 꾸는가?


자신이 그럴 깜냥도 안되면서 나라를 대표하겠다고 그 뚱뚱한 몸으로 틈새를 비집고 나와 자신이 아니면 이 나라를 살릴 사람이 없는 양 떠들어대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허황된 모습은 도대체 그에게 항심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의 곁에서 무언가 콩고물을 주워 먹어 실제 하지도 않은 권력을 이미 얻은 양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들을 보면서, 당신은 과연 그들과 다르다고, 당신은 본래 당신이 가지고 지켜야 할 항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항심(恒心)을 두기 어려울 것이다. 여태 강조하니까 마치 그것이 목표인 것처럼 들릴까 봐 다시 정리해준다. 항심(恒心)을 갖는 것이 배우는 자의, 사람으로서의 출발점이라 하였다. 이른바 커트라인인 셈이다. 커트라인은 넘어서야 출발이라도 할 것 아닌가?


도대체 어디까지 더 내려갈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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