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25. 2022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부질없는 과욕이 자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子釣而不綱, 弋不射宿.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되 큰 그물질은 하지 않으시며, 주살질은 하시되 잠자는 새를 쏘아 잡지는 않으셨다.

이 장은 공자가 낚시질과 주살질을 어떻게 했는지 아주 담담하게 설명한다. 지금까지의 <논어> 공부에 익숙한 자라면, 공자의 이 행동에서 의미하는 바가 가르침이 이어져 있는 것쯤은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명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잡아내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로 애매모호나 장이기도 하다. 먼저 주자는 위의 행위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網은 굵은 노끈으로 그물을 연결하여 물줄기를 가로질러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弋은 생실을 화살에 매어서 쏘는 것이다. 宿은 잠자는 새이다.

 

綱(강)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긴 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매달아 놓은 고기잡이 장비 즉, 주낙을 의미한다. 주낙은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장비에 다름 아니다. 낚시가 한 번에 한 마리밖에 잡지 못하는 것과 대비되는 행동이다. 뒤에 이어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았다는 것 역시, 필요에 따라 새를 잡기는 잡되 잔인한 방법으로 많이 잡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 낚시나 사냥을 했을 뿐이지, 무의미한 살생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인가 헷갈려온다. 그래서 홍씨(洪興祚)가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공자가 젊었을 적에 빈천하여 부모의 봉양과 조상의 제사에 바치기 위해 혹 마지못해 낚시질과 주살질을 하였으니, 엽각(獵較)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큰 그물질로 생물을 모조리 잡거나, 잠자는 새를 쏘아 뜻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는 일은 또한 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성인의 본심을 볼 수 있다. 미물을 대함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 대하는 것을 알 만하며, 작은 일에 이와 같았으니 큰 일을 알 만하다.

 

이 주석에서 ‘엽각(獵較)’이란, 사냥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사냥한 다음 사냥한 짐승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것이라 하는 바, ‘다툰다’로 해석할 경우 較의 음을 ‘각’으로 읽고 ‘비교하다’로 해석할 경우에는 ‘교’로 읽는다.

 

‘뜻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는 일(出其不意)’이란,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하는 것’을 풀어 설명한 것으로, 잠자는 새를 활로 쏘아 잡는 것을 이른다.

다 좋은데, 성인의 본심을 알 수 있다고 하고 미물을 대하는 것도 이러하였는데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알 만하다고 설명한다. 이 정도 애매모호한 설명만으로 과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먼저, 현상 자체를 가만히 살펴보자. 

왜 사람들이 주낙으로 물고기를 모두 잡을 듯이 달겨들고, 잠자는 새까지 쏴가며 새를 잡는가? 

그것이 업이라서 많이 잡아야 하는가? 위 주석에 따르면, 공자도 젊어서 제사나 필요가 있을 때 물고기를 잡고 새를 잡았지만 꼭 필요한 만큼만 잡았다고 하는 것으로 비교를 삼았다. 주석에서도 설명했지만, 그들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사냥놀이, 즉 누가 많이 잡는가를 겨루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많이 잡는 것으로 놀이를 한 이들과 공자의 차이가 무엇일까?

여기서 이 장의 숨겨진 핵심이 슬슬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 장에 설명하고자 했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합목적성에 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미래를 위한 배려이다.

 

많은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 게다가 승부를 거는 것이라면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잡을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재미를 위한 것이라면, 살생은 불가(佛家)의 가르침이라 차치해두더라도 그것을 잡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즉, 목적이 결과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일그러진 경우가 생긴다. 앞서 설명에서 공자는 그 목적에 부합한 행위로 물고기와 새가 필요한 만큼만 그것을 잡아서 사용했다. 


이것은 이른바 과욕이다. 과수원에 가서 먹지 않을 과실을 무수하게 따게 되면 내가 먹지 않은 것은 상하기 시작한다.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거대담론으로 끌고 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자들이 대개 ‘모자란 것보다 넉넉한 게 낫지’라는 논리로 그 엉성함을 덮으려 든다.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하지도 않을 것을 일단 챙겨놓고 보는 이들은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과 해악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좋은 약이라고 하여 무조건 많이 먹어서 좋다면 약을 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이 약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그 필요한 양을 맞춰 조화를 통해 효과가 극대화될 때이다. 배가 고플 때 뷔페에 가서 맘껏 먹으라고 하면 행복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데 뷔페의 음식이 동이 날 때까지 먹으라고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순간 지옥의 고문으로 바뀌게 된다. 


맞다. 필요의 합목적성을 초과하는 순간 그것의 부작용은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고통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인지 똑같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자멸하곤 한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돈. 흔히 말한다. 다다익선의 대명사라고. 돈이 많으면 정말 많을수록 좋을까? 

그건 당신이 지나칠 정도의 일확천금을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통계적으로 복권 1등에 당첨했던 사람들의 삶을 조사했던 자료를 보면, 그들은 여지없이 대부분 불행한 끝을 맞았다. 


왜일까? 그저 단순히 그들이 없던 살림에 일확천금을 쓰다가 밸런스를 잃어버린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조금 더 심리학적으로 그들의 자멸 포인트를 분석해보면, 그들은 그 돈을 규모에 맞춰 목적성에 맞춰 합리적 소비를 하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예컨대, 당신에게 지금 10년 넘게 엄청난 킬로수를 타서 그저 길에서 바로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폐차를 타고 다니다가 정말로 차가 퍼져버렸다고 치자. 당신에게 누군가 바로 당신이 평소 사고 싶었던 새 차의 가격만큼을 준다면 당신은 차를 살까? 아마도 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이 언제나 바라마지 않던 것처럼 새 차를 살 10배의 돈이 생긴다면 차를 살까? 당연히 살 것이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나머지 90%의 돈은 또 다른 필요에 의한 지출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그 돈을 흥청망청하게 쓰게 된다. 그렇게 합목적성이 무너지게 되면 목적성 자체도 소멸해버리고 만다. 정작 필요한 것을 위한 안배라는 것이 없어지고 무언가를 위해 절약이라는 것이 없어지며 다음을 위한 저축이라는 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무절제와 무계획으로 이어지면서 자멸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물론 그것이 자신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벌어서 모은 돈이 아닌 일확천금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목적성을 잃게 되는 사례로서는 크게 틀리지 않은 결과를 보여준다.

