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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6. 2022

왜 많이 듣고, 보고, 읽어야만 하는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에게.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있는가? 나는 이러한 일이 없노라. 많이 듣고서 그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며,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면 이것이 아는 것의 다음이 된다.”

이 장의 내용은, ‘술이(述而)편’의 1장에서 “나는 내가 터득한 옛날의 학술 사상을 진술하여 후세에 전수하기만 하고 나 자신이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는 않는다.”는 언급과 뒤에 배울 계씨(季氏)편 9장의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라는 내용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연계되는 가르침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것(不知而作)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스스로 “나는 일찍이 함부로 행동한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도 겸사이다. 그러나 또한 그 알지 못함이 없음을 볼 수 없다. 지(識)는 기억하는 것이니 쫓는 것은 가리지 않을 수 없으며, 기억해둠은 선과 악을 다 마음속에 기억해 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는 자는 비록 실제로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는 자의 다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어법상 자신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는 말을 한 것은 단순한 겸사가 아니다. 그러지 말라는 말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러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많았다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문제는 그 뒷절이다.

이 장에서의 ‘作’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에서부터 악곡을 만드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작을 두루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냄에 있어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준비되지 않은 자세에 대해서 앞서 꾸짖는 것이라고 본다면, 뒷절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자세에 해당하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 방법론이라 하겠다.


그래서 공자는 ‘많이 듣고서 그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며,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두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것이 아는 것의 다음이 된다고 등급을 나누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음악이든 글이든 마찬가지이다. 작곡을 예로 들어보자. 훌륭한 작곡가 선생님에게 배워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것이 배움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에서의 가르침처럼 기본적으로 이미 나와 있는 수많은 명곡들을 듣고 어떤 것이 좋은지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가 어떻게 좋은지를 공부하고 아는 것은 이미 배움의 또 다른 방법으로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고전 명곡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재라 추앙받던 이들의 음악을 듣고, 그 수많은 음악을 모두 들으며 옥석을 가리는 훈련은 물론이고 그것에서 어떤 배울 점이 있는지를 익히는 것은 이른바 전통적인 도제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많이 보고서 기억해주는 행위’라 지칭한 것은 배워야 할 기본에서부터 응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케이스를 보고 그중에서 모범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배움의 진척을 이룰 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에서 이것이 아는 것의 다음이라고 한 것은, 배움의 과정에 있는 것이기에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님을 구분한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온전히 곱씹어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안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조건으로 구양수(歐陽修)가 ‘多聞多讀多商量(많이 듣고,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해야한다.)’을 제시한 것은 이 장에서 제시한 차선의 배움을 강조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연장선상에 고전이 강조되는 것은 앞서 작곡이든 책에서든 다르지 않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 추천해줄 선생님도 없을 때는 역시 몇 세기에 걸쳐 검증받은 고전은 교재로 삼기에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를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글쓰기나 작곡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제 <논어>의 진도도 절반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조금 이해의 난리도를 높여보도록 하자.

 

공자가 단순히,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책을 내고 주석서를 출간하며 혹세무민하는 피라미들을 뭐라 하는 것에 화력을 집중했을까? 악곡을 배워 작곡하는 이들이 악곡과 작곡에 기본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들이 잘 아는 것처럼 참람되이 하는 것이 그렇게 화력을 집중하며 분노했을까? 물론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죽비가 부러져라 얻어맞고 정신 차려야 할 이들은 위정자들의 곁에서 진정한 혹세무민으로 뭇사람들을 속이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뭘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 장의 가르침으로 혼이 나야 하는지 바로 이해가 안 올 수 있다. 찬찬히 다시 살펴보자. 이 장은 앞서 이 술이편의 첫 장에서 밝혔던 함부로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지적은 그저 저술활동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왜 하는가와 호학(好學)에 대한 개념은 이 편 전체를 아우른다.


공부를 하는 것은 제대로 알고자 함이고 고전을 통해 역사와 인물을 공부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현재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그 과거의 편린(片鱗)을 읽어 잘못을 고치고 잘한 것을 계승하려는 의도에 있다. 이것은 이른바 배우는 자가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방식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성인이 저술한 과거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가르침을 게을리하고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이론으로 혹세무민 하며 적당히 떠들어가며 그것에 혹하는 위정자들과 백성들을 기만하며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쌓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공자의 시대는 적지 않았다.