두 번째, 까치밥이라는 것이 있다. 수확기에 높은 나무 위의 과일을 전부 따지 않고 몇 개 남겨 놓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을 때 먹이를 찾지 못하는 새들이나 작은 짐승들이 한 끼의 먹이라도 해결하라고 남겨 놓은 인정(人情)의 발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인정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동정 차원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조상들의 지혜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생태계의 선순환은 인간이 정점의 포식자로 군림할 때는 깨질 뿐이다. 그 안에서 조정자의 일부로 남아 있을 때 자연이 말 그대로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원문에 언급한 낚시질도 마찬가지이다. 생계를 목적으로 투망질을 하는 어부조차 그물망을 촘촘하게 엮지 않는다. 아직 제대로 자라지 않은 치어(稚魚)를 잡지 않고 다시 바다에 보내는 이치와 같다. 작은 물고기를 거두지 않는 것을 앞서 설명했던 합목적성에 어긋난다. 


잡아서 쓸모가 없는 것이다. 생계로 사냥과 낚시를 하는 이들이 당장 상품가치가 안 되는 어린것들을 손대지 않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안배이고 배려이다. 사람은 오늘만 살지 않는다. 내일이 있기에 산다.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사는 사람은 내일을 보며 사는 사람의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 없고 따라잡을 수 없다. 멀리 본다는 것은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후손을 위한 내일을 마련하는 것이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나야 만 나무로써의 제대로 된 숲을 이룰 수 있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나무를 심는 것은 당대에 자신들이 누리기 위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위 주석의 끝머리에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열어둔 말은, 이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그 옛날 전쟁을 할 때도 훌륭한 장수는 결코 싸움을 할 수 없는 아녀자나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막연히 생각하면 인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 수도 있겠지만, 싸움은 합목적성에 맞춰 생각한다면 군인인 장수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이와 생사를 다투는 것은 그저 학살일 뿐인 것을 훌륭한 장수는 알고 있을 뿐이다.

훌륭한 장수가 그러하듯 바둑에서 고수(高手)일수록 상대의 돌을 모두 잡겠다고 달려들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예봉(銳鋒)을 꺾어, 대마가 살 수 없음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돌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물론 그것은 상대가 그러한 배려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자일 때라는 단서가 붙기는 한다. 똥오줌 못 가리는 막무가내에게는 보이지 않는 만용이고 낭비일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이것은 사실 절제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이 장의 가르침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목적에 부합한 자신을 읽는 것을 말한다. 


맞다. 앞에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이 장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에둘러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얼마나 있으면 행복한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하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평생의 화두이자 행복을 아는 열쇠일 수 있다. 술을 마셔도 내가 어떤 술을 어느 정도까지 마셨을 때 가장 기분이 좋은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왜냐하면 어떤 기분이냐 어떤 컨디션이냐에 따라 언제는 많이 마셔도 전혀 취기가 오르지 않다가 또 어떤 날은 조금만 마셔도 취기가 오르는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내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술도 그러한데, 돈은 어떠하며, 명예는 어떠한가? 자신의 분수와 자신이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만족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과욕의 선을 훌쩍 넘어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출세도 좋고, 부자도 좋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깜냥을 넘어서는 과욕은 결국 흘러넘쳐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을 피로 물들이고 만다. 옆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지 않고 ‘더 좀 더’를 외치다가 자멸하고 마는 것이다. 정치가 그러하고 부에 대한 욕망이 그러했으며 명예에 대한 집착이 그러했다.


옛날에 젊어지는 샘물이라는 것이 있다는 전설이 세상에 돌았다.

젊어지는 샘물을 마시면 마시는 만큼 젊어진다는 전설이 돌았고, 죽기 직전의 노인이던 자가 활기찬 20대의 젊은이가 되어 산에서 내려온 것을 본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장안이 모두 그 샘물을 찾으러 가겠다는 이들로 가득 찼다. 특히나 돈 많고 나이 든 이들이 사람을 풀어가며 그 샘물을 찾아오는 자에게 수천 금을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걸며 젊음을 되찾고 싶어 했다.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산삼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잡는 순간 발을 헛디뎌 길을 잃은 심마니가 그 전설의 샘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디인지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그렇게 산을 타도 보이지 않던 길로 연결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시끄러워 도저히 그곳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샘물 근처에는 앵앵거리는 아기들밖에 없었다.

그 심마니는 젊어지는 샘물을 한 모금만 마셔보겠다고 입술을 대보았다. 40대의 그는 한 모금만 마신 그 달고 시원하기 이를 데 없는 샘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 가자마자 샘물에 비친 30대 초반 때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왜 주변에 나이 많은 이들의 큰 옷 위로 아기들만 앵앵거리고 울고 있는지. 그리고 그는 문득 샘물에 다시 입술을 가져가려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그렇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아래로 달리고 또 달렸다.

 

당신은 과연 젊어지고 싶어 물을 들이켜다가 아기로 인생을 다시 리셋하는 쪽인가?


자신의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모습이 물에 비쳐 얼른 정신 차리고 도망치는 쪽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