정작 공자를 모셔가서 비뚤어진 사회와 국가를 바꿔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자신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자칭 현학을 과시하는 듯한 약장수 같은 이들이 춘추전국시대 전반에 걸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술이편의 전반에 걸쳐 읽을 수 있는 공자의 배우는 자에 대한 역사인식은, 현재 역시 과거의 연장선이며 미래 역시 현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옛것이 좋은 것이니 따른다는 껍데기식 이해로 공자를 폄하하려는 무식한 현대의 해설은 그 안에 있는 행간과 다각적인 해석을 이해하지 못한 부산물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배우는 자들이 아직 미지의 것인 미래를 읽고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와서 명확하게 검증되어 고증을 통해 시금석으로 삼을만한 과거의 성현들이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현대에 비추어 적용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과거에 함몰되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대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섣부른 예측이나 어설픈 독창성을 내세운 독단적인 학문 태도나 아집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보아야 한다.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어벤저스의 <닥터 스트레인지>로 더 유명한, 하지만 한때 오로지 <셜록>이라는 드라마로 기억되었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했던 전설의 셜록 홈즈를 관찰해보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콜드리딩(COLD READING;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이 결코 어설픈 초능력이나 흑마술 같은 약장수들이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한 관찰력과 통찰력에 의해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처음 만난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언제 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을 읽어내는 것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훈련된 사람에게는 아주 짧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 그것은 하루아침에 천부적으로 얻어지는 재능 같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훈련과 오랜 시간에 걸친 단련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다.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공부는 특히 그러하다. 한 권으로 끝내는 인문학 따위가 있을 리가 없고, 고전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인문학적 소양이 소복이 쌓여 인문학자 행세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문학은 지금이야 한정된 분야이지만, 공자의 시대에 있어 인문학은 그것이 곧 학문이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문학, 역사, 철학은 원래부터 한 덩어리여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고, 산술(수학), 역학, 기하학 등은 그에 더해져 갔다.


그래서 그것을 매일같이 꾸준히 10년 정도 해서 체화(體化)가 될 즈음이 되어도, 이제 학문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쯤으로 여길 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가라고 참칭(僭稱) 하지 못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공부를 왜 하는가?

현재에 적용하여 행하지 않으면, 미래에 적용할 준비 따위는 할 겨를도 없어진다. 이 장의 가르침의 가장 깊숙한 곳은 왜 공부하는가에 이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의 제시와 함께 그렇게 하지 못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들에 대한 일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방송에 나와 전문가랍시고 패널자리에 여러 명 앉혀놓고 하는 방송이 이제는 대세처럼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터지자 얼굴도 보지 못했던 감염의학과의 교수들이 갑작스러운 스타가 되어 방송을 탔고, 인문학 열풍이 이루어지자 어디서 보지도 못했던 철학과 교수들과 중문과 교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전부터 방송의 한 장르까지 형성하고 있던 영화평론에 대한 부분은 또 어떠한가? 미디어 비평을 한다고 나대던 그쪽 전공자들도 만만치 않기는 했다.


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업군이신 법비들을 빼먹을 뻔했다. 전현직 법비들이 변호사의 이름을 달고 방송에 나와 자칭 정치전문가인 양 여기저기 나와서 떠들어댄다.

 

그런데 어느날서부터인가 그들이 방송에 나와 말석의 신입 아나운서들이 읽어 내려가는 해외 토픽까지 평이랍시고 자기 감상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물론 방송이라는 것의 특성이 원래 그러한 것이기는 했지만, 과연 자신의 전공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떠들어서 정작 자신의 분야에서는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이 방송에 나올 시간에 자기 공부라도 한 자 더 하고 환자라도 한 명 더 볼 것이지, 왜 저리 허명(虛名)에 매달리나 싶었다.

방송이 그러하다 보니 삐에로들은 더 춤추고 날뛰며 인문학이라는 약을 여기저기 날리며 팔아댔다. 연극 영화를 전공한 삐에로가 역사 전문 강사라며 나섰다가 도저히 보다 못한 전문가들의 죽창에 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사라져 갔지만 대표 쭉정이가 하나 제거되었다고 해서 개선될 미디어판이 아니었다.


방송을 만들고 책을 만드는 이들 역시 자기 자식을 키우는 자들이라는 한탄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정부패로 자신이 긁어모은 부와 명예를 자식들에게 대를 이으려는 이들에게 학창 시절 그렇게 많이 할애했던 도덕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교회에 가고 성당에 가며 절에 가서 자신들의 죄악을 찔끔 내는 돈으로 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보고 들은 것이 얼마 없는 이들은 밑천이 금방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이라면 그 드러난 밑천마저도 상당히 불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똑같은 책을 읽어도 그것을 소화해내고 인지하는 능력은 그 이전까지의 내공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불어 일으킬 수밖에 없다.


꾸준히 공부하는 이는 계속해서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쌓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삐뚤게 이해한 알량한 몇 개의 지식 같지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평생을 먹고 살려 든다. 대가(大家)들은 요즘 쏟아지는 새로운 것들을 더 익혀야 한다고 바둥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어쭙잖은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해 먹기에 여력이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래서 그 격차는 더욱더 커지고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참 신기한 것은 당신이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러한 현상은 동일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 수 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두꺼운 화장을 한 뽀얀 얼굴의 늙은 남자가 아줌마들에게 인지도를 얻게 되고 그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토대로 당내 권력자의 눈에 들어 공천이라도 하나 받게 되는 날에는 드디어 여의도에서 굴러 돌아다니는 배지도 하나 주워 달게 될 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줍다가 옷 속 틈틈이 집어넣었던 그 삐뚤어진 욕망으로 채운 썩은 똥냄새나는 돈다발이 우르르 쏟아져내리며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와 자식들까지 어디 가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미래를 그들은 전혀 읽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온 평생을 그런 일을 예상할 수 있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요즘 무슨 책 읽고, 무슨 공부를 하며, 도대체 그 공부를 왜 하는가?

책도 읽지 않고 공부도 안 하며 꾸역꾸역 사는 사람에게 물어야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건가,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백정만도 못한 짓이다.


생각하고 움직여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짐승과 무엇으로 구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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